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115화 (115/227)

115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12)

이틀 동안 방구석에 처박혀 책만 읽었다. <프레오나의 개국 신화>, <크라투스터는 말했다.>, <아기오리 다섯마리>, 등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손에 집히는 책들은 전부 읽었다.

내가 책을 읽는 동안 호기심이 많은 철수는 지루하고 재미없다며 저 멀리 놀러 나간 뒤에 아직 돌아오지 않았고, 황제의 명령으로 나를 감시하게 된 보리언은 입도 뻥긋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서 있을 뿐이었다.

첫날에 보리언은 밥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람이 밥을 굶으면서 살 수는 없기 때문에, 오늘 아침엔 밥을 안 먹겠다며 극구 사양하는 보리언을 강제로 앉혀 밥을 먹였다.

덕분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지루하지 않은가?”

“예, 전 괜찮습니다.”

사실 내 얼굴은 보기만 해도 지루할 틈 없이 재미있는 얼굴이긴 하지.

그렇지만 사람이 하는 일도 없이 가만히 서서 누군가를 지켜보는 게 상식적으로 재미있을 리가 없다.

마음 같으면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지만….

“난 지루한데, 우리 외출하는 건 어떤가.”

입꼬리를 살짝 들어 미소 지었다. 이 미소가 잘 먹히길 바라며 눈도 조금 깜박거렸다.

밖으로 나가자. 나 조금 지루한 것 같아.

감시를 받으며 한곳에 머물러 있으니까 감옥에 있는 기분이다. 서서히 말라 간다는 게 이런 기분일까?

내 표정을 본 보리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목적지를 말해 주십시오.”

아싸.

“이프리트 백작저. 그리고 수도에 위치한 아틀리에도 가고 싶은데. 아틀리에의 이름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화가의 이름이 바르카였네. 혹시 알고 있는가?”

“그분이라면… 예, 알고 있습니다. 폐하의 초상화를 그리셨던 분입니다.”

“그래…?”

바르카가 황제의 초상화를 그린 화가였다니. 대충 눈치채고는 있었지만 생각한 것보다 세 배는 더 대단한 화가였다.

“예, 방문하실 시간대를 말씀해 주시면 그분의 아틀리에로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이프리트 백작저에는 지금 연락을 넣을 테니 금방 답이 올겁니다.”

보리언은 가지고 있는 수첩에 무언가를 빠르게 적어 내려가며 내게 이야기했고, 다 쓴 후에는 수첩에서 종이를 뜯고는 밖으로 나가 지나가던 시종에게 건넸다.

나는 순식간에 일을 해치우는 보리언을 멍하니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일 진짜 똑 부러지게 잘하네. 오스먼드야, 텟이랑 보리언이랑 역할 좀 바꿔 주라. 그럼, 내가 착하게 굴어 줄게.

“고맙네.”

내 말에 보리언은 짧게 고개를 숙이곤 방 밖으로 나갔다.

나는 완벽한 보리언에게 감탄하며 수도에 나갈 준비를 했다.

실제로는 일주일도 지나지 않았지만, 체감상 한 달은 나가지 못한 것 같다.

얼굴은 최대한 가리는 게 낫겠지? 옷은 무슨 색으로 입어야 하나. 마린이 말하길 나는 무슨색이든 잘 어울리지만 그중 검은색이 가장 잘 어울린다고 했다.

젠이랑 붙어 있어야 하는데.

안 되겠다. 죄다 검은색으로 입어야지.

나는 모자, 옷, 바지, 신발, 털이 달린 코트까지 전부 검은색으로 입었다.

이건 조금 그런가…?

내가 보기에도 이상하지만 남이 보기에도 이상할까 싶어 문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 보리언을 향해 물었다.

“어떤가.”

위아래로 내 모습을 한번 훑은 보리언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지만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덕분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 정신 차린 후 입을 열었다.

“…잘 어울리시지만, 오히려 너무 어두워서 너무 눈에 띄지 않을까 걱정됩니다.”

“알겠네.”

다시 방으로 들어가 검은색 털이 잔뜩 달린 코트와 칙칙한 검은색 셔츠를 벗어 던졌다. 그리고 수많은 셔츠가 걸려 있는 옷장 앞에 서서 고르고 골라 연한 살구색이 도는 셔츠를 입었다. 목이라든가 소매 부분에 프릴이 잔뜩 달려 있어서 내 취향에는 안 맞지만, 이제는 이 포엣 셔츠가 익숙하다.

