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129화 (129/227)

129 젠 이프리트의 이야기 (4)

“오라버니…!”

“들었어.”

마물 토벌로 인해 오랜 시간 달리느라 지쳤을 가넷을 위해, 백작저로 돌아오자마자 마구간부터 들어갔다. 그리고 그 안으로 한나가 불쑥 들어왔다.

“이미 들으셨습니까?”

“그래. 황궁에 다녀오는 길이야.”

단시간 내에 오크 무리를 토벌하고 황궁으로 돌아오자, 기다리던 그 사람은 이미 떠났다고 했다.

게다가 큰 상처를 입었다고 했다.

레이가에게 짧게 들은 바로는 그 사람은 거의 헐벗은 상태로 타루스의 궁에서 피를 질질 흘리며 레이가에게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심지어는 그곳에 들어갔던 기사들로 인해 웬만한 귀족들이 그 사람의 애처로운 모습을 다 보게 되었다.

지금 그 사람의 심정이 상상되지 않는다.

“… 괜찮으십니까?”

나는 소란스러운 속을 진정시키며 가넷의 갈기를 쓰다듬었고, 그런 나를 조용히 쳐다본 한나가 괜찮냐고 물었다.

“괜찮냐니?”

“표정이 좋지 않습니다.”

그랬나… 이젠 표정 관리조차 되지 않나 보다.

분명 그 사람은 가만히 놔두라고 오스먼드 2황자와 협상했었다. 되지도 않는 2황자의 파벌에 들어가면서까지 그 사람의 평안을 빌었건만….

“한나.”

“오라버니가 계시지 않는 동안 4황자님을 뵀었습니다. 아주 좋은 분 같았어요.”

할 이야기가 있어 한나의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한나는 내가 할 말을 알아차린 건지, 내 말을 가로채며 말했다.

“세네카의 4황자님은 분명 좋은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저는… 몰락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버님 어머님께서 남겨 주신 이 가문을 지켜야 합니다.”

한나의 이야기를 듣고, 내 누이는 나랑 다른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내게 있어서 이프리트는 부모님이 물려주신 가문이었지만, 족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지위가 낮은 사람은 내게 배가 불렀다며, 누군가에게는 꿈꾸지 못할 간절한 명예와 권력을 가지고 기만한다며 손가락질했다. 그러나 나에겐 필요 없는 것이었다.

반대로 한나에게 이프리트 가문은 지켜야 할 곳이며 그녀가 일어설 수 있는 발판이다.

한나는 이 가문이 필요하다.

“몰락하진 않을 거야. 그냥 조금 주춤할 뿐이지.”

조금 장난스러운 내 말에 한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남자 때문에 가문을 버리는 것은 절대 안 된다’라며 말렸다.

이건 그 사람을 위한 것도 있지만, 최종적으로는 나를 위한 일이다.

“오늘 밤, 타루스 황태자에게 갈 거야.”

“….”

“그자의 목숨을 끊어 놓고 나도 떠나려고.”

“예?”

한나는 마구간이 다 울리도록 크게 소리쳤다. 그러고는 내 팔을 덥석 잡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떠난다니요! 자살이라도 하시겠다는 뜻입니까? 게다가 타루스를 죽인다니요! 황족 시해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 알고 계십니까? 가문은 물론이고 이프리트와 관련된 모든 사람이 몰살당한다구요!”

아, 떠난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었는데.

나는 경악하고 있는 한나를 잘 타이르며 말했다.

“떠난다는 소리는 말 그대로 수도를 떠난다는 이야기야. 죽는다는 게 아니라.”

“황족 시해죄는요! 몰래 한다고 안 걸리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맞아, 그래서 대놓고 일을 치를 셈이야.”

한나는 충격적인 내 이야기를 듣고 이제는 소리 지르기도 지친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망하려면… 저는 빼고 혼자 망해 주세요.”

“안 망해. 오스먼드 2황자랑 합의 본 일이야.”

아까 전, 황궁에 도착하고 바로 2황자를 만나러 갔다. 그리고 자신이 세네카의 4황자와 거래했던 이야기를 해줬었다.

