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14)
한나는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정령계라니?”
일단 모르는 척 되물었다.
한나를 못 믿는 건 아니지만, 한나가 어떻게 정령과 정령계에 대해 알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순진한 표정을 지으며 한나를 바라보자, 한나는 잠시 문밖을 바라보곤 곧바로 입을 열었다.
“황자님께서 머무시는 그 로테 별궁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계시나요?”
“대충은 알고있어.”
“그분은 제 조부이자, 선대 백작의 아내분이셨습니다.”
응…? 이건 또 무슨 전개야?
한나의 조부, 그러니까 한나의 할아버지가 샤를로테와 혼인을 한 사이였다고?
당황스러운 마음에 눈을 크게 뜨자, 한나는 내 혼란스러운 생각을 정리해 줬다.
“그분은 어느 남작가에 입양된 뒤, 저희 조부와 연을 맺었습니다. 그분들 사이에서 태어난 게 저희 아버지세요.”
짧게 미소를 지은 한나는 주먹을 꽉 쥔 채 다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당시 황제였던 베르손 프레오나가 그분을 마음에 들어하셨습니다.”
“아….”
“황제에게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제 조부의 혼인이 파기되었어요. 황제는 그분을 황궁으로 데려갔습니다.”
놀랍다.
피는 못 속인다고, 타루스처럼 억지로 데려왔을 거라 예상했지만 이건 진짜… 상상을 넘을 정도로 역하다.
“그 이후 베르손 황제는 추악한 사실을 은폐했고, 저희 가문은 이름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가문의 이름…?”
“네, ‘이프리트’라는 이름은 그분의 마지막 선물이셨습니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이프리트라는 이름이 나올 수 있는 거였어.
그나저나 베르손 황제가 어마어마한 쓰레기였네. 아랫사람의 아내를 빼앗은 것도 모자라 사실을 숨기려 이름까지 바꾸게 했다고? 허!
“네 조부는 그걸 보고만 있던 거야?”
“어쩔 수 없었을 테니까요. 게다가 두분이서 제 아버지를 낳긴 했지만, 성애적인 의미로 사랑하는 건 아니었다고 합니다. 제 조부께선 그분을 절친한 친구라고 하셨죠.”
“친구….”
아직도 조금 혼란스러웠지만, 내가 살던 시대와 다르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한나는 끊어졌던 말을 다시 이었다.
“조부께선 제게 가끔 그분의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불을 가지고 다니는 멋진 여인이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 주셨지요.”
한나의 조부는 아무래도 로테에게 신임을 얻었던 것 같다. 그러지 않고서야 정령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줬을 리가 없지.
한나는 자신의 조부에게 들었던 로테의 이야기를 내게 말해 줬다. 미소가 밝은 사람이었으며 당차고 순수했던 사람이라고.
철수가 이야기해 줬던 로테의 모습 그대로였다.
하지만 로테의 곁에는 아군보다 적군이 많았고, 베르손 황제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바람에 황후와 다른 첩들의 시기와 질투를 받았다.
결국 오래 버티지 못하고 짧은 생을 살았던 안타까운 사람이라 했다.
“그분이 타계하신 뒤, 남긴 편지가 한 장 있었습니다. 그 안에는 다양한 이야기가 적혀져 있었지만, 가장 놀라웠던 이야기는 자신의 별궁에 보물을 숨겨 놓으셨다는 이야기였죠.”
“보물?”
“네. 별다른 설명없이 보물을 숨겨 두었다는 이야기만 있었습니다.”
내가 들어갔던 그 동굴을 보물이라고 말한 걸까?
그나저나 보물 한번 찾기 어렵겠네. 까닥하면 추락사를 당하는 무서운 곳에 숨겨져 있으니까.
“보물이라면 누군가가 이미 파헤쳤을지도 모르잖아.”
내 말에 한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편지를 아는 사람은 당시 황제와 그분과 가까웠던 지인들뿐이었고, 덕분에 보물의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별궁이 망가지길 원하지 않았던 베르손 황제는 로테 별궁을 가만히 놔두라고 했죠.”
