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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24화 (124/227)

124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21)

가제보 안에 마련된 벤치에 레이와 바네사를 앉혔다. 그리고 치열했던 ‘나 잡아 봐라.’ 놀이에서 겨우 붙잡은 노반을 그들 앞에 내세웠다.

“심장 잘 붙잡아. 지금부터 세상에서 가장 귀여운 생물을 보게 될 테니까.”

내 눈을 바라보며 눈치를 살피는 노반에게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레이와 바네사는 괜찮아. 나쁜 애들이 아니야.

“싫어?”

“컁!”

노반은 작고 귀여운 소리를 내지르며 발을 박차 내 곁으로 튀어 올랐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 인간으로 모습을 바꾼 채 내 뒤로 숨었다.

“헉!”

노반의 모습을 처음 보는 둘은 엄청 놀랐는지 입을 어버버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인사해. 노반이야.”

나는 아직도 놀라 있는 레이와 바네사를 향해 노반을 다시 한번 소개했고, 노반은 눈을 깜박거리며 레이와 바네사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그들은 내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놀랐는지 침묵이 길어졌다. 나는 내 바짓단을 잡은 노반을 안아 올렸다.

“노반, 레이랑 바네사가 많이 놀랐나 보다.”

“저희가 너무 차분했던 거지, 저것이 보통 사람의 반응입니다.”

아공간 주머니에서 피크닉 소품을 꺼내는 마린이 나긋하게 말했다. 우리가 좀 희한했던 거라고.

하긴… 동물이 사람으로 변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가 없겠지. 프레오나는 마법에 익숙하지도 않았고, 마법에 익숙한 세네카라 해도 사람이 동물로 변하는 일을 쉽게 상상할 수 없을 거다.

“이,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드디어 말할 정신이 생긴 건지, 노반을 빤히 바라본 레이가 조심스레 물었다.

“노반은 노반이야.”

이것 말고는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노반은 노반인걸.

“난 드로이프야.”

노반은 아직도 멍한 표정의 바네사에게 말했다. 드로이프라는 것까지는 말할 생각이 없었는데… 노반이 먼저 말해 준다면야.

“드래곤이랑 비슷해. 인간은 잘 모르는 고대 생물 같은 소중한 존재야.”

내 품 안으로 쏙 들어온 노반을 향해 부드럽게 미소 지어 줬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레이와 바네사가 노반을 받아들이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앞으로 우리는 길 가다가도 마주칠 일 없을 거다.

노반에게 해악을 끼치는 놈들은 다 사라져 버리라지.

“미르….”

조금 긴장하고 있는 듯한 노반을 살살 달래 주었다.

북쪽 저택에서 노반을 처음 봤던 나와 마린, 그리고 젠은 노반의 존재에 대해 큰 의문을 가지지 않았었다. 그리고 크로스반 영주성에서 만난 미네르바와 셀비스 역시 우리와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노반은 자신의 존재를 밝힌 뒤, 침묵이 도는 지금 같은 상황을 아예 처음 겪는 거다.

“괜찮아, 노반.”

우리는 끈기 있게 레이와 바네사가 정신을 차리기를 기다렸고, 제일 먼저 호흡을 가다듬은 바네사가 입을 열었다.

“제 눈으로 똑똑히 보았지만, 착각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믿기 힘든 일인 것 같습니다.”

“이해해.”

나는 조곤조곤 말을 잇는 바네사에게 이해한다며 고개를 끄덕여 줬다.

사실 속으로는 ‘이해하고 말고가 어디 있냐. 눈으로 봤으면 된 거지.’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이런 억지스러운 생각을 내 입 밖으로 꺼내지 않게 해 줬으면 좋겠다.

잠시 뜸을 들인 바네사는 내게 안겨 있는 노반과 눈을 마주치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를 믿어 주셔서 고맙고 감사합니다.”

나와 노반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인 바네사는 부드럽게 웃었다.

나는 그런 바네사를 향해 무슨 말이냐고 되물었다. 바네사는 자신의 두 손을 맞잡으며 말했다.

“황자님께서 저를 믿어 주지 않으셨다면, 저는 이런 중대한 정경을 보지 못했을 겁니다.”

바네사는 나를 잘 알고 있었다.