오스먼드 2황자는 은은한 미소를 지으며 4황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꽤 영리하더군. 내게 분수에 넘치게 행동했지만, 이상하게 밉지 않았어.]

나는 그 말을 하는 오스먼드 2황자에게 묘한 감정을 느꼈다. 2황자가 그 사람을 마음에 들어 하는 게 싫은 듯했다.

참 이상했다. 2황자가 그 사람을 마음에 둘 수도 있는 거지, 다른 누구도 아닌,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내가 속 좁은 사람처럼 질투하고 있다는 게 웃겼다.

오스먼드 2황자는 목석처럼 가만히 서서 눈만 뜨고 있는 나를 향해 물었다.

[4황자가 말하길, 남색가인 그대가 자신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타루스를 죽인 것이라는 내용으로 소문을 퍼트리라더군.]

2황자가 전해 주는 그 사람의 말에 피식 웃음이 지어졌다. 사랑 이야기라니 나와는 전혀 관계없을 법한 소문이다.

그 사람은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나를, 자신의 생존 수단으로 이용했다. 보통 때라면 화를 내야 할 상황이지만, 생각만큼 화가 나진 않았다. 그냥 조금 막돼먹고 괘씸한 사람이구나 싶었다.

나를 지옥으로 빠트리려는 그의 계획보다 그 사람이 나를 알고 있었나 하는 사실이 조금 더 흥미로웠다.

그 사람은 나를 어떻게 알게됐을까.

내 손으로 타루스의 끝을 장식하라는 명령을 내린 2황자는 자신이 곧 귀족들의 여론을 잡겠다고 했다.

내가 백작위를 버린다면, 황족 시해죄를 사해 줄 것이다. 2황자는 내게 그 사람의 곁으로 가라고 했다.

그러고는 ‘이게 내가 그대에게 해 줄 수 있는 최선이야.’라는 이야기도 했다.

확실히 황족 시해죄가 사해진다는 건 전에는 없던 파격적인 일이다. 내가 백작위만 버리면 가능하다니, 원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하지만 타루스의 죽음이 다른 귀족들에게도 반가운 일이라 오스먼드 2황자의 말대로 귀족들의 여론만 잘 조성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다.

오스먼드 2황자와 나눴던 이야기의 일부를 한나에게 말해 줬다.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한나는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 입을 다물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라버니가 백작위를 포기한다는 말은….”

“맞아. 내겐 자식이 없으니 네가 이프리트 백작위를 이어야 하는 거야.”

내가 백작위에서 내려오고 나면 남은 이프리트 혈족인 한나가 백작위를 이어야 한다.

한나는 내 이야기를 듣는 내내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기뻐 보이는 듯하면서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꾹 깨물고 나를 바라봤다.

“표정이 왜 그래. 네가 하고 싶어 했잖아.”

“그렇지만… 기분이 좋지만은 않습니다.”

한나는 오라버니를 밟고 백작위에 올라가는 기분이라며 내키지 않는다는 식으로 이야기했다.

따지자면 남자 때문에 사고 친 오라버니의 뒤를 이은 누이의 힘겨운 생활이 될 테지만, 혼날 것 같아 굳이 그리 언급하지는 않았다.

“나도 원하는 일이야.”

“그건 알고 있습니다. 항상 수도 밖으로 계시니 모를 수가 없지요.”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는 듯한 한나의 말에 나는 얕은 미소를 지어 줬다.

한나가 미안해할 일이 아니다. 가문을 헤집어 놓은 내 잘못이 컸다.

나와 한나의 눈치를 살피던 가넷이 푸르릉 소리를 냈고, 한나는 가넷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하는 건가.

“애초부터 내게 백작위는 필요 없었어. 그 자리는 나보다 네가 더 어울려.”

내 말을 들었음에도 한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숙이고 있었다.

나는 한나가 기뻐할 줄 알았다. 그토록 원하던 백작이 되는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기뻐하면서도 내색하지 못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한테 미안해할 필요 없어. 말했듯이 나도 황실에서 벗어나고 싶으니까. 오히려 내가 미안하지.”

“…”

“미안해. 제멋대로인 오라버니라서.”

그 말에 한나는 숙였던 고개를 들고 이야기했다.

