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18)
마린은 돌아온 4황자가 자신이 알고 있던 내가 아닐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무서웠다고 했다.
나는 마린의 말을 듣고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마린은 내가 다른 곳에서 온 걸 알고 있으니까, 또 다른 가능성을 두려워한 거다.
실제로도 나는 4황자의 몸을 차지하고 있는 다른 사람이니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약속할게.”
이 몸은 이제 내 것이고, 내가 아닌 다른 놈이 들어도록 그냥 놔두진 않을 거다.
만일 내 몸을 빼앗으려고 시도한다고 해도, 내 영혼이 사라지지 않는 이상 불가능하겠지만.
“컁!”
마린을 안심시키기 위해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민을 하던 중, 노반은 작은 앞발로 내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강하게 때리는 게 아니라 그저 무언가를 알려 주고 싶은 듯 툭툭 치는 느낌이라 아프지 않았다.
표정이나 분위기를 보아하니 화난 것 같진 않고, 배가 고픈 건가?
“배고파?”
“컁!”
“배고프다는 건가?”
노반이 무엇을 원하는지 도저히 모르겠어서 마린을 향해 재차 물었다.
그에 마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아마 배고프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노반이 며칠째 밥 생각은 없다며 굶었거든요.”
“뭐?”
나는 내게 착 달라붙어 있는 노반을 떼어 내 강제적으로 눈을 맞추게 했다. 그러고는 크게 혼을 내듯 말했다.
“노반! 밥을 안 먹으면 어떡해! 살면서 제일 중요한 게 밥인데!”
“캭!”
아, 화났다.
정확히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대충 ‘미르 때문에 못 먹은 거 아니냐’는 뜻 같았다.
내가 생각한 게 맞는지, 마린 역시 그게 황자님이 하실 소리냐며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질타했다.
노반이 밥을 안 먹고 버틴 건, 다 내 잘못이다.
“하지만 밥은 먹고 살아야지. 아무리 슬퍼도 밥은 먹어야 하는 거야. 잠도 잘 자야 하고.”
“컁!”
“나 때문에 슬프다고 밥도 거르고, 잠도 안 자고. 그렇게 몸을 혹사시키면, 저 높은 사람한테 내가 벌 받아.”
노반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었다.
그에 나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보리언이 듣지 못하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노반에게 속삭였다.
“내가 살던 곳에는 염라대왕이라는 아주 무서운 신이 있어. 만약 내가 누군가를 힘들게 하거나 아프게 하면 염라 대왕이 이놈! 하면서 날 혼낼 거야.”
“컁….”
“거짓말 아니야. 염라대왕은 엄청 무서워서 나쁜 사람한테 벌을 줄 때, 뜨거운 지옥불에 담가 버려. 노반은 내가 지옥불에서 힘들어했으면 좋겠어?”
아예 협박을 시전했다. 네가 힘들면 나중에 내가 더 힘들어지니 행복하게 살아라! 같은 협박.
노반은 조금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그 틈을 노려 쐐기를 박았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겨서 노반의 앞에서 사라지게 돼도, 노반은 건강하게 살아 줬으면 좋겠어. 너무 많이 슬퍼하지도 말고 적당히만 슬퍼하고. 그래야 내 마음이 편하지. 이건 마린도 마찬가지야.”
인생은 어떻게 될지 아무도 모른다.
내가 사람한테 뒤질 수도 있는 거고, 악마한테 뒤질 수도 있는 거고, 건강하게 살다가 갑자기 뒤질 수도 있는 거다.
나는 내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이 크게 슬퍼하지 않았으면 한다.
딱 적당한 슬픔을 겪고 다시 평화롭고 행복한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그런 말은 비겁하십니다….”
마린은 고개를 떨구며 내가 비겁하다고 말했다.
맞다, 슬퍼하는 것도 저들의 몫이고, 내가 저들의 감정을 강제할 수는 없다.
하지만.
“비겁해도 어쩔 수 없어. 난 너희들이 행복하게 살았으면 하는걸.”
이렇게 듣고 보면 유언 같기는 하지만, 약속하건대 난 절대 단명하지 않을 거다. 100살까지 건강하게 아주 오래오래 살 거다.
“그리고 걱정하지 마. 나 명줄 엄청 질겨.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어.”
다시 살아날 방법은 분명히 있다.
