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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26화 (126/227)

126 젠 이프리트의 이야기 (1)

그 사람은 눈이 멀 정도로 환하게 반짝이는 사람이었다.

처음이었다.

오묘하지만 티 하나 없는 새하얀 천같이 하얗다. 지금껏 그 어떤 존재에게서도 본 적 없는 색이었다.

잔뜩 찌푸린 표정으로 황제궁 안으로 들어가는 그에게서 나는 눈을 떼지 못했다.

“오라버니!”

나는 한나가 부르는 줄도 모르고, 그 반짝이는 인영이 사라진 후에도 그곳을 바라봤다.

보석처럼 빛나는 그의 영혼의 색을 보자, 머리를 가득 채웠던 짙은 안개가 확 걷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느낌 정도가 아니라 정말 사라졌다. 그동안 어딘가에 묶여 있던 머릿속이 해방된 것처럼 밝아졌고, 숨이 확 트였다.

그에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저 사람을 만나야 한다.’

황제궁으로 들어간 그의 자취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자, 정신이 바짝 차려질 정도로 귀청을 울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라버니! 제 이야기 듣고 계세요?’

한나는 내 눈앞으로 손을 흔들어 정신이 멀쩡한가 확인했고, 나는 그런 한나에게 물었다.

“한나, 저 사람은 누구야?”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 방금 황제궁으로 들어가신 분이요?”

나는 한나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한나는 이름 모를 남자가 타고 온 마차를 한번 살피고 잠시 고민하다가 답했다.

“아마 세네카의 4황자님이실 거예요”

“세네카…? 세네카 사람이 여기를 왜.”

그에 한나는 말없이 내 눈을 바라봤다.

한나는 내가 백작위에 앉아 있으면서 제국의 정세와 권력에 관심이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것 때문에 내가 큰일을 겪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며 가끔 신세 한탄을 하듯 말했다.

한나는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볼모로 오신 거예요. 프레오나가 전쟁에서 이겼으니까요.”

한나의 말에는 모순이 있다.

전쟁은 프레오나가 이기긴 했지만, 세네카가 시간을 조금 더 끌었다면 승패는 달라졌을 거다.

세네카의 항복 선언이 울린 당시, 프레오나의 전력은 이미 바닥이 난 상태였고, 선언 이후에도 프레오나의 서쪽에서는 세네카와 전투 중이었다. 동쪽에서는 마물들의 공습이 일어나 전쟁에서 활약하던 기사단 몇 부대를 빼내 마물들을 상대해야 했다.

그런 입장에서 볼모를 받고 전리품을 받다니, 세네카도 배가 많이 아플 거다. 종전 선언만 조금 늦게 했어도 프레오나의 반은 가질 수 있었을 텐데.

“속도 좋네. 한 끗 차이로 이겼으니 아까울 법한데.”

“저분도 오시고 싶어서 오신 게 아니잖아요. 그쪽에서 보내니까 오셨겠죠. 얼른 가요. 레이가 기다리고 있어요.”

한나는 내 팔을 잡고 레이가 있는 곳으로 끌었다.

한숨을 쉬듯 숨을 내뱉으며 걸었다. 그에 한나는 내 언짢은 기색을 읽어 내곤 조곤조곤 말했다.

“말도 안 하시고 혼자 토벌에 다녀오셨잖아요. 걱정한 사람을 위해서라도 얼굴 보고 인사해 주셔야죠.”

이번 토벌은 내가 원해서 간 게 아니다. 황제가 직접 내린 명령이었다. 전쟁으로 흐트러진 국경 지역에 마물 떼가 내려올 낌새가 보여 국가 안보상 황제는 나를 출정시켰다.

귀찮았지만 정치 놀음에 끼는 것보단, 더러운 피를 보는 것이 훨씬 속 편해 황제의 명을 따랐다.

“저택으로 부르지 그랬어.”

어디든 싫지만, 내게 황궁은 유독 싫은 곳이다.

인간의 영혼은 살구색을 띤다. 대체로 명도에 따라 밝은 살구색에서 어두운 살구색으로 나뉘는데 이곳은 어두운 살구색밖에 보이지 않는 곳이다.

욕심과 탐욕으로 물들여진 더러운 영혼들. 그들의 색을 볼 때마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숨이 막힌다.

“오랜만이군, 이프리트 백작.”

질척한 살구색이 보였다.

헨델 백작은 우리와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굳이 인사를 하러 가까이 다가왔다.

저 음침한 색을 보자니, 또 두통이 도지는 것 같다.

“누구였더라.”

“헨델 백작입니다, 오라버니.”

한나는 내가 정말 저 인간을 모른다고 생각하는지 헨델 백작의 이름을 아주 공손하게 말해 줬다.

“허허, 사람 얼굴을 기억 못 하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군.”

“내게 도움이 되지 않는 자들을 기억할 만큼 나는 상냥하지 않습니다.”

“그 버릇없어 보이는 애매모호한 말투도 바뀌지 않았군.”

헨델 백작은 고개를 저으며 내가 기본적인 대화 예절도 모른다며 질책했다.

내가 지켜야 할 게 없었다면 전부 쓸어 버렸을 텐데.

