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13)
바르카가 데려온 곳은 아직 가 보지 못한 3층이었다.
주저앉은 엉덩이를 겨우 들어 바르카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3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자 뚫려 있던 2층과는 달리, 3층으로 통하는 길은 거대한 흰색의 문이 막고 있었다.
“이곳은 제 작업실이자 생활 공간이라 남들에게는 공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 작업실에서 지내는 건가?”
의아하다는 내 눈빛에 바르카는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집은 따로 있지만 한번 작업을 시작하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아서 잠잘 공간만 간단하게 마련한 곳입니다.”
“그렇구나.”
바르카는 주머니에 있던 기다란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그러자, 오래된 물감 냄새가 확 끼쳤다.
“저기 앉아 계시면 곧 오겠습니다!”
나는 바르카가 가라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3층은 2층과는 달리 소수의 작품들만 전시되어 있었는데 전부 사람이 그려져 있었다.
사과를 먹고 있는 어린 남자아이, 노란 스카프를 두른 채 웃고 있는 여인, 녹색 제복을 입은 기사, 장갑을 벗으려는 나이가 지긋한 귀족, 눈을 감고 있는 미소년,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그려져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나와 젠이 그려진 그림이 가장 압도적이었다.
바르카가 로테 별궁에 왔을 때 계획하지 않고 즉흥적으로 그렸던 그 그림이다.
살며시 웃고 있는 나를 다정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젠.
명도, 채도, 그림이 가진 분위기 그리고 이 그림을 보자마자 느껴지는 황홀한 기분까지 완벽했다. 내가 그림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바르카 아틀리에의 2층과 3층, 그리고 지금껏 내가 봐 왔던 어떤 명화들과 비교해도 이 작품에는 못 미칠 거다. 모든 게 완벽한 그림이었다.
“아! 그 그림은 안 팝니다!”
“응?”
바르카는이 무언가가 잔뜩 올려진 쟁반을 손에 들고 다다다 뛰어왔고, 용케도 떨어트리지 않았다.
그나저나 나를 모델로 그린 그림인데 나한테 안 판다고? …아니, 그냥 주는 거 아니었어?
“그 그림은 절대 안 팔 겁니다! 제 인생을 담은 그림입니다! 아무리 황자님이 원하시라도 절대 팔지 않을 겁니다!”
바르카는 소리치며 손에 든 쟁판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회색의 천을 가져와 보이지 않게 그림을 덮었다.
“나랑 젠을 그린 건데… 나한테 안 판다고?”
“원하신다면 한장 더 그려 드릴 테지만… 저건 안 됩니다! 저 그림이 어떤 그림인지 아십니까?”
바르카는 주먹을 꽉 쥔 채, 저 그림에 담긴 자신의 지난날을 이야기했다.
“황자님이 사라지셨다 들었을 때 세상이 까매지면서 색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황자님의 초상화는 이미 마린에게 건네주었고, 더이상 황자님에 볼 수 없다는 마음에 의욕도 점점 사라지고… 그렇게 붓을 잡지 못하고 방황할 때 저 그림이 떠오른 겁니다. 완성하고나서 며칠을 울었는지…”
바르카는 에절한 목소리로 나를 향한 애정을 표현했다. 그가 흥분에 사로잡히는 바람에 정확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충 내가 너무 좋아서 미치겠다는 이야기 같았다.
그나저나 저번에도 그림이 안 그려지다가 나를 보자 심상이 마구 떠올랐다고 그러지 않았나? …꽤 자주 슬럼프에 빠지는 타입인가.
“이제 내가 있는데 그림은 어찌 되든 상관 없는 거 아니야…?”
“아닙니다! 황자님이 세상에 존재하시는 것과 별개로 이 그림은 제가 절망에 빠졌을 때 저를 구해 준 겁니다. 절대 넘길 수 없습니다. 평생 함께할 거고 죽을 때 이 그림과 같이 땅에 묻힐 겁니다.”
