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 젠 이프리트의 이야기 (5)
타루스의 숨이 끊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흰옷을 입은 세 명의 남성이 들어왔다. 그들은 흰 멱모로 타루스 황태자의 차가운 주검을 덮고는 조심스레 들어 올렸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자, 주검을 들지 않은 남아 있는 한 명이 내게 가까이 다가와 말했다.
“이프리트 경은 잠시 이곳에 계십시오. 오스먼드 2황자 전하의 명령입니다.”
나는 남자를 향해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남자는 내가 가르고 부순 철창문을 낑낑거리며 들어 올리려 했다.
“이것… 좀 도와주시겠습니까? 감옥의 구색은 갖춰야 해서….”
남자는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나를 바라봤고, 나는 순순히 철장을 들어 올려 끼워 맞췄다.
그냥 빈 감옥으로 사용했으면 됐을 텐데.
“그럼, 내일 아침에 오겠습니다.”
남자는 고개를 숙이며 정중하게 말했고, 나는 알겠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마지막으로 지하 감옥에 있는 타루스 황태자의 흔적을 지우고 밖으로 나갔다.
쾅 소리가 나며 문이 닫히자, 끼워 맞췄던 철창문이 다시 떨어져 나가고, 듣기 싫은 금속 소음이 지하 감옥을 울렸다.
이후 지하 감옥이 다시 조용해지자, 멀리서 한 남성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그대!”
“….”
“방금 들어온 그대! 그대에게 말하는 것이오!”
지금 내가 있는 감옥의 대각선 왼쪽에 있는 철창 뒤로 밝은 살구색이 희미하게 보였다. 인간치고는 깨끗하고 선명한 살구색이었다.
나는 떨어진 철장 밖으로 걸음을 옮겨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남자는 감옥에 갇힌 것 치고는 굉장히 깔끔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수염도 잘 다듬어져 있는 걸로 보아,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인 것 같았다.
“뭡니까.”
“어, 어떻게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이오?”
남자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서는 안 보이는 건가?
고개를 돌려 타루스 황태자가 갇혀 있던 감옥을 봤지만 보이지 않았다. 남자가 상황을 모를 법했다.
“철장이 열려 있어서 나왔습니다.”
“그, 그렇소…? 그나저나 꽤 소란스러웠었는데… 밖은 괜찮은 것이오?”
“글쎄. 아마도 괜찮을 거라 생각합니다.”
남자에겐 괜찮을 거라 말했지만, 아마 괜찮지 않을 거다.
황제가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는 상황에서 계승자인 황태자가 죽었다. 소란스럽지 않을 리가 없다.
“그렇소…? 그렇다면 다행이오. 아, 소인의 소개를 하지 않았군. 소인은 사하탐이라 하오. 장소가 조금 그렇지만, 어찌 됐든 반갑소.”
남자의 이름은 사하탐으로 ‘기론’이라는 작은 왕국에서 온 상인이라 했다.
“기론이라면… 프레오나와 꽤 먼 것으로 알고 있는데.”
“맞소. 소인은 이곳까지 수십 개의 왕국을 거쳐서 왔소.”
잘 알지는 못하지만 기론은 일 년 내내 태양이 비추는 왕국인 아주 더운 나라라고 들었다. ‘상인의 왕국’이라고도 불리는데 사하탐은 그곳에서 온 상인이었다.
“기론에서 온 상인이 프레오나 감옥에는 무슨 일로 갇힌 겁니까.”
“아… 그게….”
사하탐은 말꼬리를 늘리며 내 시선을 회피했다. 그리고는 호탕하게 허허 웃으며 자신의 잘못을 고백했다.
“항아리 값을 조금 올려서 팔았는데, 재수 없게도 그 손님이 깐깐한 귀족이지 뭐요. 덕분에 경비병에 잡혀 이곳에 갇히게 된 거지.
“얼마나 올려 팔았길래 잡힌 겁니까.”
“15배 정도….”
갇힐 만했다.
그럴 만했다는 내 시선에 사하탐은 뻘쭘한지 하하 웃었다.
“소인은 오늘 아침에 갇혔소. 보석금을 낸다면 내일이라도 풀려날 수 있을 것 같소. 그대는 무슨 일로 갇히게 됐소?”
사하탐은 자신의 이야기가 끝나자 내 이야기를 물었다. 이곳에 갇혀 있는 동안 심심했는지 말이 꽤 많았다.
내가 이곳에 있는 이유는 단 하나다.
“제국의 황태자를 죽였습니다.”
“…그건 농이오?”
“방금까지 저기 있던 자가 제국의 황태자였는데, 몰랐습니까?”
