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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25화 (125/227)

125 별궁 지하실에 빠지다 (22)

한나의 안내로 응접실로 들어왔다. 전에 왔던 응접실과는 다른 곳이었다.

이곳은 하얗던 첫 번째 응접실과는 달리, 검붉은 벽지가 사방을 두르고 있었다. 촌스러울 것 같았지만 검은색 가구 덕분인지 생각보다 고풍스러운 느낌을 풍겼다.

“여기는 어디야?”

“지인들만 들어올 수 있는 응접실입니다. 원래 잘 사용하지 않는 곳이나, 열려 있는 응접실에는 손님이 계셔서요.”

한나는 내게 죄송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급한 일이면 가 봐도 돼. 기다리고 있을게.”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니 황자님께서 신경 써 주실 필요 없습니다.”

아직 정치 싸움 중이구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니, 한창 꿀잼일 때 온 것 같다.

역시 나는 운이 좋아.

“재밌겠다.”

“솔직히 조금 떨립니다. 이간질은 처음 하는 일이라 익숙지 않아서요….”

이런 게 배덕감이라는 건가?

한나에게 이간질 같은 나쁜 짓을 시키려니 죄책감이 느껴지지만, 이상하게 뿌듯함도 느끼고 있다.

한나도 마냥 순수한 아이는 아닐 테지만, 지금 한나가 앉아 있는 자리는 정직함으로 쌓아온 자리지, 나쁜 짓으로 차지한 자리가 아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처음으로 ‘이간질’이라는 나쁜 짓으로 지키려 하는 거다.

아니지, 생각해 보면 그리 나쁜 짓도 아니다. 그쪽에서 먼저 달려들었으니 해결하는 차원에서 대응하는 것뿐이다. 한나가 욕심을 부리려고 하는 일이 아니잖아.

“이간질이라고 생각하지 마. 그냥 시소의 균형을 맞추는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그게 더 편할 거야.”

“그렇군요. 헨델 백작의 세력이 여기서 더 커지면 문제가 될 수 있으니까요.”

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더 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라며 긍정했다.

한나의 조상님들이 지금 이 꼴을 보시면 뭐라 할지 모르겠지만, 이 방법이 지금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솔루션이었다.

로테를 포함한 한나의 조상님들, 정말 죄송합니다. 그치만 해야 하는 일이었다는 걸 알아 주셨으면 좋겠어요.

“바쁜 일이면 지금 다녀와도 괜찮아. 난 철수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되니까.”

“아… 그럼 얼른 다녀오겠습니다. 오래 걸리지 않을 거예요.”

정말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줬다. 그에 한나는 얕게 웃으며 응접실 밖으로 나갔다.

한나가 밖으로 나가자, 가만히 있던 철수가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로테랑 비슷한 점이 많더라.”

철수는 한나가 나간 문을 바라보면서 아련한 미소를 지었다.

이런 말 하면 되게 미안하지만, 드라마 대사를 실제로 듣는 것 같고 되게 오글거린다.

“야!”

“컁!”

내 속마음을 읽은 철수가 내게 화를 내자, 방금까지는 잠잠하게 있었던 노반이 크게 소리쳤다.

우리 노반은 누군가를 싫어한 적은 있어도, 이렇게 대놓고 적대감을 표한 건 처음이다.

“아, 맞다. 네가 있었지. 이 몸이 너를 까먹고 있었네.”

철수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던 걸음을 물렸다. 그리고 노반을 바라봤다.

“노반이 왜 이러지? 이런 애가 아닌데, 너 나쁜 짓 했어?”

“나쁜 짓은 네가 하는 거지! 한나한테 이간질이나 하라고 하고.”

“그럼 아예 없애 버리라고 해? 살인은 너도 싫은 거 아니야. 이게 제일 괜찮은 방법이라니까? 그리고 너 조금 더 멀리 떨어져 봐. 노반이 너 싫어하잖아.”

나는 철수를 향해 멀리 가라는 손짓을 했다. 그에 철수는 조금 심통이 났는지, 멀리 가지 않고 맞은편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말했다.

“당연하지. 쟨 드로이프고 이 몸은 불의 정령이니까.”

“그게 무슨 소리야?”

노반의 등을 두드려 주며 철수의 이야기를 들었다.

“드로이프는 본능적으로 불의 정령들을 싫어해. 치유와 식물의 성장을 다루는 드로이프에게 우리 같은 불의 정령은 악(惡)이나 다름없지.”

“컁!”

“이 몸이 너희를 까먹고 있었네. 너네 수장은 잘 지내고 있어? 드로이프가 인간이랑 노는 건 처음 보네.”

