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젠 이프리트의 이야기 (3)
“2황자 전하를 뵙습니다.”
새가 지저귀는 이른 아침, 오스먼드 프레오나가 이프리트 백작저 찾아왔다.
오스먼드 2황자는 귀족 회의에서 있었던 일을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왔지만, 한나가 아닌 나를 찾아온 걸로 보아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 같다.
“반갑군. 그동안 폐하의 명령으로 토벌하러 다녔다고 들었는데, 내일 한 번 더 출정해야 한다지?”
“네.”
“맘 편히 쉬지도 못했을 텐데, 몸 상태는 괜찮은가?”
“문제없습니다.”
오스먼드 2황자는 자신의 곁에 한 명의 시종만을 대동한 채, 소파에 고고하게 앉아 예의상 내 상태를 걱정해 줬다.
그의 곁에 있는 시종은 평범한 시종이 아니다. 2황자의 곁에 붙어 있는 시종에게서 한낱 사용인이 풍기기에는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게다가 오스먼드 황자는 백작저 밖으로 드문드문 사람을 풀어놨다.
제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이프리트 백작저를 두고 협박하려 하는 것 같지만, 몇 명이 대기하고 있든 상관없다.
전부 쓸어 버리면 되니까.
“무슨 일로 오셨는지요.”
“바로 본론부터 가자는 건가? 좋군.”
오스먼드 2황자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평소라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겠지만, 이번에 2황자는 내가 집중할 수밖에 없는 화제를 꺼냈다.
“그대는 잘 모르겠지만, 세네카에서 볼모가 하나 왔네.”
“….”
“알고 있나?”
단순한 내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오스먼드 2황자는 내가 그 사람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는걸 다 알고 온 듯한 말투였다.
“멀리서 한번 뵌 적이 있습니다.”
“그래, 별건 아니고… 이제 곧 황제 폐하께서 숨이 다 할 것 같아서 말이네.”
오스먼드 2황자는 웃음을 짓는 건지 안타까워하는 건지 모를 표정으로 내 반응을 살폈다.
마치 간사한 뱀 같다. 나는 저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제 말대로 제 아비가 죽어 가는 상황인데, 임종까지 잘 보살펴 줄 생각이나 하지. 관계없는 사람한테 불쑥 찾아와선 기분을 더럽게 만든다.
황족들은 이래서 싫다. 제 뜻을 위해서라면 물불 가리지 않는 안하무인에, 다른 이들보다 유독 어두운 영혼의 색까지, 보고 있으면 넌더리가 난다.
“요점만 간단하게 말해 주십시오.”
“그러지.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시는 날, 타루스의 숨도 끊어질 예정이네.”
“뜻하신 대로 하십시오. 저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누가 황위에 오르든 나와는 관계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와는 달리 프레오나에서 타루스가 사라져 준다면 고마워할 인간들이 꽤 많다. 나와 제일 가까운 한나도 그렇고, 레이가도 좋아하겠지.
나는 오스먼드 2황자에 말에 무심하게 대꾸를 했고, 이대로 내게서 신경을 꺼 줬으면 했다.
하지만 그는 꺼려 하는 내 모습에도 굴하지 않고 말했다.
“그대가 도와준다면 일이 수월할 것 같아서 말이야.”
역시나 시시한 파벌 때문이었다.
이번 일을 도와주면 지금껏 중립이었던 내가 완전한 오스먼드의 사람이 된다는 될 것이다.
“사람들은 그대가 마물을 토벌하러 동쪽으로 갔다고 알고 있을 테고, 그대는 평소에도 정치에 관심이 없었으니 황태자를 살해한 용의 선상에서 벗어나지 않겠나.”
오스먼드 2황자의 말은 그럴듯했다.
제 측근 세력들은 황태자 살인 사건에 꼬리 잡히지 않도록 명백한 알리바이를 만들고, 황태자와 전혀 관계없을 것 같은 나를 이용해 살해를 사주한다는 뜻이다.
황태자가 죽으면 그 죽음의 가장 유력한 용의자는 2황자다. 그러니 나를 이용해 2황자는 알리바이를 만들고 용의 선상에서 아예 벗어나겠다는 뜻이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황자님의 말씀대로 아직 처리하지 못한 마물이 동쪽을 누비고 있습니다. 그 수가 꽤 많고, 횡포하니 분명 토벌이 오래 걸릴 겁니다.”