나는 손가락만 까닥해도 바로 뭉개 버릴 수 있는 같잖은 헨델 백작을 향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내게 반가운 이가 아니지 않습니까. 도움이 되는 이도 아니고. 난 충분히 그대를 존중해 주고 있는 겁니다.”

“뭐…!”

“그대가 우리 가문을 끌어내리려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날카로운 내 말에 한나는 헨델 백작의 눈치를 봤다. 그러고는 ‘오라버니, 진정하세요.’라고 말하며 내 팔을 잡았다.

특이점이 있다면 내 팔을 잡은 한나의 손아귀에 힘이 꽤 실렸다는 것이다.

자기도 화났으면서 고상한 척을 한다.

“제 누이에게 고마워하십시오.”

“할 줄 아는 게 검을 잡는 것뿐이라더니, 사실인가 보군.”

헨델 백작은 고개를 저으며 나를 향해 비소를 날렸다. 그러고는 나를 경시하는 표정을 지으며 더러운 입을 열었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귀족 회의에는 참석하지 그러나?”

“백작은 오지랖이 넓으시군요.”

“한 가문의 가주가 돼서 부끄럽지도 않나? 남창이라니, 상스럽게. 쯧.”

팔 부러지겠다.

한나의 화가 턱 끝까지 차올랐다. 조금만 더 찌르면 완전히 터져서는 내 팔은 물론 옆구리도 터질 것 같았다.

“그대가 어떤 취향을 가지고 있는지는 상관하지 않겠네만, 그대는 그대의 누이가 불쌍하지 않나? 한창 사랑을 즐길 시기인 어린 영애에게 귀족의 일을 맡기다니.”

헨델 백작은 내게 휘둘리는 한나가 안타깝다는 눈빛을 보내고는 빈정대며 말했다.

내가 남창이라는 소문은 사실이 아니니 상관없었지만, 한나의 이야기라면 조금 달라진다.

객관적으로 보나 주관적으로 보나 한나는 귀족의 일을 잘한다. 여느 다른 귀족들과 붙여 놔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가문을 경영하고 이끌어가는 데에서는 탁월했다.

한나도 혼인으로 인해 ‘누구누구의 부인’으로 불리기보다는 ‘이프리트 백작’으로 불리길 원하고 있다.

직접적으로 내게 말하지는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은근 생각이 훤히 보이는 아이니까.

“그 입조심하세요, 헨델 백작. 난 백작의 말대로 버릇이 없으니.”

헨델 백작을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그에 백작은 내 경고를 귓등으로도 듣지 않으며 코웃음 쳤다.

“역시 일생을 검만 잡아 온 자라 그런지, 이야기가 안 통하는군.”

“그대는 하나라도 잡은 뒤에 입을 놀리지 그런가. 쥐새끼처럼 손에 쥐고 있는 것만 늘린다고 해서 권력을 잡는 것도 아니니까 말이야.”

나는 차가운 눈빛으로 헨델 백작을 바라봤고,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았던 헨델 백작은 기세를 낮추며 입을 닫았다.

그에 우리의 눈치를 보던 한나가 끼어들며 상황을 중재했다.

“오라버니, 시간이 많이 지체됐습니다. 몰베인 경이 기다리실 겁니다. 헨델 백작, 저희는 먼저 가 보겠습니다.”

“다음 귀족 회의 때는 꼭 오라비 쪽을 봤으면 좋겠군.”

마지막까지 거슬리는 말을 지껄이는 헨델 백작은 짐짓 냉랭한 표정을 짓다가 자리를 옮겼다.

헨델 백작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답답했던 공기가 풀어졌다. 하지만 아까 전 그 빛나던 남자를 보았을 때, 환하게 갰던 그 느낌은 사라져 버렸다.

“언젠가 꼭 패가망신을 시켜 줄 겁니다.”

한나는 멀어지는 헨델 백작의 모습을 보면서 주먹을 꽉 쥐곤 중얼거렸다.

일은 잘하지만, 권력 싸움에는 약한 한나가 과연 헨델 백작을 끌어내릴 수 있을지 모르겠다.

출정 전에 쓸모없는 것들은 보내고 가야 하나.

* * *

평소 같으면 바로 저택으로 돌아갈 테지만, 모여 있던 귀족 시종들이 전한 흥미로운 소식이 발걸음을 돌리게 했다.

[스파딘 폐하께서 볼모로 온 세네카의 4황자에게 로테 별궁을 주셨답니다.]

그 사람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됐다.

그 사람은 타국의 황자이기에 예의를 지켜야 했지만, 나는 앞뒤 생각할 것도 없이 발이 움직였다.

지금은 이른 아침이고, 로테 별궁으로 간다고 한들 그를 볼 수 있을지는 확신할 수 없다. 하지만 그 빛을 멀리서라도 다시 한번 보고 싶다는 마음이 강렬하게 와닿았다.

“이프리트 경! 어딜 그리 바삐 가십니까?”

누군가가 뒤에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하고 발을 옮겼다.

지금은 그 사람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 찼다.

프레오나 황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로테 별궁에 다다르자, 은은한 바람이 불어오며 기분이 조금 들떴다.

“하아…”

멀리서 바라보는 거면 몰라도, 안으로 들어가는 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어 발을 멈추려 했다.

망나니로 알려진 황태자 타루스 프레오나가 로테 별궁 안을 당당하게 걸어가기 전까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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