그건 조금 섬뜩한 말이다. 나와 젠이 그려진 그림과 함께 묻힐 거라니….
“그래… 달라고 안 할게.”
바르카의 눈빛에서 강한 집념이 느껴졌다. 저건 가져가도 찝찝할 테니 이쪽에서 포기하는게 나았다.
젠과 함께 그려진 그림이라 조금 아깝긴 하지만… 나는 실재하는 젠과 함께 지낼 거니까 괜찮다.
“네! 제 원동력을 지켜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이거 입에 맞으실지 모르겠지만, 한번 드셔 보세요!”
바르카는 아까 가져왔던 쟁반에서 그릇과 찻잔을 내 쪽으로 빼 줬다.
검은 찻잎이 띄워져 있는 연한 붉은색의 홍차와 함께, 생크림이 잔뜩 발려 있는 케이크였다.
딱히 배가 고프진 않았지만 들고 온 성의가 있어 포크를 들고 케이크를 한입 베어 먹었다.
“…어떠십니까?”
“너무… 달아.”
웬만하면 맛있다고 하고 먹어 주려 했지만 이건 아니었다.
생크림 케이크 위에 장식된 키위, 오렌지, 딸기 등등 갖가지 과일들은 설탕에 절여서 당분을 흡수한 것 같았고, 생크림은 설탕 한 포대를 전부 넣었는지 이가 썩을 것처럼 달았다.
이 정도 달았으면 스폰지 부분은 덜 달 법한데 토핑, 그리고 생크림을 뛰어 넘는 단맛이 느껴졌다.
한마디로 설탕으로 절여진 케이크다. 이렇게 달게 만드는 것도 재주다.
“제 입맛에는 적당히 단 것 같은데.”
“마음은 고맙지만… 난 못 먹겠어.”
바르카는 아무렇지 않게 설탕 케이크를 입에 넣었고, 나는 그 모습을 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보기만 해도 아까 느꼈던 단맛이 입 안에서 재연되는 것 같다. 끔찍한 케이크다.
입가심으로 홍차를 마시려 손을 뻗었지만 이것조차 달 것 같아 망설여졌다.
“설마 이 차도 달아?”
“아마도… 황자님의 입맛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다시 달지 않게 내 오겠습니다!”
“아니야. 내 오지 않아도 괜찮아. 사실 곧 한나를 보러 가야 해서 오래 못 있어.”
일어나려는 바르카를 다시 앉혔다. 그러고는 내 몫의 케이크를 바르카 쪽으로 밀었다.
떠넘기는 건 아니고… 그냥 내 쪽에서 조금 멀어지게 하는 것뿐이다.
“한나를 말입니까?”
“응, 한나도 걱정했을 것 같아서.”
바르카는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랬었죠. 황자님을 찾는다고 이래저래 바빴을 겁니다. 그동안 숨겨 왔던 사병도 풀었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숨겨 왔던 사병이라니. 젠이 들으면 웃겠다.
“사병은 소문에 불과하긴 하지만, 재물은 조금 풀었다는 건 사실일 겁니다. 그 이프리트 백작 가문이 지금 갖고 있는 거라곤 썩어 나는 재물뿐이니, 똑똑한 한나라면 그 돈을 썼을 겁니다.”
바르카는 보기만 해도 소름이 돋는 케이크를 큼직하게 떼어 먹으면서 말했다.
한나가 재물을 풀어서까지 나를 찾았는데, 맨땅에 헤딩한 것처럼 허무하게 만든 것 같아 굉장히 미안하다.
내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자, 바르카는 손에 쥔 포크를 탁자 위에 내려놓고 부드럽게 말했다.
“어디 다녀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활쫙 웃는 바르카의 모습에 작은 미소가 지어졌다.
* * *
“한나 백작을 보러왔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이프리트 백작저로 들어가자, 저번에 보았던 한나의 시종인 세바스찬이 안내를 도와줬다.
웅장한 복도를 지나 응접실로 들어가자,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앉아 있는 한나를 발견했다.