나는 함께 있으면 마음이 편해지거나 신뢰가 가는 사람이 아니라면 내 속에 담긴 이야기는 물론, 일상 이야기도 잘 하지 않는다.

노반의 일이라면 더더욱 조심해야 하니,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했다.

나와 그리 오래 알고 지낸 사이가 아닌 바네사에게 노반의 일을 말했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그녀를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마음도 분명 있지만, 저는 황자님께서 저를 믿어 주셨다는 사실이 더 기쁩니다.”

살며시 웃음을 짓는 마린에 이어 레이도 입을 열었다.

“네, 맞습니다. 난생처음 겪는 일이라 조금 놀란 것뿐입니다. 게다가 드로이프라면 아주 어린 시절, 고대 서적을 공부할 때 잠깐 봤던 이름이기도 합니다.”

레이도 젠과 같이 고대 서적에서 드로이프라는 존재를 보았다고 말했다.

그래, 드로이프라는 종족은 드래곤에 가려져 존재감이 약해서 그렇지 생뚱맞게 툭 튀어나온 존재가 아니다.

“아! 혹 저희가 이 일을 떠벌린다거나 하는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는 걱정하지 말라며 노반과 나를 안심시켰다. 그리고 내게 안겨 있는 노반에게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저는 몰베인 공작 가문의 주인인 레이가라 합니다.”

“…나는 노반.”

노반은 레이가 내민 손을 잡고 자신의 이름을 말했다. 그러고는 긴장이 풀렸는지 배시시 웃으며 내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이 순간은 영원히 남겨야 해…!’라고 생각했을 때, 내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센스 있는 마린이 이미 영상 구슬을 들고 노반을 찍고 있었다.

오늘은 노반의 첫 ‘인간 귀족 친구’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 * *

“미르! 준비 다했어?”

“응, 다했어. 이대로 가면 돼”

오늘은 한나를 만나러 가자고 약속한 날이다. 마린에게 부탁해 오스먼드의 서명지를 받아왔다.

황궁 밖으로 나가려면 오스먼드의 허락이 필요한 게 너무 불편했다. 하지만 오스먼드의 비서인 보리언이 시종일관 내 곁에 붙어있는 것보다는 이쪽이 더 마음이 편하다.

“가자!”

여우로 변한 노반은 오늘도 빨간 망토를 걸쳤다. 연푸른빛이 도는 하얀 털이 망토와 아주 잘 어울렸다. 나였다면 하얀색을 입혔겠지만, 노반이 마음에 들어 하니 됐다.

작은 머리를 살랑살랑 흔드는 노반을 안아 들고 방을 나섰다. 흥분을 주체할 수 없는지 낑낑 소리를 내는 노반을 보면, 그동안 얼마나 한나와 만나기를 고대했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나도 한나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정치 싸움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궁금하고, 철수랑은 잘 지내고 있는지도 궁금했다.

철수는 내 앞에 코빼기도 안 비추던데 철수의 생존 확인 겸, 철수에게 노반과 마린을 소개해 줄 겸, 이프리트로 간다.

“와인이라도 들고 갈 걸 그랬나?”

“컁?”

“한나가 와인을 좋아할지 모르겠네.”

아공간 주머니를 뒤져 그동안 몰라 꿍쳐 뒀던 오스먼드의 와인을 꺼냈다.

엄밀히 말하면 절도지만 나는 내 몫을 챙긴 거다.

오스먼드가 그동안 내게 정리하라고 명령했던 서류량만 따져 봐도 건물 한 채를 살 만한 임금을 받아야 했다. 와인 몇십 병 정도는 애교지.

“그건….”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와인을 꺼내자, 마린이 깜짝 놀랐다.

“왜 그래?”

“그 병에 붙어 있는 문양은 헬리트라 왕국의 문양입니다.”

“헬리트라…? 처음 들어보는 왕국이네.”

와인의 검붉은 색을 바탕으로 금색의 하프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왕국의 문양치고는 꽤 단순했다.

“이제는 구하기 힘든 포도주입니다. 헬리트라 왕국은 술에 조예가 깊은 소왕국인데, 그 왕국의 대표적인 농장이 8년 전에 불타 버렸습니다. 농장주는 더 이상 술을 생산하지 않는다고 했고, 덕분에 헬리트라산 포도주의 가격이 급등하고, 세네카 제국에서도 구하기 힘들어졌죠.”

