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 젠 이프리트의 이야기 (2)
“황태자 전하…!”
“내 말에 토 달지 말거라! 4황자는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이냐!”
황태자의 시종은 잔뜩 화가 나 있는 황태자의 기분을 맞춰 주며 돌아가야 한다고 설득했다. 하지만 타루스 황태자는 시종의 말은 하나도 듣지 않고 ‘그 사람’을 찾기 바빴다.
“간만에 곱상하게 생긴 놈이 와서 맛 좀 보나 했더니… 눈치는 빨라서, 쯧.”
무의식적으로 주먹이 쥐어졌다.
나와 그는 단 한 번 스쳐 지나간 사이다. 게다가 그 사람은 내가 누군지도, 심지어 나란 사람이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정말 아무 사이도 아닌데, 그 사람을 희롱하는 말에 주먹을 쥐고 있다니, 나 스스로도 조금 놀라고 말았다.
나는 타루스 프레오나에게 나쁜 감정을 가진 적이 없다. 오히려 아무 생각도 없었다.
한나는 타루스 황태자가 황제가 되면 프레오나는 망할 거라며 치를 떨었지만, 곧 프레오나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4황자를 찾아내! 그리고 내 앞에 데려와!”
타루스 황태자는 자신의 시종에게 호통을 치며 성질을 부렸다. 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황태자의 시선에 들지 않으면서도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는 수풀 사이로 빠졌다.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해 아쉽지만, 처음부터 만날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냥 홀리듯 발을 옮긴 것뿐이었으니까.
그 사람을 희롱하는 말에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는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 사람이 타루스 황태자와 얽히든 다른 이들과 얽히든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니 이대로 돌아갈 예정이었다.
프레오나를 떠날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서 소란을 피울 수는 없으니까. 황태자와 얽히면 여러모로 복잡해진다.
황태자에게 모습을 들키지 않도록 수풀 사이사이를 은밀하게 지날 때, 멀지 않은 곳에서 하얀빛이 희미하게 반짝였다.
그 사람이었다.
“허….”
그의 밝은 영혼의 색을 마주하자, 가슴이 얕게 진동하는 걸 느꼈다.
이 기분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다.
홀린 듯 가까이 다가가 저 수풀 너머 그 사람이 있을 곳에 손을 뻗자, 비명 소리가 들렸다.
“으악!”
그에게서 처음 듣는 말이 ‘으악’이라니, 깜짝 놀란 것 같은 그의 목소리에 잔잔한 미소가 지어졌다.
곧이어 헙! 하는 소리와 함께 입을 막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그는 내가 어떻게 나올지 살피며 눈치를 보는 것 같았다.
아마 타루스 황태자를 피하려고 하는 것 같았다.
그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려 하자, 다급한 그 사람의 목소리가 들렸다.
“스탑! 아니, 멈추시오!”
스탑…?
스탑이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뒤이어 말한 ‘멈추시오’란 말에 마법처럼 발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나는 당황스러워하는 그에게 사과의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는 내 생각보다 더 당황했는지, 잠시 말을 멈췄다.
나 때문인가? 내가 놀라게 한 탓인가? 괜히 미안해져서 다시 한번 사과를 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때 그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괜, 괜찮네. 난 멀쩡하니 오지 말고 거기에 있게나….”
“정말 괜찮으신….”
“정말 괜찮으니 그대는 그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말아 주게!”
가까이 오지 말라는 뜻이었다.
나는 만남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단호한 그의 말에 그를 향해 기울어진 몸을 원위치로 돌렸다.
“알겠습니다.”
불안해하고 있는 듯한 그를 향해 가까이 가지 않겠다고 말한 뒤, 그와 나 사이에 있는 수풀에 눌러 앉았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지, 여기를 떠나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리고 그와 멀어지기 싫다.
그의 곁에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어지럽던 머릿속과 소란스러웠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고요해지고, 애써 짓눌렀던 답답함이 그의 곁에 있으니 눈이 녹듯 사라졌다.
이건 그의 빛나는 영혼의 색과 관련이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도대체 정체가 뭐지? 필시 인간은 아닐 거다. 인간은 이런 빛을 내지 못하니까.
“그대… 혹시 갈 곳이 없는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자기 딴에는 무례한 질문이라 생각하는지 굉장히 조심스러워하는 듯했다.
조금 웃음이 나오는 질문이었다. 상대의 기분이 나빠질 만큼 직설적인 질문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돌려 말했다기엔 어느 정도 찜찜한 느낌이 들 만했기 때문이다.
갈 곳이 없다니, 듣는 사람에 따라 기분이 좋지 않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그는 내가 여기 있는 게 불편한가?
“잠시 쉬러 온 것입니다. 혹시 제가 이곳에 있는 게 불편하십니까?”
불편하냐는 내 말에 그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그대는 내가 누군지 알고 있는 것인가?”
모를 수가 없다.
질척한 살구색 사이에서 하얗게 반짝이는 사람은 당신뿐이니까.
하지만 그에게 있어 나는 모르는 사람이다. 얼굴도 모르는 내가 자신을 알고 있다 하면 이상하게 생각하겠지.
“짐작은 하고 있습니다.”
모른다고 할 수도 없으니 애매한 답을 내놓았다. 이 시기에 로테 별궁에 있을 사람이라면 당신이거나 당신과 연루된 사람밖에 없을 테니까.
“…누굴 짐작하든 틀렸네.”
그의 어색한 발뺌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네, 제가 틀렸습니다. 그러니 편히 계세요.”
“아, 고맙네.”
많이 힘들었겠지. 난생처음 적국의 볼모로 와서 시달렸을 테니까.
나는 가만히 앉아 눈을 감았다. 그와 마주 보고 있지는 않지만 그와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은 단 1초라도 낭비하고 싶지 않을 만큼 따듯하고 선명했다.
