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16)
“그 두 남작의 성격은 어때?”
적을 상대해야 하니, 두 남작이 어떤 성격과 성품을 가지고 있는지 물었다.
내 물음에 깊은 고민에 빠진 한나 대신, 레이가 말했다.
“오디슨 남작은 욕심이 많습니다. 무슨 일이든 자신이 중심에 있으려 하죠. 가지고 있는 재산도 많고 재물도 많지만, 오디슨 영지민들의 대부분은 가난을 앓고 있습니다.”
“전형적인 못된 귀족이구나.”
“맞습니다. 반대로 소비안 남작은 뱀 같은 자입니다. 영지 관리도 잘돼 있고, 상단 사업도 번창하고 있죠. 항상 꿍꿍이에 쌓여 있지만 선한 모습으로 그 뒤에 추악한 것들을 감춥니다.”
레이는 두 남작들의 대해서 자세하게 알려 줬다.
누가 보면 벼르고 있던 사람처럼, 누구보다 자세하게 그들을 알고 있었다.
신기하기도 하고, 궁금한 마음에 레이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레이, 혹시 뒷조사했어?”
그에 화사하게 웃은 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웬만한 귀족들의 정보는 다 저한테 있습니다.”
“진짜?”
“저희 가문은 정보력으로 움직이니 이 정도는 기본으로 알고 있어야 가문을 이끌 수 있습니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레이가 얄밉게 느껴지기는커녕 대단한 것 같아 박수를 쳐 줬다.
레이도 공작이었지. 학창시절 동창 같은 느낌이라 그런가. 레이가 사실은 높은 곳에 앉아 있다는 걸 계속 까먹는다.
“덕분에 더 쉬워지겠어. 고마워.”
“별말씀을요. 황자님께 도움이 된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레이는 나를 향해 다정하게 웃어 줬다.
생각해 보면 난 인복이 참 좋은 것 같다. 세네카에선 마린을 만났고, 프레오나에 와서는 젠, 한나, 레이, 노반, 그리고 크로스반 남매와 바르카까지 소중한 인연들을 만났다.
아, 철수도 있었지.
이제는 아예 한나의 곁에 앉아 눈을 감고 있는 철수를 바라봤다.
정령도 잠을 자는 건지, 철수는 미동도 없이 눈을 감고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황자님?”
“아, 응.”
멍하니 철수에게 시선을 던지고 있자, 한나가 나를 불렀다.
이제 슬슬 꼰대들에게 엿 먹일 방법을 알려달라는 듯 나를 바라봤다.
“간단해. 소비안 남작에게 한나의 시종을 보내.”
“제 시종을요?”
되묻는 한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권력은 한쪽에 치우쳐져 있는 게 아니다.
말 그대로, 백작위은 헨델에게만 있는 게 아니지.
“조금 더 정확히 하자면, 오디슨 남작이 소비안 남작의 집을 지나칠 때, 한나의 시종이 그 근처에 있는 것만 보여 주면 돼.”
“그게 무슨….”
한나는 아직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착각을 하게 만들자는 거군요?”
바네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녀의 동그랗게 뜬 눈이 노반을 떠오르게 했다.
노반도 궁금한 걸 물어볼 때 눈이 동그래지는데.
“이간질을 하자는 말이셨습니까?”
바네사의 말을 들은 한나는 깜짝 놀라 반문했다.
이간질… 이렇게 들으니 조금 더러운 짓을 하는 것 같다. 물론 더러운 짓이 맞기는 하지.
그치만 먼저 한나를 건드렸으니 이건 정당방위다.
“맞아.”
나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한나는 굉장히 진지해진 표정으로 그건 어려울 거라며 고개를 저었다.
“아마 소용 없는 짓일 겁니다. 그들은 제가 아무 권력도 없을 거라 생각하니까요.”
그럴 리가.
“그들이 글도 모르는 바보도 아니고, 네가 이름만 백작이 아닌 건 다 알고 있을 거야. 그냥 널 무시하면서 고립시키려 하는 거지.”
실제로는 한나만큼 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는 가문도 드물다.
우선 한나는 귀족들 중에서도 꽤 상위권인 백작이고, 한나가 이끄는 이프리트 가문도 큰 흠이 없는 부유한 가문이다.