검은색이 아닌 은은한 네이비 색의 코트를 입었다. 살구색 셔츠와 잘 어울리는 조합이었다.

이 조합은 젠이 자주 입는 색이었다. 핑크빛이 도는 살구색 튜닉 셔츠와 진한 네이비색 바지. 젠은 얼굴도 좋고 몸도 좋으니 당연하게도 옷 태가 잘 살았다. 평소에 젠은 손목이 보이게 소매를 걷어 입었고, 그의 다리가 워낙 긴 탓에 기성복 바지가 짧아 발목이 조금 보였다.

자연스러우면서도 완벽한 미남의 모습이었다

항상 젠이 입은 것만보다 내가 입으니까 느낌이 조금 다르다. 어른 옷을 훔쳐 입은 아이 같다고 할까?

조금 어색한 느낌에 밖으로 나가 내 모습을 보리언에게 보여 줬다.

“이건 어떤가.”

“멋지십니다.”

“알고 있네. 가지.”

보리언은 1초의 고민도 하지 않고 내가 멋지다 말해 줬다. 그에 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은 뒤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꾸했다.

일을 똑 부러지게 하는 보리언은 내가 타고 나갈 마차도 미리 준비했다. 심지어 프레오나의 문양이 붙어 있는 황제가 타는 마차로 준비한 것 같았다.

오스먼드가 주로 타고 다니는 마차는 아니지만, 프레오나의 문양이 박혀 있으면 그건 황제를 위한 마차다.

제국의 문양을 달고 있는 마차는 다른 왕국의 사절단에게도 쉽게 내어주지 않을 정도로 귀하다.

근데 이걸 나한테 대령했다고? 이걸?

“마음은 고맙지만 다른 마차로 바꿔 줄 수 없겠나?”

“마차에 문제가 있으십니까?”

마차를 거부하는 내 반응에 내게 에스코트를 해 주려던 보리언이 점잖게 물었다.

프레오나의 문양이 달렸으니 돈을 꽤 많이 들인 마차일 테고 탈 때는 편하겠지만, 이걸 타고 나선 여러모로 피곤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든다.

프레오나에 퍼지는 소문이나, 세네카에 퍼지는 소문들이 한동안 나를 괴롭힐 것 같다.

젠이 돌아오면 세네카에 갈 예정인데 내 입장이 ‘친(親)프레오나’가 되어 버리면 이래저래 피곤해질 거다.

“나는 이목을 끄는 걸 좋아하지 않아. 이 마차를 타고 돌아다니면 온 제국민의 시선을 받을 수밖에 없지 않나. 그런 건 사절이야.”

“예, 알겠습니다. 새로운 마차를 부를 테니 조금만 기다려 주십시오.”

새로 마차를 끌고 와야 하는 마부에겐 조금 미안하지만 제국 황제의 마차는 사양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부는 아무런 문양이 없는 마차를 끌고 왔다.

깔끔하고 좋다.

“번거로웠을 텐데 고맙군.”

“아닙니다.”

보리언은 내게 손을 내밀어 마차 안으로 에스코트를 해 줬다.

마차 안은 생각했던 그대로 돈을 쳐 바른 것 같았다. 좌석도 푹신푹신했고 마차의 마감이라든가 장식들이 여러모로 비싼 티가 팍팍 났다.

이 마차에 얼마나 많은 돈을 썼는지는 관심없다. 편하면 장땡이지.

나는 멍하니 좌석에 앉아 창 밖을 바라봤다. 평소 같았으면 지금쯤 내 무릎 위에 노반이 앉아 있을 텐데….

노반과 마린이 없는 순간이 이렇게 외롭고 쓸쓸한데 젠은 어떻게 기다리지?

벌써부터 밀려 오는 피로감에 눈을 질끈 감았다.

* * *

마차는 수도 한가운데에 멈췄다.

마차의 문을 열자 시끄러운 상점가의 소음이 귀를 뚫었다.

“이곳입니다.”