만약 내가 억울하게 생을 마감했다면, 악마의 손을 빌리든, 정령의 손을 빌리든, 누군가의 손을 빌려서라도 살아날 거다.
“그러니까 너무 슬퍼하지 말고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면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
노반의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축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데, 내가 사라져도 행복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내키지 않는 것 같았다.
“음… 마음에 안 들어? 그럼 예를 들어 말해 볼까?”
“컁.”
노반은 작은 앞발로 내 어깨를 통통 쳤다. 어떤 비유를 해도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뜻을 표현하는 것 같다.
나는 마린의 맞은편에 있는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노반의 앞발을 두 손으로 잡고 말했다.
“노반이 나처럼 사라졌다고 생각해 보자.”
“컁!”
“알아, 그럴 일 없다는 거. 이건 그냥 예를 들어서 하는 말이야.”
그에 고개를 끄덕인 노반은 내게 잡힌 앞발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내가 노반을 이제 더는 만나지 못해서 밥도 거르고, 잠도 안 자고, 내일 죽을 것 같은 사람처럼 산다면 노반의 마음이 어때?”
“키잉….”
“별로지? 나도 똑같아. 내가 사라졌다고 노반은 노반의 인생을, 마린은 마린의 인생을 낭비하고 살면 내가 얼마나 슬프겠어.”
노반은 슬픈 눈망울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반에 이어 내 앞에 앉아 있는 마린을 바라봤고, 나와 눈이 마주친 마린도 작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말에 공감하고 인정해 주는 건 아니고, 그냥 내 고집에 져 준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것 같다.
그거면 됐다.
“나도 똑같아. 내가 사라져도 너희들은 많이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참 비겁하다.
나는 적당히 슬퍼하지 못할 걸 알면서, 남에게는 적당히 슬퍼하라며 강요 아닌 강요를 한다.
“그래 줄 수 있지?”
지금 이 심정에 이름을 붙인다면 가족애(家族愛)가 아닐까 한다.
* * *
황제궁의 시종이 손수 내 방까지 식사를 가져다줬지만 나는 단호하게 물렸다. 그리고 다 같이 식사하기 위해 귀빈을 모시는 식당으로 갔다. 오스먼드가 주로 이용하는 메인 식당은 아니지만, 이곳도 공간이 넓었다. 비정상적으로 넓은 테이블이 있는 메인 식당보다는 이곳이 덜 부담스러웠다.
그 식당으로 가기 위해선 1층까지 계단으로 내려가고, 오른쪽으로 꺾어 쭉 걷고, 뒤편으로 넘어가 또 걸어야 한다.
우리가 머물고 있는 황제궁은 뒤지게도 넓다.
마음 같아서는 익숙한 로테 별궁으로 가고 싶은데 아직 조사 중이라 진입이 불가능하다고 거절당했다.
그놈의 조사 백날 해 봐야 아무것도 안 나올 거다.
“세네카의 4황자님을 뵙습니다.”
식당으로 들어가자, 나를 기다리고 있던 주방장이 인사를 올렸다.
주방장에게 4명의 몫으로 식사를 준비해 달라 이르자, 그는 고개를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4명이요?”
마린이 물었다. 나, 노반 그리고 마린까지 세 명인데 어째서 네 명이냐고.
그에 나는 당연하다는 듯 이야기했다.
“보리언도 먹어야지.”
오스먼드의 명령으로 항상 나를 따라다니는 보리언은 이때까지 별일 없다면 점심에는 나와 함께 식사를 했다.
아무것도 안 먹은 채 나를 지켜보는 게 거슬리기도 했고, 아예 신경을 끄면 되는데 항상 내 시선 안에 들어와 있어서 신경이 쓰였다.
함께 먹자는 내 말에 멀리 서 있던 보리언은 거절 의사를 표명했다.
“전 괜찮습니다. 황자님을 지켜보실 분도 오셨으니 제 역할은 여기까지입니다.”
“이미 주방장에게 4명의 몫을 준비해 달라 했으니, 식사만 하고 가는 게 어떤가.”
그에 보리언은 잠시 고민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지금 이 식사를 끝으로 보리언이 다시 오스먼드의 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상쾌했다.
보리언이 이것저것 잔소리를 하거나, 말을 걸어 나를 불편하게 했던 건 아니었지만 감시당하는 기분이라는 게 썩 좋지는 않았다.
식당의 시종에게 자리를 안내받고, 노반을 내 무릎 위에 앉혔다.