“오라버니가 하고 싶은대로 하세요.”

“….”

“그동안 많이 지치셨단 걸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음에도 오라버니께 많은 걸 부탁했었죠…. 이제는 하고 싶은 대로 사세요.”

한나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러고는 조금씩 어깨를 들썩이며 울먹였다.

“오라버니가 이프리트의 이름을 박탈당하셔도, 저는 항상 오라버니의 편이란 걸… 기억해 주세요.”

쥐똥 같은 눈물을 찔끔 흘리는 한나에게 가넷이 가까이 다가가 다독였다. 나도 마음이 시큰해지는 것 같았다. 그때, 가넷의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한나로 인해 잊고 있던 사실이 떠올랐다.

여기 마구간이었지.

마구간에서 이런 중요하고 심도 깊은 이야기를 하게 될 줄 몰랐다.

* * *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은 더운 여름 날씨와는 전혀 다르게 서늘한 기운이 맴돌았다.

이 지하 감옥은 시체 썩는 냄새가 풍기는 기분 나쁜 곳이었다.

그러나 이 감옥에서도 좋은 자리는 있다. 출입구와 가까워 퀴퀴한 냄새가 덜 나고, 벌레가 다른 곳들보다 덜 보이고, 횃불이 있어 어둡지 않은 곳이다.

당연하게도 이곳엔 타루스 황태자가 있었다.

“여기까지 그대가 어쩐 일인가.”

나를 발견한 타루스 황태자는 감옥 안에서도 거만한 태도를 취했다.

별말 하지 않고 검을 뽑아 들자, 눈을 동그랗게 뜬 타루스 황태자가 뒷걸음질 치며 소리쳤다.

“문, 문지기! 거기 아무도 없는가! 이자가 반역을 꾀하려 한다!”

“아무도 없습니다. 있다 해도 들어오지도 않을 거고요.”

“나, 나한테 왜 그러는 건가! 내가 그대에게 무슨 나쁜 짓이라도 했는가? ”

타루스 황태자는 지금껏 자신이 저질렀던 나쁜 짓이 너무 많아서 생각이 나질 않는지 당황해하며 고심했다.

자신이 왜 죽는지는 알고 죽어야겠지.

“세네카의 4황자를 겁탈했다고 들었습니다.”

내 말을 들은 타루스 황태자는 벽에 막혔음에도 불구하고 뒷걸음질을 치며 말했다.

“나는 억울하다!”

“억울?”

“부, 분명 겁탈하려는 시도는 했다만, 성공하지 못했어! 그놈의 옷을 벗긴 것까지는 기억하지만 정신 차리니까 이곳이었다고!”

타루스 황태자는 잔뜩 화를 내면서 자신은 그 사람을 겁탈하지 않았다며 결백을 주장했다.

저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시도는 했다는 말이네요.”

날이 선 검 위로 어두운 오러가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광폭하고 해로운 마물을 제외한 존재들의 생명을 앗아가는 건 달갑지 않다.

선명하게 빛나던 영혼이 색을 잃어가는 모습은 안타깝고 허무하다.

하지만 저 귀축의 색은 해로운 마물과도 같은 짙은 색을 띠고 있어 죄책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뽑아 들었던 검에 오러를 불어넣어 단번에 철장을 갈랐다. 금속이 절단되는 소리와 함께 귀축의 비명이 귀를 찔렀다.

“나, 나는 곧 이 지하 감옥 밖으로 나갈 거라네! 그대, 내가 나가고 나서 후회하지 않겠는가! 다 없던 일로 해 줄 테니 돌아가게!”

자신은 프레오나의 황제가 될 몸인 황태자고 이곳에 있는 것도 잠시라며 나를 회유하려 들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타루스 황태자의 말을 무시하며 부서진 철장을 떼어 내고 그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가갔다.

“왜, 왜 이러는가! 내 그대가 원하는 것이 있다면 다 들어주겠네! 그 칼을 거두고 돌아가게!”

“지금 하고 있습니다. 제가 원하는 일.”

단 한 번의 손짓으로 귀축을 베었다. 더러운 피 냄새가 지하 감옥을 맴돌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