“그래…?”

마린의 이야기를 듣고 눈이 번쩍 뜨였다.

이 와인은 희소성이 있다. 술이니까 오래될수록 더 좋은 술일 테고… 묵힐수록 돈이 되는, 한마디로 적금이다.

“헬리트라산 포도주는 전 재산을 내놓아도 구하지 못한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값어치가 있는 술입니다.”

이 소문은 귀족가에서 도는 소문이란다. 돈 깨나 있는 귀족들 사이에서 도는 소문이라면, 그만큼 비싸게 거래가 되고 있다는 건데.

이게 그렇게 돈이 되는 거라고…?

땡잡았다.

“나 이 술 엄청 많아.”

프레오나 황제궁 지하에 있는 술 보관 창고에 이 와인이 쌓여 있길래 몇 병 가져왔다. 손이 가는 대로 집었으니 어림잡아 서른 병 정도는 챙겼을 거다.

대박이네. 보석보다 이게 더 비쌀 것 같은데? 내가 재물운은 좋나 보다.

비록 절도로 얻은 재산이지만, 내 손에 들어온 이상 엄연한 내 재산이다.

그런데… 오스먼드는 내가 이런 귀한 와인을 왕창 가져갔다는 걸 분명 알고 있을 텐데 내게 아무 말도 안 했다고?

조금 무서워졌다.

“오스먼드 거 몰래 뺏어 온 건데, 쪼잔하게 먹는 걸로 뭐라 그러겠어…?”

“아마… 괜찮을 겁니다.”

당사자인 나는 조금 불안한데 마린은 괜찮은가 보다.

“끼융!”

노반은 미간을 찌푸린 나를 향해 해맑게 ‘끼융!’ 하고 울었다.

새로운 울음소리다.

“노반이 지켜 주겠다는 거야?”

“컁!”

“너무 든든하다.”

노반의 양 뺨을 붙잡고 가볍게 비볐다.

귀여워, 진! 짜! 세상에서 제! 일! 귀여워!

노반의 볼을 한참을 비비고 있자, 마차는 이프리트 백작저에 도착했다.

아공간에서 꺼낸 와인 한 병을 들고, 마중 나온 한나의 시종인 세바스찬에게 에스코트를 받으며 조심히 내렸다.

쉽게 구하지 못하는 비싼 와인이지만 한 병 정도는 한나에게 줘도 된다. 한나에게는 아깝지 않다.

“황자님, 오랜만이십니다.”

“안녕, 한나.”

마차 뒤로 한 발자국 물러나 있던 한나는 내가 내리자, 천천히 다가와 정중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에 나는 가지고 있던 와인을 세바스찬에게 넘기고 한나의 인사에 답했다.

철수는 한나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저건 거머리도 아니고 뭐 하는 거야…?

“컁! 크앙!”

그때 노반이 한나를 향해 그르렁거리며 위협하듯 크게 짖었다.

노반이 이렇게 대놓고 적대감을 보인 적은 처음인데.

“노반!”

“뭐야, 이건. 혹시 드로이프야?”

한나의 옆에서 껌딱지처럼 붙어 있던 철수가 노반을 안고 있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크앙!”

이번에는 방금 전보다 더 강하게 짖었다.

철수가 보이지 않는 다른 이프리트 백작저의 시종들은 노반이 한나를 향해 짖고 있다고 생각하며 그녀를 경계했다.

원래 우리 애가 이런 애가 아닌데… 아주 순한 아이예요.

“노반, 일단 진정하고 들어가서 얘기하자. 응?”

“크…! 끼잉….”

노반의 등을 덮고 있는 망토를 꽁꽁 싸매며 부드럽게 달랬다. 그러자 크게 짖으려던 주둥이를 집어넣고 내 품으로 머리를 돌렸다.

“뭐가 빠졌나 했더니 드로이프를 못 봤었네.”

철수는 다시 한나의 곁으로 가며 말했다.

철수가 한나를 만나기 전, 나에게서 잠깐 떨어져서 중간계를 구경한 적이 있었다.

그때 웬만한 종족들은 만나서 안부 인사를 나눴지만, 드로이프만 보지 못했다고 했다.

당연했다. 드로이프가 살았던 마을은 불에 타 사라졌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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