평소 같았으면 내 바로 근처에 자리를 잡았겠지만, 오늘의 노반은 내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노반, 황자님이 불편하실 거예요. 내려오세요.”
“컁!”
마린이 노반에게 주의를 줬지만, 노반은 내 무릎 위에서 내려가지 않았다.
이게 바로 분리 불안이라는 건가? 내가 자격 없는 보호자라는 걸 다시 한번 느꼈다.
“괜찮아, 마린.”
내 무릎 위에 고고하게 앉은 노반을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막 떼어 놓으려고 하면 반발이 심해질 수도 있다. 오늘은 딱 붙어 있고, 내일 천천히 떼어 놔야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아까 내게 인사했던 주방장이 금색으로 치장된 카트를 밀며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카트 위에는 두 종류의 음식이 있었다.
구름처럼 폭신해 보이는 하얀 거품으로 덮여 있는 수프 그릇 하나와, 노릇노릇하게 구운 고기를 말은 듯, 스프링롤이 생각나는 원통 고기가 담겨 있었다.
주방장은 수프의 모양이 무너지지 않게 조심스레 내려놨다.
“헛…!”
주방장은 내 무릎 위에 앉아 있는 여우를 보고 놀랐다. 그리고 내게 여우의 음식을 따로 준비하겠다며 한 명분의 음식을 다시 카트 위로 올려놓으려 했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아. 사람의 음식도 잘 먹는 여우라 신경 쓸 것 없네.”
따로 준비하지 않아도 된다는 내 말에, 주방장은 카트 위로 올려놓았던 음식을 다시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빼앗길 뻔한 제 몫의 식사가 다시 돌아오자, 노반은 컁! 하고 귀엽게 소리쳤다.
“필요하신 게 있으시다면 바로 불러 주십시오.”
“그래, 고맙네.”
주방장은 고개를 숙이며 밖으로 나갔고, 나는 오목하게 파인 스푼을 들어 수프의 거품을 헤집었다.
헤집어진 거품이 수프의 안으로 스르르 녹아 들었고 뽀얗고 노란 수프의 색이 보였다.
뽀얀 수프를 한 숟갈 떠서 입 안에 넣자, 고소하고 담백한 맛이 맴돌았다.
“소금….”
한마디로 조금 싱거운 달걀 수프의 맛이었다.
처음에 쌓여 있던 흰 거품이 머랭 같은 것이었는지, 이 수프에선 다른 식재료의 맛은 나지 않고, 달걀의 맛밖에 나지 않았지만 나쁘지 않았다.
마린에게 건네받은 소금이 조금 더 맛있는 달걀 수프의 맛을 낼 거다.
“황자님, 너무 짜게 드시지 마세요.”
“응. 조금 싱거워서.”
밍밍한 수프에 소금을 다섯 번 뿌렸다. 그에 마린이 짜게 먹지 말라며 눈치를 주긴 했지만, 이 정도는 해 줘야 간이 맞을 거다.
소금으로 완성된 달걀 수프를 몇 번 떠먹고, 메인 요리인 고기말이로 시선을 돌렸다.
나이프를 들어 노릇하게 구위진 고기말이를 반으로 가르자, 통으로 된 치즈가 늘어져 나왔다. 고기와 치즈라니, 절대 실패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적당한 크키로 잘린 고기말이를 그 옆에 곁들여진 검붉은 소스에 찍었다.
“음….”
검붉은 소스와 고기의 풍미가 가장 먼저 느껴졌다. 무슨 소스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아는 맛과 비교하자면 레드와인 소스와 비슷한 것 같다. 새콤하면서 무거운 소스가 얇은 고기의 맛을 확 잡아 줬다.
얇은 고기에는 무언가로 절였는지 은근한 단맛이 느껴졌고, 단맛을 느끼려는 찰나, 그 안에서 터져 나온 치즈의 짭잘함이 느껴졌다.
치즈에 뭘 넣은 건지 아삭한 무언가가 씹혔는데, 나쁘지 않았다. 양파인가?
“컁!”
내 무릎 위에 앉아 순서를 기다리고 있는 노반에게 고기말이 하나를 크게 떠서 먹여 주자, 그동안 굶었다는 말이 사실었는지 노반은 허겁지겁 먹었다.
뭐가 들어갔는지 확실히 모르겠는 조금 애매한 맛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맛있는 음식이었다.
적당히 만족스런 나쁘지 않은 식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