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17)
“폐하께서 최근 걱정하시던 일을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따라 더욱 담담해 보이는 오스먼드의 눈빛이 내게 닿았다. 하지만 마지막 숨이 거친 걸로 보아 속으로 한숨을 삼킨 것 같다.
“내가 걱정하던 일?”
“예, 최근 정치의 축이 기울어지고 있다고 걱정하지 않으셨습니까?”
오스먼드는 한쪽 눈썹을 들어올리곤 ‘얘는 또 뭘 하고 다닌 거야.’라는 눈빛을 보였다.
기뻐하라고. 네가 좋아할 만한 소식이니까.
“이미 들으셨겠지만, 전날 낮에 이프리트 백작저에 갔습니다.”
“그래서.”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헨델 백작의 세력을 어느 정도 약화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나는 오스먼드를 향해 어제 한나와 나누었던 계획의 일부를 말해 줬다.
내 이야기를 들은 오스먼드는 흥미를 보이면서도 조금 언짢은 기색을 비쳤다.
“그대가 정치에 관심이 있을 줄은 몰랐군.”
“관심 없습니다. 그저 이프리트 백작이 조금이라도 편해졌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왜, 백작에게 죄책감이라도 드는 것인가?”
“비슷합니다.”
오스먼드는 나를 비웃는 듯 비꼬았다.
오지 말 걸 그랬나, 하루의 아침은 상쾌하게 시작하고 싶은데 오스먼드가 다 망쳐 버리네.
“제 계획에 따라 주실 겁니까?”
얼른 동의를 얻고 돌아가고 싶다.
“상이야 줄 수 있지.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그치만 실패하면?”
“실패해도 괜찮습니다. 실질적으로 폐하께서 이프리트 백작에게 상을 주신다는 것 자체가 힘을 실어 주겠다는 이야기니, 이프리트 백작의 세가 조금 더 커질 겁니다.”
내 말이 끝나자, 오스먼드는 실소를 지었다.
내가 우스워?
“요지는 헨델의 세력을 많이 낮추거나, 적게 낮춘다는 이야기군.”
“그렇죠.”
“좋네. 이프리트 백작이라면 믿어서 손해 보진 않겠지.”
오스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하던 일에 집중했다.
쟤 쉬는 날은 있나? 전에도 생각했던 거지만, 만일 오스먼드가 죽는다면 사인은 과로사일 것 같다.
황제가 결코 좋은 것만은 아니네.
“더 할 말이 있나?”
오스먼드는 아직 밖으로 나가지 않은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나는 담담한 오스먼드를 바라보며 잠깐 고민했다. 이걸 물어봐도 되는 걸까? 모르면 죽는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궁금은 하니까.
“이건 단순한 제 궁금증입니다만, 새로운 자작으로 생각해 둔 자가 있으십니까?”
“없어.”
아주 단호하게 말했다. 마음에 드는 사람이 없다는 듯이. 그러고는 무언가가 떠오른 듯 장난스레 말했다.
“원한다면 그대를 앉혀 줄 수도 있어. 프레오나 명예 귀족, 어떤가.”
절대 사양이다.
내가 끔찍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자, 오스먼드가 하하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장난이 심하다.
“소비안과 오디슨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
오스먼드는 입꼬리를 짧게 올리며 말했다.
쟤도 다 생각이 있구나.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새로운 자작이 시급했던 것 같은데, 이렇게 늦어져도 괜찮습니까?”
“그리 급하지도 않아. 사실 아예 없어도 상관없지. 하지만 이렇게 경쟁심을 부추기면 성과가 나올 테니. 황실의 입장에선 좋은 것 아닌가.”
한마디로 허풍이라는 뜻이었다.
새로운 자작이 열렬하게 필요한 것도 아니고, 차기 자작으로 오디슨과 소비안을 생각하고 있지도 않는단다.
“후폭풍은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그걸 내가 왜 감당해야 하지? 뽑는 건 내 마음이고, 뽑히지 못했다고 투털거린다면 프레오나엔 필요 없는 귀족이겠군.”
오스먼드의 말은 꽤나 냉정했다.
내가 신경 쓸 바가 아니지만, 저러다가 칼 맞는 거 아닐까 몰라.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바쁜 일이라도 있는가?”