마물의 관한 이야기는 변명이지만, 변명이 아니기도 했다.
실제로 마물이 자주 출몰하는 동쪽에서 갑자기 튀어나온 오크의 무리가 산 정상에 자리를 잡는 바람에 그 일대가 크게 소란스러워졌다.
빠르게 처리하면 일주일도 걸리지 않겠지만, 최대한 천천히 처리할 예정이었다.
나는 조금이라도 이곳으로 돌아올 시간을 미루고 싶으니까.
난 오스먼드 2황자의 제안을 거절했고, 그는 혼잣말을 하듯 내게 말했다.
“아쉽군. 그럼 어쩔 수 없이 세네카의 4황자를 미끼로 써야겠어.”
아까 전 4황자의 이야기는 왜 했나 싶더니, 이것 때문이었다.
“타루스 황태자가 볼모에게 관심이 많더군. 지금까지처럼 못된 일을 벌일 것 같은데….”
“못된 일이라면….”
“멀쩡한 이를 망가트리는 짓. 이번에도 그전처럼 ‘그런 짓’을 벌이겠지.”
알고 있다. 황태자의 악명은 한번 황궁에 들어가 본 사람이라면 다 알고 있을 정도로 악독하니까.
나는 딱히 꺼낼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고, 2황자가 말을 이었다.
“큰 상처를 받은 볼모는 황태자의 숨을 앗아갈 테니, 우린 세네카에게 그 책임을 물으면 되겠군.”
“….”
“혹시라도 자신이 겪은 고통을 이기지 못해 자결을 할지 모르니 사람을 잘 붙여놔야겠어. 이용할 구석이 많은 볼모니 일찍 죽으면 곤란하지. 참 아쉬워. 아직 젊고 순수해 보였는데.”
그간 타루스 황태자의 ‘못된 일’을 지켜봐 온 오스먼드 2황자는 앞으로 4황자가 겪게 될 일에 혀를 차며 안타까움을 표했다.
그리고 나는 알 수 없는 이유로 심장 깊은 곳이 아렸다.
왜지?
“….”
“물론 이번 일로 세네카와 작게 전쟁을 치를 수도 있겠지만, 그대라면 문제없겠지.”
오스먼드 2황자가 뭐라고 더 말하는 것 같았지만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세네카의 4황자, 그 사람의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확실히 그 사람은 함께 있으면 편하고, 눈길이 가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고작 스쳐 지나간 사이인 주제에 나를 희생해 가면서까지 그를 도와줘야 하기에는 그럴 명분과 이유가 부족하다.
굳이 내가 나서지 않아도 되는 일이다.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황실과 엮이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망설이는 머리와는 다르게 충동적으로 전혀 다른 소리가 입 밖으로 나왔다.
“제가 하겠습니다.”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날 도와주겠다는 건가?”
“타루스 황태자는 제가 죽이겠습니다. 4황자는 놔두십시오.”
“왜지?”
그러게. 왜일까.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꿨냐고 묻는 2황자에게 나는 침묵하다 말했다.
“전쟁이 싫습니다.”
딱히 마땅한 변명이 없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는데 어떤 핑계를 찾을 수 있을까.
“‘전쟁이 싫다’라… 꽤 그럴듯한 변명이군.”
“변명으로 들리셨습니까?”
조심스런 내 질문에 오스먼드 2황자는 작게 웃음을 짓고는 말했다.
“그대가 그 볼모를 타루스 황태자로부터 도망치게 해 준 것을 내 부하가 봤다더군. 그래서 조금 떠봤네.”
누가 보고 있었나.
근처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려고 하지 않았으나, 평소였으면 분명 눈치챘을 것이다. 내가 너무 편하게 있었나 보네.
실책이다.
“세상만사에 관심 없는 그대가 할 법한 짓은 아니었지. 그 볼모가 꽤 마음에 들었나 보군.”
“…”
“다시 한번 그대의 의견을 묻지. 나를 도와줄 텐가?”
내게는 지켜야 할 것들이 있다. 명예와 가문 그리고 권력. 나에게는 쓸모없는 것들이지만 한나를 위해서라도 최소한은 지켜야 했다.