아, 물론 젠이 황족 시해죄를 저질렀다는 오점이 있지만… 그건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질 죄다.
“확실히 한나가 그들을 향해 강하게 대응한 적은 없죠.”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 말에 동조해 줬다.
회의실 안에서 소리를 키우긴 하지만, 실제로는 고함을 지르는 것만큼 강하게 대응하진 않았다고 한다.
한마디로 바람직한 학생회장 느낌이랄까.
그들이 보기에 한나는 치와와 같은 거다. 시끄럽지만 위협적이지 않은 존재.
“레이도 대외적으로 한나를 도와주는 편은 아니잖아?”
공작 가문인 레이가 한나에게 힘을 실어 줬다면, 한나가 그 꼰대들에게 한소리 듣고 있을 리가 없지.
레이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직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그렇죠. 저희 가문은 중립을 지키는 가문이니까요.”
“그러니 한나의 입지가 약할 수밖에.”
젠의 탓을 하고 싶진 않지만, 사실 정치 쪽에서 한나의 입지가 약하고, 백작인데도 다른 귀족들보다 불리한 건 젠의 탓이 조금 있을 거다.
황족 시해죄도 그렇고, 전대 이프리트 백작인 젠이 정치에 신경을 쓰지 않는 바람에 한나가 젠을 대신해서 정치를 했던 시절이 있다. 그 때문에 몇몇 귀족들은 지금의 한나가 아직도 ‘젠의 대리인’이라 생각하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불합리하지만 남성들만 있는 곳에 여성 혼자 있는 것도 이유라면 이유겠지.
“그것은… 섣불리 행동하면 더 눈엣가시로 보일 테니 자제했습니다. 저로 인해 저희 가문의 명예가 실추되면 가문을 위해 힘써 주셨던 제 아버님을 뵐 낯이 없습니다.”
한나는 고개를 떨구며 말했다.
안쓰러운 한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젠은 한나에게 완벽하게 좋은 오빠는 아니었던 것 같다. 저렇게 예쁘고 착한 동생을 힘들게 하다니.
물론 내가 한나의 오빠였어도 잘해 줬을지는 모르겠지만….
“한나, 명예는 주머니에서 나오는 거야. 가진 게 많아야 올라가는 법이지.”
너무 현실적인 말이었나…?
품격 있는 귀족들의 티타임 시간에는 잘 나오지 않는 너무 날것의 대사였다.
그럼 뭐 어때, 쟤들도 성인인데 알 건 알아야지.
“넌 가진 게 많아. 하지만 가진 게 많아도, 가진 걸 쓸 줄 모르면 아무것도 하지 못할 거야.”
내 이야기를 들은 한나는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재물…이라면 확실히 많지만, 그것만으론 여론을 잡지 못할 겁니다.”
아, 인정했다. 재물이 많다니 그것 참 부러운 이야기네.
“돈을 쓰라는 게 아니야. 물론 돈을 쓰면 더 좋지만, 내 말은 사람을 쓰라는 거지.”
“사람이요?”
한나는 의미를 모르겠는지 조심스러운 어조로 내게 반문했다.
이걸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부끄러운데….
“너한텐 젠이 있잖아. 나도 있고.”
“아….”
한나는 전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렇지. 한나 입장에서는 나나 젠이나 굉장히 쓸모없는 패로 보일 거다.
“그리고 오스먼드 폐하께 받아야 할 빚이 있지 않아?”
“제가 폐하께요?”
“나 찾는 거 도와줬다며. 그게 빚을 청산한 거지.”
그제야 한나는 젠과 도브로미르보다 조금 더 쓸모 있는 패를 찾은 듯 놀라 했다.
조금 서운하네.
“아무튼, 폐하께 공식적인 석상에서 상을 달라고 부탁해 봐. 그럼 귀족들도 신기해하겠지.”
“그 부탁은 폐하께서 거절하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공개적인 편애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까요.”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바네사가 물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지만.
걘 거절 안 한다.
내 추측일 뿐이지만, 오스먼드도 대놓고 한나를 밀어 주고 싶어 할 거다.
현재 오스먼드가 제일 고민하고 있는 게 권력의 추가 한쪽으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이니까.