하긴, 선 황제의 유언 같은 게 있었으니 보물이 숨겨진 사실을 알고 있던 타루스도 로테 별궁을 함부로 뒤지진 않았던 거겠지.
어차피 뒤져도 어디 있는지 모르겠지만.
“편지를 읽었던 다른 사람들은 몰랐겠지만, 제 조부는 그 보물이 무엇인지 눈치채고 계셨습니다.”
로테는 가진 게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베르손 황제가 보석, 비단, 하다못해 눈에 보이지 않는 명예를 안겨 주었어도 로테는 그것들을 보물이라 생각하지 않았으며, 손안에 든 것을 보고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런 로테가 보물이라고 말할 것이라면 단 한 가지.
“정령이 확실합니다.”
곧은 눈으로 나를 바라본 한나는 확신하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확신하는데 아니라고 하기엔 양심에 찔렸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한나니까.
한나나 젠, 둘 다 죄책감을 가지지 말라고 했지만 말처럼 쉬운 게 아니었다.
나는 한나를 잠시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곳과 정령계가 맞닿은 곳이었어.”
“역시…!”
손바닥을 마주치며 좋아하는 한나에게 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타루스가 말하길, 내가 머무는 로테 별궁 지하에 보물이 숨겨져 있다고 했어. 본인은 안 믿고 있던 것 같지만, 나는 밑져야 본전이니 별궁에 돌아오고 나서부터 지하실 입구를 탐색했지.”
“타루스 프레오나도 알고 있었군요.”
“타루스도 베르손 프레오나가 말해 준 것 같아. 그리고 나랑 젠이 지하실을 열심히 찾아봤는데 지하실은커녕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지.”
지하실 같은 건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았었다. 사실상 젠과 데이트한 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황자님은 찾으신 거죠?”
조금 기뻐 보이는 듯한 한나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지하실이라고 했지만 가장 윗층에 있었어. 어떤 원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밑으로 통하는 구멍이 있었고.”
“그렇군요.”
“거기에 빠져서 정령을 만나고 밖으로 올라오니 한 달이 지나 있던 거야. 난 거기서 몇 시간 있지도 않았었는데. 신기하지?”
한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속이 시원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별일 없어서 다행입니다. 전 황자님이 어떤 무뢰배한테 납치라도 당하신 줄 알고… 오라버니를 뵐 면목이 없었습니다.”
한나는 내가 사라졌던 한 달이 자신에겐 생과 사를 오가는 시간이었다고 했다.
타국의 황자가 사라졌다는 것은 아주 위중한 일이었고, 오스먼드도 나를 얼른 찾아내라며 한나를 쪼아 댔단다. 그런 것까진 괜찮았지만, 그녀는 젠이 가장 걱정이었다고 말했다.
나중에 토벌에서 돌아왔을 때,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 젠이 어떻게 행동할지 감도 안 잡혔단다.
사실 나도 그건 조금 무섭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사라진 후에 젠이 어떨지 궁금한 마음도 있다. 한나에게는 조금 미안한 말이지만 말이다.
그런 내 반응을 본 한나는 내게 진지하게 말했다.
“황자님, 혹시나 해서 이야기하는 거지만… 오라버니를 시험하시려는 생각은 좋지 않습니다. 오라버니라면 주저하지 않고 다 날려 버릴 겁니다.”
“응….”
알지, 이상한 곳에서 노빠꾸잖아.
“아무튼 정말 다행입니다. 특별한 경험을 하셨네요.”
“응, 덕분에 혹을 붙여 오긴 했지만….”
철수를 생각하며 말했다.
“혹? 이 몸이 혹이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심심하다고 혼자 뛰쳐 나갔던 철수가 언제 왔는지 내 뒤에 서 있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혹이냐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이 꼴을 보면 얘가 정령왕인 걸 누가 믿을까.
“인사해, 로테의 손녀.”
나는 아직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철수에게 한나를 소개해 줬다.
그리고 철수를 볼 수 없는 한나는 조용히 내게 의문을 표했다.
“손녀…?”
“뭐야, 너도 로테에 대해 잘 모르고 있었네.”
“로테가 숨기고 싶어 했던 이야기도 있으니까. 너도 별로 관심 없었잖아.”