보리언은 내가 마차에서 내려오는 걸 도와줬고, 마차 바로 앞에 있는 저택 같은 큰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흑빛이 도는 나무로 지어진 3층 건물은 낮에는 햇볕을 흡수를 해 반짝이는 듯했다. 건물 1층과 3층에만 그려진 범상치 않은 문양이 건물의 우아함을 높여 주는 것 같았다.

이 삐까번쩍한 건물이 바르카의 아틀리에라는 거지…?

눈을 깜빡이며 건물을 보고 있자 보리언은 내게 이 거리가 자랑하는 이색적인 특징을 설명해 줬다.

“이 거리는 프레오나 중심가에서 가장 유명한 거리입니다. 이 길을 쭉 따라 걸으면 타국에서 온 상인이 가져온 희귀한 물건들도 구경하실 수 있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둘러보지.”

나는 타국의 물건이 전혀 궁금하지 않았기에 망설이지 않고 아틀리에 안으로 들어갔다. 보리언은 밖에서 기다린다며 같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틀리에는 추운 바깥과는 달리 포근한 느낌이 들었다. 그림을 다루는 곳이라 그런가 적정 온도를 맞추는 것 같았다. 텁텁한 물감 냄새도 나는 것 같다.

의외로 1층 로비에는 그림이라 할 그 무엇도 전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아틀리에를 찾는 사람도 없는 것 같다.

마음 같아선 ‘이리오너라!’라고 소리치고 싶지만 그건 조금 무리일 것 같아서 이 건물 어딘가에 있을 바르카를 찾으러 계단을 올랐다.

꽤 빠르게 계단을 올랐다. 평소 같으면 지금쯤 숨이 찼을 텐데 희한하게도 숨이 차지 않았다. 철수의 말대로 정령왕과 계약을 해서 체력이 늘은건가?

그렇다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계약이었을….

아, 숨 차.

그냥 평소 체력보다 1.2배 좋아진 것 같다. 아님 다른 때보다 내가 컨디션이 좋다든가.

“여기가….”

2층에는 바르카의 작품으로 보이는 그림들이 늘어서 있었다. 소품, 풍경, 인물, 동물 등등 다양한 것들이 그림에 담겨 있었다.

내가 이 분야를 잘 알진 못해도 이것들이 대단한 작품이라는 걸 알 정도로 완벽했다.

“화, 황자님…!”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수척해진 바르카의 인영이 보였다.

바르카는 나를 향해 우다다다 달려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무릎을 꿇고 앉아 내 바짓단을 슬며시 잡았다.

“황자님! 사라지셨다고 들었습니다. 저 정말 너무 놀라서… 다행히 돌아오셨군요! 흐윽!”

바르카는 눈물을 뚝뚝 떨구며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바르카를 달래며 조심스레 말했다.

“바르카, 이러지 말고 일어나. 네가 이러고 있으면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입술을 꾹 깨문 바르카를 천천히 달랬고, 바르카는 퀭한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황, 황자님… 나쁜 일을 당하신 건 아니시죠? 저 정말 황자님이 걱정이 돼서 붓도 손에 안 잡히고… 흑…!”

또 울음보가 터졌다.

나와 딱 한 번 만났던 사람이 내가 사라졌다고 눈물 콧물 쏙 뺄 정도로 호들갑을 떤다면 오버하지 말라고 고개를 돌렸겠지만 바르카는 다르다.

나를 자신의 뮤즈라고 말해 준 아이라 그의 심정을 조금 알 것 같았다. 자신의 뮤즈가 사라졌다면… 그래, 꽤나 놀라지 않았을까.

“별일은 없었어. 사실 나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거든. 눈을 뜨니 한 달이 지나 있지, 뭐야.”

“아, 아무 일도… 크흡… 없으셔…서어… 다, 다행입니다.”

한참 울었던 탓에 기운이 쏙 빠진 바르카는 바닥에 엉덩이를 깔고 주저앉았다. 그 와중에 내 바짓단을 잡은 손은 절대 놓지 않았다.

“그래, 나 아무 일도 없었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는 바르카를 위해, 나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러자 바르카는 화들짝 놀라며 바로 일어났다.

“이, 이쪽으로…!”

바르카는 옷소매로 빠르게 눈물을 닦고 저쪽으로 가자며 내게 손짓했다.

나 이미 앉았는데. 보는 사람도 없는데 그냥 바닥에 앉으면 안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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