“아, 안녕….”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말을 더듬으며 인사했다. 그에 한나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보고는 눈이 새빨개졌다.
눈물을 참는 것 같이 보였다.
아니, 설마 너도 울려고…?
“황자님….”
“어어…”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한나는 한숨 놓는다는 표정을 한 채 고개를 숙이곤 눈을 가렸다.
아… 오늘 몇명을 울리는거야.
갑자기 밀려오는 죄책감에 머리가 지끈거릴 때, 응접실에 문이 열리고 아주아주 오랜만에 보는 얼굴을 마주했다.
“황자님…!”
“몰, 몰베인 경!”
레이 몰베인이었다.
레이는 트레이드 마크인 백금발이 휘날리게 달려왔는지, 머리카락도 다 떠 있고 숨도 거칠었다. 그런 레이를 따라 어떤 아리따운 여인이 들어왔고 그를 자중시켰다.
“아, 레이… 오랜만이네.”
가벼운 미소를 지어 레이에게 인사했다. 그에 활짝 웃은 레이는 내게 가까이 다가와 내 몸을 이리저리 확인했다.
아마 다친 곳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는 것 같았다.
“황자님! 정말… 정말 황자님이신거지요?”
“몰베인 경! 황자님께 예의를 지키셔야죠!”
“아!”
레이의 뒤에 있는 아리따운 여인이 레이의 옷을 잡으며 진정시키자, 레이는 그제야 정신을 차린지 내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세네카의 4황자님을 뵙습니다.”
“세네카의 4황자님을 뵙습니다.”
레이가 먼저 인사하자, 아리따운 여인도 함께 인사를 올렸다.
“그렇게 격식 차릴 필요 없어. 오랜만이야 레이.”
손을 올려 레이에게 인사했다. 그에 감격한 표정을 지은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무사하셔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자신과 함께 온 여성을 소개해 줬다.
“이 여인은 제… 저와 함께하고 있는 바네사라고 합니다.”
아내도 아니고, 애인도 아니고, 함께하고 있는은 무슨 말일까.
아, 그때 말했던 그 여인인가? 레이가 좋아한다던.
“처음 뵙겠습니다. 바네사 하일란이라 합니다.”
바네사는 진한 녹색빛이 도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인사를 올렸다. 그녀가 고개를 숙이자 컬이 들어간 붉은 머리가 흔들렸다.
확실히 예쁜 사람인 것 같다. 물론 외관은 옆에 있는 한나가 더 아름답지만 뭐랄까… 바네사가 풍기는 분위기가 그녀를 아름답게 보이게 하는 것 같았다.
말투나 분위기나 여러모로 눈길이 가는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딱 거기까지고 깊은 관심이 가진 않았다.
다과를 들고 온 세바스찬에 의해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지위상 내가 상석에 앉긴 했지만 오른쪽에 앉은 한나의 눈치가 보였다. 둘이 남매 아니랄까 봐 젠이 날 질책할 때 풍기는 분위기와 비슷했다.
“어디 계셨었는지 여쭈어 봐도 되겠습니까?”
한나가 포문을 열었다.
어디 계셨다라… 한나에게는 솔직하게 말해 주고 싶지만 레이도 있고 바네사도 있으니 솔직하게 말하는 건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야겠다.
“나도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어. 별궁 꼭대기에 갔었는데, 눈을 뜨니까 한 달이 지나 있더라.”
“별궁… 로테 별궁 말씀하시는 겁니까?”
“응.”
한나는 내 이야기를 듣고,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했다.
진짜 짚이는 게 있는 건가?
“레이, 바네사. 잠시 자리 좀 비켜 주세요.”
한나의 말에 세바스찬이 움직여 레이와 바네사를 밖으로 안내했다.
응접실엔 나와 한나만이 남았고, 한나는 나를 보며 꽤나 진지하게 물었다.
“혹시… 황자님께선 정령계에 다녀오셨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