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20)
마차는 다시 황제궁으로 이동했다.
황제궁에 도착하자, 먼저 내린 레이가 에스코트를 해 줬다. 덕분에 안전하게 땅을 밝고 숨을 크게 내쉬었다.
“여기 있어. 나만 다녀올게.”
“네, 무리하지 마시고 천천히 오세요.”
부드럽게 웃어 준 레이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오스먼드는 집무실에서 열심히 서류나 보고 있을 거다. 오스먼드는 별일 없으면 집무실에만 처박혀 있으니 찾아가기는 편하다.
찾아가는 일이 생겼다는 게 빡치지.
조금 빠르게 걸어 오스먼드가 있을 집무실에 다다르자, 나를 발견한 보리언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인사했다.
“4황자님을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보리언. 폐하께서는 안에 계시나?”
“예, 계십니다. 잠시 기다려 주십시오. 황자님께서 오셨다고 이르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집무실 안으로 들어간 보리언이 돌아오길 기다렸다. 보리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왔고, 내게 잠시 기다려 달라는 말을 남겼다.
기다려…?
국정 일로 엄청 바쁠 때에도 그냥 들어오게 해 줬었는데, 이젠 기다리라고?
기다리라고 하니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멍하니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내 참을성은 10분 이상을 가지 못했다.
“들어가겠습니다 페하.”
‘나는 지금 엄청 짜증이 나 있다’를 강조하기 위해 노크를 아주 강하게 세 번을 한 뒤,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지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면 들어가지 못했겠지만, 문을 지키는 시종도 보이지 않았고, 보리언도 저 멀리에 떨어져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저번부터 보리언이 암묵적으로 나를 봐준다는 느낌이 있어서 그런지 망설이지 않았다.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잠깐이면 되는 일 아닙니까. 이제 와서 저를 내치시는 게 아니라….”
오 쉣.
눈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자마자, 번개 같은 속도로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젠장, 젠장…! 기다리라 하면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있는 거였다.
이 뭐 같은 상황을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열심히 고민해 봤지만, 아까 보았던 광경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미친 거 아니야? 침실을 놔두고 왜 집무실에서…!”
긴말은 하지 않겠다.
테이블 위에 걸쳐 앉은 오스먼드는 제 상의를 다 벗은 채, 어느 나체의 인간과 함께 뒤엉켜 있었다.
그 나체의 인간이 여자인지, 남자인지, 사람인지 뭔지는 보지 못했다. 아니, 보고 싶지도 않다.
그래, 오스먼드 너도 사람이었구나. 항상 일만 하다 미쳐 버린 줄 알았는데, 그래도 그 바쁜 시간에 할 거는 다하고 살았구나.
그리고 조금 배신감이 들었다. 오스먼드가 일만 하다 죽을까 봐 아주 조금, 개미 발톱만큼 걱정했었는데, 그 걱정이 무색해졌다.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서 가만히 있자, 저 멀리서 대기하고 있던 보리언이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보고 있었으면 말리지 그랬나.”
“너무 빠르게 들어가시기에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거짓말. 평소 보리언이 걷는 속도라면 충분히 말릴 수 있었다. 그리고 안 된다고만 소리쳤어도 이런 불상사는 없었을 거 아니야.
물론 내가 듣지 않았을 테지만.
“하아….”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 대충 보니까 이제 막 시작한 것같 은데… 끝나려면 오래 걸리겠지?
나는 지금 바로 피크닉을 떠나고 싶다. 누구의 정사 생활까지 신경 써 주면서 기다릴 시간이 없다.
게다가 나만 시간을 낭비하는 거면 모를까. 마린, 노반, 레이 그리고 바네사까지, 네 명의 인간과 한 마리의 귀여운 드로이프도 함께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거다.
“조금 실례되는 질문이긴 하나, 빠르게 끝내실 확률이 얼마나 있겠나?”
“오래 걸릴 겁니다.”
젠장할. 오스먼드가 고자였으면 좋았을 텐데.
나는 짝다리를 짚으며 다리를 덜덜 떨었다. 초조해하는 나를 흘깃 쳐다본 보리언이 정사가 치러지고 있을 집무실 문을 살포시 열고는 그 안으로 들어갔다.
보리언의 모습을 보고 ‘아무리 신임을 얻고 있는 개인 비서라지만 저래도 돼?’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결론이 나올 때, 집무실의 문이 열리고, 무덤덤한 표정의 보리언이 돌돌 말린 종이 한 장을 가지고 나왔다.