“내가 잘 말해 볼게. 아마 원하는 대로 해 주실 거야.”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혹시라도 거절하신다면.”
“괜찮을 거야. 폐하께서 내게 빚지신 것도 많으니까. 혹시라도 안 된다 그러시면 내가 해결해 줄게.”
그제야 나를 보는 한나의 눈이 바뀌었다.
그래, 이거지. 난 마냥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라고.
사실 따지자면 곁에 두어서 도움이 되는 인간은 아니고, 적으로 두어선 안 되는 인간일 뿐이다.
내가 한나의 사람은 아니지만, 지금은 한나의 적을 처리해 주는 거니까 한나는 나를 든든하게 여길 것이다.
“그러니까 그건 걱정하지 말고, 후에 있을 상황에 집중하자.”
한나의 걱정을 줄여 주자, 레이와 바네사도 훨씬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누가 친구 아니랄까 봐.
“폐하께서 상을 내린 다음부터는 입을 다물고 있어. 뭔가 대단한 걸 받았다는 듯 허풍을 떠는 거지.”
“그다음 이간질을 시키면 되는 건가요?”
“맞아. 뱀 같은 소비안보다 조금 더 멍청한 오디슨 남작을 부추겨야 해. 멍청한 놈이 공든 탑을 무너트리는 법이거든.”
백이면 백, 우리가 이야기하고 있는 지금도 소비안과 오디슨 둘 사이에 신경전이 펼쳐지고 있을 거다.
자리는 하나고 사람은 둘이니까.
각자 새로운 자작은 자신이 될 거라고 확신하고 있겠지만, ‘혹시’라는 경우의 수에 불안을 느낄 거다.
“욕심이 많은 오디슨은 뱀 같은 소비안을 경계할 거야. 소비안의 속이 구린 건 같이 있는 사람이 더 잘 알겠지.”
나는 훤히 보이는 적진의 상황에 살짝 미소를 지었고, 내 웃음을 본 레이가 진지한 얼굴로 뒷말을 이었다.
“오디슨 남작이 소비안 남작을 의심할 때, 소비안 남작의 집에 한나의 시종을 풀어 두라는 것이죠?”
“그렇지. 오디슨의 눈에 소비안이 헨델과 이프리트 양쪽에 아첨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야.”
“굉장히 좋은 작전인 것 같습니다.”
욕심은 화를 부르고 눈을 가린다.
오디슨은 소비안을 의심할 테지. ‘저 뱀 같은 자식이 양쪽으로 발을 놓았다.’라고. 그때라면 오스먼드의 힘으로 한나의 위치가 올라갔을 테니 충분히 의심할 수 있다.
혹시라도 오디슨이 소비안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 물어본다 해도, 소비안은 모르는 일이니 대답해 줄 수가 없을 거다.
그럼 오디슨은 소비안을 더욱 경계하겠지. 물론 소비안도 오디슨을 경계할 것이고.
“우리는 그들이 자연스레 분열되기를 기다리면 돼. 아, 일이 잘 풀리면 둘 중 하나가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힘이 되어 달라고 하면서.”
“어림없습니다.”
한나는 단호박도 울고 갈 정도로 단호하게 거절했다.
그렇지. 퇴물인 꼰대들은 받아 주는 게 아니다. 정말 바른 정신을 가진 멋지게 늙은 귀족들도 많은데, 힘 낭비 하는 것도 아니고 왜 꼰대를 받아 줘.
“혹시 모르니 괜찮은 인재를 섭외해 놓는 건 어때? 새로운 자작 후보가 필요할지도 모르잖아.”
적들의 분열 엔딩도 좋지만, 역시 자멸 엔딩이 최고지. 그들이 아예 가라앉거나 사라진다면 헨델 백작의 세력은 약해질 것이다. 그때 한나에게 힘이 되어 줄 새로운 세력이 나타나 주면 딱이지.
내 생각을 읽은 한나는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황자님 덕분에 한결 편해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니야, 한나가 잘되면 나도 좋지.”
이건 한나에게 좋은 일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오스먼드에게도 좋은 일이다.
그러니 나는 오스먼드와 딜을 할 예정이다.
이게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그런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