철수는 씨익 웃으며 노반에게 인사했다.

노반은 철수에게 짖다가 말고 침묵하기 시작했다. 어딘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철수는 나를 바라봤다.

“…전부 사라졌어.”

전에 노반이 내게 해 줬던 이야기를 철수에게 해 줬다.

마을은 전부 불에 타 사라지고, 자신은 잿더미 밑에서 눈을 떴다고. 다른 드로이프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그게 무슨… 누가 그랬는지도 몰라?”

“몰라. 찾아내면 죽여 버리…진 않고 죽기 직전까지 패 놓을 생각이야.”

성질대로 죽여 버릴 거라 말하려 했지만, 철수가 눈치를 주는 바람에 말을 순화해서 했다.

“단서가 없으니 아무 짐작도 못 하겠네. 우리 불의 정령은 드로이프 서식지에서 멀러 떨어져 있어서 물어볼 수도 없고… 나중에 다른 정령에게 물어볼게.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정령들에게 물어 정보를 구해 준다는 철수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든 존재하는 게 정령이니 운이 좋으면 사건의 행방을 알 수 있을 거다.

“그나저나 저 드로이프는 네가 좋은가 보다. 보통 드로이프는 인간이랑 잘 안 어울리려 하는데.”

“내가 노반을 좋아하니까, 노반도 내 마음을 알아주는 거지.”

아주 정석적인 대답에 철수는 얼굴을 찌푸렸다. ‘네가 그런 말을 할 줄 아는 인간이었냐.’라는 철수의 생각이 조금 들린 것도 같았다.

“아무튼, 이 몸은 네가 좋아하는 그 인간과 계약한 불의 정령왕이야. 자주는 아니지만, 가끔 볼 사이라는 거지. 그렇게 미워하지 마. 아무 짓도 안 할 테니까.”

“컁!”

노반은 철수의 말에 경기를 일으키듯 싫어했다.

“아무래도 철수 너는 지금처럼 계속 한나랑 같이 있는 게 좋겠다. 우리 애가 이렇게 싫어하는데 붙어 있는 건 안 될 것 같네. 괜찮지?”

“어차피 계속 로테의 아이랑 있을 거였으니 상관은 없다만… 네 입으로 들으니까 조금 서운해지네.”

어쩔 수 없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내는 건 내가 못 보니까.

물론 그렇다고 내가 철수를 싫어한다는 건 아니다.

철수도 철수 나름대로 세상을 보고 싶어 하는 호기심이 있고, 그 호기심을 굳이 내 옆에서 채우지 않아도 되니까 보내 주는 거다.

나도 철수가 곁에 있으면서 쫑알쫑알 떠들면 정신 사납기도 하고….

이게 서로가 윈윈하는 방법이다.

“내가 널 싫어하는 건 아닌 거 알지?”

“글쎄, 모르겠는데.”

철수는 짐짓 고개를 돌리곤 삐진 척을 했다.

지금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는 거 나한테 다 들켰는데.

“….”

“흠! 사실 정령으로서 속이 맑고 깨끗한 로테의 아이와 함께 있는 게 더 편해. 솔직히 너는 뭐랄까… 정령의… 생각과 맞지 않는달까. 너무 과격해.”

철수는 자기 합리화를 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한나의 곁에 있는 이유는 내가 거절해서가 아닌, ‘과격한’ 내 기운보단 ‘정상적인’ 한나의 기운이 더 좋아서라고.

“그래도 나는 이세계 사람이라 새로운 관점으로 봤을 때 즐겁기는 했을 텐데, 아깝지는 않고?”

“그건 조금 아깝지만… 괜찮아. 너랑 영영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냥 로테의 아이 곁에 있다가 생각나면 보러 갈게.”

철수의 말을 들으니, 마치 내가 철수를 장가보내고 적적해진 부모님처럼 느껴진다.

물론 난 철수를 키우지도 않았고, 산 날로 따지자면 철수가 부모님 역할이겠지만.

그게 뭐가 중요하겠어.

“그래, 언제든 와. 너무 자주 오지는 말고.”

“네가 부르기 전에는 안 가! 절대 안 가!”

아, 삐졌네.

저런 쪼잔한 그릇 크기로 정령왕이라니… 쯧쯧.

“정령왕도 정령이야!”

철수는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소리쳤다.

저게 무슨 말이야? ‘나도 사람이야!’ 이런 말인가…?

“그래. 보고 싶으면 언제든 와. 아, 근데 가급적이면 저녁에는 오지 마.”