“여기 있습니다.”
건네받은 종이를 열자, 세네카의 4황자가 나가는 것을 허락한다는 내용과 함께 오스먼드의 국새가 찍혀 있었다.
“고맙네….”
보리언에게 고맙다는 마음이 드는 한편 조금 민망했다.
내 감사 인사에 보리언은 별것 아니라는 듯 짧게 고개를 숙이고 다시금 오스먼드의 집무실 앞을 지켰다.
보리언이 나 대신 서명지를 받아 온 덕분에 오스먼드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었다.
한동안 오스먼드의 집무실 쪽으론 발도 들이지 않을 것 같다. 불러도 거절해야지.
한 손엔 서명지를, 한 손엔 아직까지 벌벌 떨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레이와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레이!”
“황자님, 빨리 오셨네요!”
“응, 어쩌다 보니… 폐하께서 바쁘신지 이야기 나눌 시간도 없이 빠르게 주시더라.”
아주 바빴지.
“폐하껜 죄송하지만 저희에겐 기쁜 소식이군요.”
레이는 다시 한번 내 손을 잡고 마차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에스코트 해 줬다.
마차 안에 들어가자 보이는 광경은 귀여운 노반이 내가 앉을 자리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모습이었다. 코롱코롱 작게 코를 고는 소리와, 긴 속눈썹이 말려 올라간 감긴 눈이 너무 귀여웠다.
“언제부터 잤어?”
“얼마 안 됐어요. 황자님을 기다리는 도중에 잠이 든 것 같아요.”
바네사에 말에 작게 미소가 지어졌다.
나는 잠든 노반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안아 올려 내 무릎 위에 올려놨다.
다행스럽게 무게는 가벼웠다.
“그럼 출발하겠습니다.”
레이까지 마차 안으로 들어와 자리를 잡은 뒤, 마차는 다시 출발했다.
보리언이 가져다준 서명지 덕에 멍청한 문지기가 지키고 있던 성문을 지나치고, 시끌벅적한 광장과 상점가를 지나 아무도 발을 들이지 않을 것 같은 어두운 숲으로 빠졌다.
목적지에 가까워지는 걸 보고 있자니, 젠과 함께 갔었던 그때가 떠올랐다.
그날은 가넷이 아닌 펄을 타고 성문을 나갔었다. 백마인 펄은 사람들의 눈에 띄었지만, 아무도 깨어 있지 않는 달빛만이 환한 밤이었기 때문에 마음 놓고 펄을 몰고 갔다.
“아…! 그러고 보니 펄은?”
까맣게 잊고 있던 하얀 펄이 생각났다.
내가 사라졌던 한 달 동안 펄은 안전하게 있었나? 혹시 주인이 사라졌다고 누군가 훔쳐 가서는 경매에 올리고 그러진 않았겠지?
펄은 어디 있냐는 내 물음에 그동안 내 옆에서 조용히 책을 읽고 있던 마린이 말했다.
“먹보라면 크로스반 영주성에 있습니다.”
응…? 우리 집도 아니고 크로스반 영주성?
아니, 그리고 먹보라니? 마린이 펄의 개명 전 이름인 먹보를 알고 있다니.
“황자님께서 사라지시고, 저와 노반이 황궁을 떠날 때 함께 갔었습니다. 먹보라는 이름은 젠 님께 들었습니다. 황궁에 먹보를 혼자 두지 말라고 하셨어요. 좋은 품종이라 탐내는 사람이 많다면서요.”
“아….”
“저희가 다시 황궁으로 올 때엔 데리고 오기가 어려워서 크로스반 영주성에 맡긴 겁니다. 관리는 확실하게 잘해 줄 테니까요. 그런데 이상하게 캐릿으로 회유를 해도 말을 안 듣더라구요.”
그거야 먹보라고 부르니까…. 펄은 먹보라는 이름을 정말 싫어하니 좋아하는 당근을 줘도 꼼짝하지 않았을 거다.
“사실 그 아이의 이름은 먹보가 아니라 펄이야. 먹보라는 이름을 제일 싫어하고….”
마린은 잠시 굳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젠이 잘못했네. 왜 펄의 이름을 먹보로 알려 줘선….