황실에 있을 때는 단 한순간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습격을 받을 일은 없지만, 긴장을 푼다면 더러운 기운에 잡아먹힐 수도 있으니 항상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했다. 하지만 이 사람과 있는 순간은 근 몇 년 동안 가장 편한 순간이 되었다.
“이 꽃의 이름을 알고 있는가?”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게 말을 걸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렸을 때,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에 꽃을 멀리 했어서 이 분야에 관해서는 잘 모르지만, 이 꽃만은 알고 있다.
“제노아스입니다.”
“제노아스?”
“네, 프레오나에서만 자라는 꽃이라 당신에겐 낯설겠군요.”
프레오나에서만 피는 꽃이고, 이 꽃에서 젠이라는 내 이름을 따 왔다.
그가 이 꽃에 대해 내게 물어보는 것도 정말 별거 아닌 질문일 테지만, 마치 마음이 닿은 듯 그와 연결된 것 같아 신기했다.
“이 꽃에도 꽃말이 있는가?”
운명. 제노아스의 꽃말은 운명이다.
희한하게 벅찬 마음이 들어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때, 귀를 울리는 끔찍한 목소리와 어두운 기운이 몰려와 평안했던 기분이 순식간에 망가지고 말았다.
“4황자! 여기 있다 들었네! 어서 나오시게!”
타루스 황태자였다.
평소였다면 아무렇지도 않았겠지만, 그와 함께하는 이 순간을 방해받은 것 같아 짜증이 났다.
이런 편안함은 그의 곁에서만 느낄 수 있는데.
“아씨…!”
바스락거리는 수풀 소리와 함께, 그가 타루스 황태자를 피해 떠나려는 것이 느껴졌다.
“이 길을 따라 쭉 걷다 보면 별궁의 뒷문이 나옵니다.”
“어?”
“만남을 원하시지 않는 것 같아서요.”
나 또한 그가 타루스와 만나지 않았으면 한다.
“그, 그래, 고맙네! 이 은혜는 잊지…!”
“4황자! 내 그대를 찾은 것 같은데, 이만 나오는 게 어떤가!”
허풍이다. 타루스 황태자의 위치에선 우리가 있는 쪽을 볼 수 없다.
하지만 그는 타루스의 허풍에 속아 뒷문을 향해 달려갔고, 남겨진 나는 그가 도망칠 시간을 벌어주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그가 달아난 곳과 꽤 멀리 떨어진 반대편으로 가, 검을 뽑고 수풀을 자르며 큰 소리를 냈다.
그에 날파리처럼 달려온 타루스 황태자는 나를 보고는, 환하게 짓던 미소를 지우고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황태자 전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이프리트 백작 아닌가, 그대는 여기서 무얼 하고 있지?”
평소라면 내가 무엇을 하든 관심도 가지지 않았을 황태자는 제가 생각해도 황실을 꺼려 하는 내가 로테 별궁에 있는 게 이상했는지 이유를 물었다.
이렇게 물어보면 마땅한 대답을 찾기가 어려운데.
“이곳으로 토끼가 들어와서 찾고 있었습니다. 혹시 보셨는지요.”
“난 또, 그대가 4황자의 소문을 듣고 왔나 걱정했네. 그리고 내가 그딴 걸 봤을 리가 없지 않은가. 괜히 어슬렁거리지 말고 돌아가게.”
타루스 황태자는 그 사람이 주변에 있는지 확인하려 주위를 살피며 내게 떠나라는 손짓을 했다.
떠날 사람은 내가 아니라 황태자다.
“제게 중요한 토끼입니다. 찾고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나저나 황태자 전하께선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폐하께서 찾으시는 것 같았습니다만.”
“그걸 그대가 어찌 알고 있지?”
타루스 황태자는 나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고, 나는 그에게 덤덤하게 말했다.
“방금까지 폐하를 알현하고 오는 길이었습니다. 폐하께서 황태자 전하를 기다리고 계시더군요.”
하루하루 죽어가는 황제는 매일 자신의 아들인 타루스를 보기를 원했다. 스파딘 황제는 자신의 첫째 아들인 타루스 황태자가 프레오나 제국의 황좌에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귀족들은 스파딘 황제가 노망이 났다며 뒤에서 손가락질을 했다. 이것 역시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나는 그저 황제의 명령을 받고 난 후, 타루스를 찾는 황제의 모습을 봤을 뿐이다.
“그 영감탱이… 쯧. 백작은 토끼든 뭐든 얼른 백작저로 돌아갔으면 좋겠군. 4황자가 그대를 보고 놀라면 쓰나.”
내가 아무 대꾸하지 않자, 타루스 황태자는 나를 향해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가서 그대가 좋아하는 남창이나 구해서 놀게나. 4황자는 내 것이 될 테니 건드리지 말고.”
타루스 황태자는 이미 그 사람이 자신의 것이라도 된 것처럼 비릿한 웃음을 지었다.
나는 그런 황태자가 가소로웠다.
“예, 황태자 전하. 정원만 찾아보고 가 보겠습니다.”
타루스 황태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곤, 다시 수풀을 베었다. 서걱서걱 잘려 나가는 수풀이 훗날 자신의 머리가 될 수 있다는 걸 알아 줬으면 좋겠지만, 멍청한 황태자는 모르겠지.
“타루스 전하, 이제는 정말 가셔야 합니다.”
황태자의 시종이 얼른 폐하를 만나러 가야 한다며 황태자를 재촉했고, 그에 황태자는 혀를 차며 발길을 돌렸다.
나는 타루스 황태자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검을 집어넣었다.
다시금 머리가 지끈거렸다.
역시 하루라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속이 풀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