“저녁…? 왜?”

….

“야! 너… 진짜…!”

“내가 뭘 했다고? 나 아무 생각도 안 했어!”

“뻔하지!”

뻔하다고…?

“네가 저녁에 갑자기 나타나면 귀신 나온 것 같아서 그래. 이게 뻔해?”

“아, 그거였어? 난 또….”

철수는 조금 쑥스러운 얼굴을 가리며 나와 노반의 시선을 피했다.

정령왕도 알 거는 다 알고 있구나.

“인간의 번식 생활은 이 몸도 충분히 존중해 줄 수 있어. 하지만 너는 번식이 아니잖….”

쾌락도 중요하다, 이놈아! 우리 노반 앞에서 이상한 소리 하지 마! 나보다 오래 살았지만, 정신은 아직 어리단 말이야!

“흠!”

“컁!”

노반이 철수를 향해 짖었다.

옳지, 노반, 너는 순수하게 자라줬으면 좋겠어. 어느 날 갑자기 ‘미르, 내 애인이야.’ 이러고 다른 존재를 데려오면…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다. 물론 행복을 빌어 주겠지만…

“그건 과보호야. 적당히 해야지.”

철수는 내 생각을 읽고 혀를 찼다.

때마침 손님맞이가 끝난 한나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한나의 얼굴엔 짜증이 가득했다.

짜증을 잘 내보이지 않는 한나인데….

“오래 기다리셨죠? 죄송합니다. 말이 길어지는 바람에…”

“응, 괜찮아. 무슨 일 있었어? 표정이 안 좋네.”

내 물음에 한나는 조금 뜸을 들이다가 대답했다.

“나쁜 일은 아니고, 그냥 조금 화가 났습니다. 그간 함께 일궈 온 것이 분명 있을 텐데, 이렇게 쉽게 사람을 배신할 수 있나… 그런 회의감이 들었습니다.”

한나는 자신을 찾아온 소비안 남작에게 큰 실망을 했다고 했다.

내가 전에 말했던 것처럼, 오스먼드에게 직접 상을 받으면서 한나의 위치가 조금 높아지자, 소비안 남작은 한나에게도 다리를 걸치러 왔다.

그러고선 하는 말이 헨델 백작의 정보와 다른 귀족들의 족적을 넘겨 주겠다고 했단다.

“그래서? 뭐라고 답했어?”

“생각해 보겠다고 했습니다. 물론 들어줄 생각은 없습니다.”

“잘했어. 한번 간신배는 영원한 간신배야. 절대 믿지 마.”

내 말에 한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철수의 곁으로 다가가 앉았다.

철수는 한나에게 ‘화가 난다면 이 몸이 혼내 주겠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며 한나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했다.

나한테는 사람 죽이는 건 안 된다고 했으면서 마음을 곱게 써라 뭐다 잔소리만 해 댔으면서. 어쩜 이렇게 반응이 다를까.

내가 끔찍하게 한나를 아끼는 철수를 향해 눈을 흘기자, 그는 저 멀리 허공을 바라보며 내 시선을 피했다.

“그럼 바로 본론으로 들어와서. 오늘 만나러 온 건 소개해 줄 아이가 하나 있어서야.”

“아, 저번에 말씀해 주셨던 그 귀여운 아이인가요?”

“맞아.”

나는 무릎에 앉혀 놓았던 노반을 내 바로 옆자리에 옮겨 뒀다. 그리고 노반이 한나에게 인사하기를 기다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노반이 한나를 마주했다.

“반가워… 난 노반이야.”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노반, 전 한나라고 합니다.”

“알아. 나도 한나, 네 이야기 많이 들었어.”

노반이 한나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저번에 레이가 노반에게 해 줬던 것처럼.

그에 한나는 노반의 손을 가볍게 잡았고, 두세 번 흔들었다.

이럴 수가 노반이 먼저 손을 내밀다니! 우리 애가 사람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어요!

감격한 마음에 마린을 바라보자, 방금까지 책만 읽고 있던 마린은 이미 영상 구슬을 들고 노반의 모습을 찍어 댔다.

역시 빨라.

노반은 한나와 이야기하며 ‘젠이랑은 달라서 다행이야’라며 한나를 칭찬했고, 철수는 그런 노반을 보면서 왜 자기랑은 인사해 주지 않는 거냐며 툴툴거렸다. 그리고 우리 노반은 그런 철수의 이야기를 전부 무시했다.

웃음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장면이 연이어 가던 중, 노크도 없이 응접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찾았다.”

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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