하지만….
“뜻대로 하십시오. 하지만 그 사람은…”
나는 오스먼드 2황자를 바라보며 침묵했다. 그러자 2황자는 실소를 지으며 내게 물었다.
“그 말은 그대가 나를 돕겠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나는 음흉한 기운을 풍기는 그를 향해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내가 살면서 했던 그 어떤 결정 중에서도 멍청하고 이해가 되지 않은 결정이었다.
* * *
황태자의 죽음이 의혹으로 끝나지 않는 이상,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만 한다. 그리고 그 책임은 오스먼드의 명을 따른 이프리트가 지게 될 거다.
“한나.”
열심히 서류를 보고 있는 한나를 불렀다. 그에 한나는 내게 눈길도 주지 않으면서 성의 없이 대꾸했다.
“네, 말씀하세요.”
“이프리트 가문이 곧 사라질지도 모르겠어.”
청천벽력과도 같은 내 말에 한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오래 버텼군요.”
조금 덤덤하게 대답하는 걸로 보아, 미리 이런 날을 예견했던 것 같았다. 그게 아니라면 단순하게 농담으로 생각하고 있는건가?
“걱정 마, 여차하면 전부 쓸어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면 되니까.”
“… 그거 참, 믿음직스러운 말이군요.”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지만, 한나는 농담으로 들었는지 그저 장단을 맞춰 줬다.
나는 한나가 제대로 반응을 해 줄 때까지 천장을 바라보며 가만히 입을 다물었고, 한나는 마지막 서류를 확인하고 나서야 내게 말을 걸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벌이셨습니까. 오라버니께서 가문이 망할 거라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 꽤 큰일을 벌이신 것 같은데.”
나는 오늘 이른 아침에 있었던 일을 한나에게 말해 줬고, 한나가 내 이야기를 다 들었을 때쯤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제발…! 제발 수습할 수 있는 일만 해달라고 부탁드렸지 않습니까!”
“미안하다.”
재빠르게 사과했다. 한나는 한번 터지면 오래가니까 가능하면 빨리 사과를 하고 끝내야 한다.
한나는 내 사과를 무시하다가 잠시 후에 화를 가라앉히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정말 남색을 하셨던 것입니까?”
“한나, 너한테는 그게 중요한 거야?”
“사실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어서 남색은 별문제가 되지 않으나… 오라버니는 지금 남자 때문에 가문을 팔아 버린 것 아닙니까! 이건 사랑하는 이의 성별과 관계없이 미친 짓입니다!”
한나는 사랑 때문에 가문을 버릴 수는 없다며 크게 소리쳤다. 그리고 머리가 지끈거리는지 양쪽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나를 노려봤다.
“그렇지. 미친 짓이었지.”
“….”
“왜?”
한나는 여전히 나를 향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는 그에 가만히 한나의 말을 기다렸고, 한나는 한숨을 크게 쉬고 입을 열었다.
“세네카의 4황자랑은 언제 마음이 통하신 겁니까? 황궁에 잘 가시지도 않았으면서, 만날 시간은 있으셨습니까?”
“마음이 통했다니, 그는 내 이름도 모르고 있을 거야.”
내 말에 더더욱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은 한나는 귀가 울리도록 버럭 소리쳤다.
“지금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게, 진짜 말도 안 되는 일인데.”
나조차도 설명하지 못할 이상한 행동이었다.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고, 한나는 그런 나를 본 후, 한숨을 크게 쉬곤 머리를 싸맸다.
“그러니까… 오라버니는 ‘첫눈에’ 반한 세네카의 황자님을 위해 가문과 명예를 싹 다 바쳤다는 소리죠?”
“따지자면 그렇게 되네.”
“하아… 정말 이게 무슨….”
한나의 잔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 그냥 그렇다고는 했지만, 첫눈에 반했다는 게 뭔지 모르겠다.
따지자면 그의 얼굴도 멀리서 본 게 다고, 내가 그에 대해 아는 거라곤 그의 목소리와 인간의 것으로는 볼 수 없는 반짝이는 영혼의 색이 전부다.
그런 걸로 사람의 마음이 움직인다고?
믿을 수 없다.
4황자가 주술이라도 부리는 게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