“항상 바쁩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
오스먼드는 나를 향해 ‘네가 뭐 하는게 있냐’는 어투로 말했다. 맞는 말이지만 이거 은근히 기분 나쁘네.
쟤는 가만히 있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르나 보다.
“바쁘지 않더라도 이곳에 있기는 싫습니다. 서류에 파묻히는 기분이 썩 좋지 않습니다.”
“아쉽군, 그대에게 시킬 일이 하나 있었는데.”
오스먼드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아쉽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그냥 예의상 하는 말인 듯했다.
“사양하겠습니다.”
“그래.”
짧게 고개를 숙이고 나가려던 그때, 오스먼드는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다시 입을 열었다.
“곧 그대가 아끼던 여우와 시종이 도착하겠군.”
아.
“변명은 생각해 뒀나?”
그럴 리가. 그냥 죽도록 혼나는 거지.
마린과 노반이 엄청나게 보고 싶으면서도 보고 싶지 않다.
노반이 울면 마음 아파지는데… 마린도 어떻게 나올지 너무 무섭고.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내일 멀쩡한 모습으로 봤으면 좋겠군. 그대 시종의 눈빛이 프레오나를 잡아 죽일 듯했으니 뭐 하나는 부술 것 같아서 말이지.”
오스먼드는 무섭게 질린 내 표정을 보면서 ‘그녀의 눈빛에 나조차도 소름이 돋았지.’라며 뒷말을 잇고는, 다시 서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마린 엄청 화났구나. 황제가 눈치챌 정도로 감정 컨트롤이 불가능했던 건가….
진짜 좆됐다.
* * *
“괜찮으십니까?”
“어? 어어… 난 괜찮네.”
원체 말이 없던 보리언이 내게 괜찮냐고 물었다.
항상 필요한 말 빼고는 입을 다물던 사람이 물어볼 정도라면, 내 상태가 상당히 소란스러웠나보다.
나는 지금 마린과 노반이 너무 보고 싶지만, 보고 싶지 않은 딜레마에 빠져 있다.
변명이라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나도 당한거다.’, ‘눈을 깜박였더니 중간계와 정령계가 맞닿은 곳으로 빨려 들어가더라.’, ‘나도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등등 책임을 회피하는 말로는 수천 가지가 있다.
하지만, 노반과 마린을 걱정하게 한 죄가 크다.
이건 죽기 직전까지 혼나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후…”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마린과 노반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릎을 꿇어야 하나. 무릎 꿇는 걸 좋아하지도 않을 것 같은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내가 건강하다는 걸 보여 주는 거다. 그러려면 살이라도 포동포동 올라야 하는데, 짧은 시간에 몸을 그렇게 만들기도 힘들고, 밥 먹기도 귀찮다.
게다가 철수가 내 옆에 있어야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해 줄 텐데, 철수는 한나한테 가 버렸다. 한나가 엄청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에게 딱 붙어 얼굴을 비추지 않았다.
아마 돌아오지 않을 생각인 것 같다.
“도착한 것 같습니다.”
“….”
보리언은 창문 밖을 살폈고, 마린과 노반이 타고 있을 마차가 도착한 것을 알렸다.
심장이 대차게 뛰었다.
자는 척을 해야 하나? 그럼 안 깨우고 넘어가지 않을까? 아니야,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잖아.
심호흡을 하고, 마린과 노반의 마중을 위해 밖으로 나가려 할 때, 방문이 활짝 열리고 나를 향해 작은 생명체가 뛰어들었다.
“낑!”
“노반!”
보리언은 노반이 들어올 걸 알고 있었는지 몸을 살짝 비틀어 노반의 길을 만들어 줬다.
폭신한 생명체가 품 안으로 들어오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컁! 캬앙!”
노반은 내 어깨를 마구 끌어안으며 낑낑거렸다. 지금이 여름이라면, 옷이 얇은 탓에 발톱에 긁혀 상처가 났을 거다.
나는 진정하지 못하고 나를 끌어안는 노반의 등을 천천히 쓸어 주며 말했다.
“노반, 미안해. 많이 걱정했지.”
꼭 끌어안아 주며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 천천히 달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은 생명체의 앓는 소리가 가라앉았고, 말랐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황자님…!”