어쨌든 펄의 소식을 알게 됐으니 다시 마음 편히 창밖을 바라봤다.
그때도 젠이 습관적으로 펄을 먹보라고 부르는 바람에 펄이 화를 냈었다.
딱 우리가 지금 달리고 있는 어두운 숲을 지나갈 때였다.
열심히 달리는 와중, ‘먹보’라는 이름으로 불린 것에 화가 단단히 난 펄은 선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았고, 나와 젠은 이 어두운 숲 중앙에 애처롭게 서 있어야만 했다.
먹보를 달래 보겠다고 잘 얼렀지만, 먹보의 화는 풀리지 않았고, 나와 젠은 하는 수 없이 펄의 화가 풀릴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어야 했다.
기다리는 동안 젠과 손도 잡았고(숲속이 어두워서 무섭고, 말에서 떨어질까 봐), 껴안기도 했고(밤바람이 춥고, 떨어질까 봐), 두근두근한 분위기로 진한 뽀뽀의 타이밍도 있었다. 하지만 가뭄에 콩 나듯 찾아오는 뽀뽀의 시간은 실패하고 말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화가 거의 풀린 펄이 딱 그때 출발을 하더라.
“거의 다 도착했습니다.”
거의 도착했다는 레이의 말에, 곤히 잠들어 있는 노반을 깨웠다.
아직 비몽사몽한 노반을 강제로 무릎 위에 앉혀 창밖을 바라보게 했다.
여기가 하이라이트니까.
“와아!”
한 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두운 숲을 나오면 환한 빛이 퍼져 나왔고,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속이 확 트일 정도로 장대한 호수가 펼쳐졌다.
수많은 나무가 호수를 둘러쌌다. 잎사귀가 다 떨어진 나뭇가지마다 하얀 겨울 눈꽃이 피었고, 군데군데 붉게 핀 동백꽃도 있었다.
호수의 표면은 추운 겨울이라 그런지 꽁꽁 얼어 있었고, 군데군데 눈이 쌓여 있었다.
“저쪽으로 가면 가제보가 나올 겁니다.”
레이의 말에 따라 마차는 어느 가제보 앞에 멈춰 섰다. 호수에서는 유일한 건축물이었다. 하얀 이곳과 잘 어울리는 푸른 빛이 돌아 아름다웠다.
눈앞에 보이는 가제보는 하얀 천장과, 금 하나 가지 않은 깨끗한 유리로 둘러져 있었다. 특별한 디자인이 없는, 어디나 있을 법한 평범한 가제보였다. 하지만 하늘과 호수, 그리고 꽃이 핀 나무의 아름다운 경관을 가제보의 유리가 반사하고 있어, 가제보가 특별하게 느껴졌다.
젠과 함께 왔을 때는 멀리서 보기만 했지 들어가지 않았던 곳이었다.
“발밑을 조심하세요.”
마차의 앞에는 아무도 오지 않아, 발자국 하나 없는 새하얀 눈이 쌓여 있었다.
레이가 가장 먼저 내렸고, 노반은 기다리지 못하고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나는 레이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뛰어내린 노반을 잡으러 갔다.
발을 딛자 손 한 뼘 정도의 높이로 푹 가라앉았다.
“노반! 잠깐 이리 와 봐!”
“컁!”
노반이 인간으로 변하는 모습을 레이와 바네사에게 보여 주고 편하게 놀려고 했는데, 노반은 내 마음도 모르고 ‘나 잡아 봐라!’ 놀이를 시작해 버렸다.
“노반!”
“컁컁!”
신나게 컁컁 짖으며 눈 위를 뛰어다니는 노반이 너무 귀여웠다.
“마린 영상 구슬…!”
“미리 챙겨 놨습니다.”
마린은 센스 있게 아공간 주머니에서 영상 구슬을 꺼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마린에게 건네받은 영상구슬로 신나게 뛰어노는 노반을 찍었다.
“하… 이건 우리 집 대대로 내려질 가보야.”
“하나 더 찍어 놓으세요.”
“그래야겠다.”
영상 구슬 한 개를 더 건네받았다.
이제는 ‘나 잡아 봐라’ 놀이를 그만둔 노반은 본격적으로 예쁜 표정을 지으며, 영상 구슬을 향해 살랑살랑 엉덩이를 흔들며 눈밭을 걸었다.
다음에 세네카에 가면 영상 구슬 사재기할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