맞는 말이다. 젠과 연관이 있나 없나만 관심이 갔지 로테가 누군인지 뭐하던 사람인지는 몰라도 괜찮았다.
철수는 내게 대충 대꾸해 주면서 한나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입을 크게 벌리며 놀랐다.
“저 아이한테 모습을 드러내도 돼?”
“그래.”
철수는 한나에게도 자신의 모습을 보이게 했다. 그러고는 불처럼 타오르는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뒤 한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런 철수의 모습을 본 한나는 오랜 전설의 신수를 본 것 처럼 깜짝 놀랐고, 너무 놀랐는지 손으로 입을 막으며 철수를 가만히 응시했다.
“네가 로테의 자손이었구나! 얼마 전에 네 오라비랑도 만났었어. 둘이 닮은 듯 닮지 않았네.”
“….”
“아, 이 몸의 소개가 늦었군. 이 몸은 이프리트라고 한다! 불의 정령왕이지.”
철수는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한나에게 친절하게 이야기했고, 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철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나의 모습을 자세히 살핀 철수는 한나에게서 로테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다며 감격했다.
젠을 봤을 때는 로테의 기운만 느껴진다 했으면서….
“정말 닮았어. 느낌도 그렇고, 조금 차분한 로테 같네.”
한나는 철수가 무슨 말을 하든 반응하지 못하고 그저 바라만 봤다.
“한나? 괜찮아?”
“네… 괜찮습니다. 그저 조금 놀란 것뿐입니다.”
한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웃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본 철수는 나를 바라보며 큰 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의 기운이 너무 좋아! 너랑은 전혀 달라. 맑고, 곧고, 바르고. 완벽해!”
나랑은 다르다니….
그래, 인정한다. 사실 나는 철수가 생각했던 것처럼 착하고 고운 심성을 가지진 않았지.
“그렇게 좋으면 한나의 옆에 있어.”
“그래도 돼?”
철수는 내 비꼬는 말에 활짝 웃으며 그래도 되냐고 물었다.
사실 철수가 내 곁에 있든 없든 신경 쓰지 않았지만 지금은 조금 불편했다.
저렇게 가고 싶어 하니까 더더욱 안 보내 주고 싶어졌다.
“안 돼.”
“왜! 어차피 넌 이 몸이 필요 없잖아.”
“그렇긴 한데, 그래도 안 돼. 네가 한나 옆에 붙어 있으면 피곤해할 거야.”
제일 중요한 건 이거다.
저 말 많은 놈이 한나의 옆으로 가면 시종일관 떠들 텐데, 한나는 착해서 다 들어 주고 있겠지.
“적당히 할게.”
솔직한 심정으로 철수가 한나의 옆에 가 주면 나는 편하겠지만… 저 앵무새를 한나한테 떠넘기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하지 않다.
정령왕의 취급이 너무하지만, 어쩌겠어. 귀찮은걸.
“황자님, 전 괜찮습니다.”
철수가 은근슬쩍 한나에게 눈치를 줬었나 보다. 한나 입에서 괜찮다는 말이 나오다니.
“진짜 시끄러울 거야. 자기는 호기심이 중요하다느니 뭐냐느니 하면서.”
“적당히 할게!”
철수는 한나의 팔을 툭툭치며 얼른 괜찮다고 대답하라고 일렀다.
“…아마 괜찮을 겁니다.”
“안 괜찮을 것 같은데.”
전혀 괜찮지 않을 것 같다는 내 말에 한나는 담담하게 웃었고, 철수는 내 반응이 마음에 안 드는지 볼을 부풀렸다.
철수를 이대로 떠넘기려니 어딘가 찜찜하긴 하지만, 둘이 괜찮다면야 뭐.
“어차피 네 마음대로 할거면서 허락이 왜 필요해. 한나도 철수가 괴롭히면 바로 돌아가라고 해. 알았지?”
“네, 알겠습니다.”
“좋아! 잘 부탁해. 로테의 아이야.”
철수가 끼어들며 말했다.
한나 덕분에 혹 하나 뗐다.
“야!”
아이고. 아직도 내 속마음을 읽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