노반이 활짝 열어 두었던 문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마린!”
마린은 계단을 빠르게 올라왔는지 헉헉거렸다. 게다가 옷이 구겨진다며 평소 곧은 자세로 걷던 마린은 치맛단을 잡아 올리고서 뛰어온 것 같았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마린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손으로 얼굴을 가린 뒤 흐느꼈다.
이건 내 계획에 없던 일이다. 마린이 울다니. 그제야 내가 얼마나 큰일을 저질렀는지 와닿았다.
“마, 마린… 울지 마…. 나 멀쩡해.”
“네, 알고 있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마린은 정말 다행이라 말해 주며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에 주저앉았다.
평소라면 마린이 절대 하지 않았을 행동에 깜짝 놀라, 노반을 한 손으로 안고 마린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마린! 괜찮아?”
“네, 네… 괜찮습니다. 황자님을 보니 안도해서…”
마린은 주저앉은 채 얼굴을 무릎에 묻고 훌쩍거렸다.
이걸 어쩌지….
나는 노반을 안은 채 보리언을 바라봤다. 그에 보리언은 고개를 숙이곤 방 밖으로 나가며 문을 닫았다.
나가라는 소리는 아니었는데….
“마린, 의자에 앉을래? 바닥에 주저앉는 거 싫어하잖아.”
마린을 살살 달래며 의자에 앉혔다. 중간에 팔 힘이 딸려서 노반을 떨어트릴 뻔했지만, 노반이 내 어깨를 꽉 잡고 있어서 떨어지지 않았다.
다시는 놓지 않겠다는 의지를 보여 주는 악력이었다.
마린의 흐느낌이 잦아들기를 기다리는 동안 노반과 눈을 마주했다. 그전보다 조금 더 큰 것 같은 느낌인데.
“컁.”
“미안해. 많이 놀랐지?”
“컁.”
노반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높낮이로 계속 ‘컁’만을 말하고 있었다.
인간으로 변해 줬으면 하는데…. 내가 지금 그런 걸 부탁할 처지가 아니다.
가만히 노반을 껴안고 기다리자, 마린도 점차 정신을 차렸다.
“이제 괜찮아? 나랑 이야기할 수 있겠어?”
내 말에 마린은 괜찮아졌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아직 코를 훌쩍이는 마린이 눈치를 살짝 보며, 탁상에 항상 놓여 있는 물병에서 물 한 잔을 따라 마린에게 건넸다.
“마린이 이렇게 울 줄은 몰랐어.”
마린을 향해 조심스레 물어봤다. 그에 마린은 내가 사라졌을 동안에 자신이 생각했던 이야기를 말해 줬다.
“처음 황자님께서 사라지신 날… 한없이 무서웠습니다. 황자님의 기척을 느끼지 못했던 노반은 황궁에서 날뛰었고, 젠 님도 어딘가 부서진 것처럼 미친 듯이 황자님을 찾아다녔으니, 남은 저라도 정신을 차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젠이 토벌에 출정하는 것을 미루고 계속 날 찾았다는 이야기만 들었지, 어떤 상태였는지는 듣지 못했다. 노반도 날뛰었다니….
“아무리 찾아도 황자님께선 보이지 않았습니다. 젠 님께서 황자님은 살아계신다고 하셨고, 기다려 보자는 이야기를 남기시고 토벌을 떠나셨습니다.”
젠이 목걸이를 확인한 것 같다.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했으니 불행 중 다행으로 생각했을지 모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황궁은 이프리트 경께 맡기고, 북쪽 저택으로 돌아갔습니다. 안타깝게도 황자님은 저택에 계시지 않았지만, 살아 계신다 하셨으니 그것만 믿고 기다렸습니다.”
“….”
“그리고 얼마 전, 프레오나 황제의 시종에게 황자님께서 돌아오셨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다렸던 소식었습니다. 하지만 걱정이 됐습니다. 혹시라도 제가 아는 황자님께서 사라지셨을까 봐요.”
마린은 내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지만 불안했다고 한다. 혹시라도 도브로미르 몸 안에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들어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 같다.
따지자면 나부터가 4황자의 몸에 들어온 사람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