나는 철장이 망가진 감옥을 가리키며 말했고, 사하탐은 충격받은 얼굴로 말했다.
“그걸 소인이 어찌 알겠소!”
“몰라도 크게 문제가 되진 않습니다.”
사하탐은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는 믿지 못한다는 듯 내게 물었다.
“허어… 제국의 황태자를 죽였다니, 그대는 같은 황족이라도 되는 것이오? 아니지, 황족이라면 이곳에 오지 않았겠지… 그대는 누구고, 어찌 황태자를 죽인 것이오?”
시하탐은 숨 쉴 틈 없이 질문을 했고, 나는 말 없이 그를 가만히 바라봤다.
그는 황태자를 죽였다는 내가 무섭지도 않은지, 눈을 땡그랗게 뜨고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
“그게 궁금합니까?”
나는 그에게 이런 찜찜한 일이 궁금하냐고 물어봤다. 비꼬려는 건 아니었고, 그저 순수하게 궁금해서 물어봤다.
하지만 사하탐은 다르게 받아들였는지 바로 사과를 했다.
“아, 미안하오. 소인은 천성 상인이라 그런지, 흥미가 가는 이야기는 꼭 들어야 직성이 풀려서 그랬소. 그대가 곤란하다면 묻지 않을 테니 대답하지 않아도 괜찮소.”
“곤란하진 않습니다.”
나는 황태자를 죽이게 된 이유를 ‘그 사람’이 2황자에게 요구했던 대로 말했다. ‘이프리트 가문의 백작인 나는 프레오나 제국으로 온 세네카의 볼모 황자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 사람에게 아픔을 안겨 준 황태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라고
상인들은 정보를 팔아넘기기도 하니, ‘기론의 상인’인 사하탐이라면 이 이야기가 대륙에 빠르게 퍼질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황족을 죽였다는 것이오? 그대는 정말 못 말리는 사랑꾼이군!”
사하탐은 우스갯소리로 나를 ‘못 말리는 사랑꾼’이라 칭했다.
기론 왕국의 유머인지 뭔지, 내가 듣기에는 웃을 건더기가 전혀 없었다. 내가 무표정하게 있는데도 사하탐은 혼자서 잘 웃었다.
나는 웃음보에 빠진 사하탐을 놔두고 몸을 돌렸다.
“궁금증이 풀렸다면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아! 안 돼오! 가지 마시오! 소인과 같이 있어 주면 안 되겠소? 곧 밤이 되어 가는 것 같은데 너무 무섭소.”
사하탐은 돌아가려는 내 소매를 꽉 잡고는 지하 감옥은 난생처음이라 무섭다고 말했다.
“나는 무섭지 않나요?”
나라면 이 어두운 지하 감옥보다 방금 전 사람을 죽인 내가 더 무서울 것 같았다.
내 질문에 사하탐은 잠시 소란스러움을 접어두고 담담하게 말했다.
“전혀 무섭지 않소. 소인은 50년 넘게 장사를 해와서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이 트여 있소. 소인의 눈에는 그대가 전혀 나쁜 사람으로 보이지 않소. 그나저나 그대는 이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거요? 부우웅 같기도 하고, 아아앙 같기도 하오.”
‘사람을 보는 눈이 트여 있다면, 깐깐한 귀족에게 잡혀 갇힐 일 따윈 없었을 텐데.’라는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 했지만 참았다.
사하탐은 감옥 깊숙한 곳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린다고 했다.
이곳은 낮에도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지하 감옥이지만, 밤에는 기분 탓인지 더욱 어두운 것 같다. 뭔가가 깔리는 것처럼.
사하탐의 말을 들어보니 아주 작지만 우우웅- 같은 소리가 들렸다.
내 눈에는 아무 색도 보이지 않아 사람이나 다른 존재가 없다는 걸 알지만, 사하탐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어둠 속에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곳에 갇힌 사람도 당신과 나 둘뿐이고요.”
“그, 그걸 그대가 어찌 확신하는 것이오!”
“불안하다면 가서 확인해 보면 되죠.”
나는 내 소매를 잡은 사하탐의 손을 떨쳐내고, 타루스가 갇혀 있던 감옥으로 가서 벽에 걸려 있는 횃불을 들고 지하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가지 말라고 말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예상대로 지하 깊숙한 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우우웅- 울리는 이 소리는 그저 바람이 감옥을 맴도는 소리였던 것 같다.
어딘가에 작은 숨구멍이 뚫려 있는 걸까. 아무튼 귀신이나 다른 인외 존재는 없었다.
다시 사하탐이 있는 곳으로 돌아와 탐색의 결과를 알렸다.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저 바람이 빠져나가는 소리 같았어요.”
“그, 그렇소? 그대 배짱이 정말 두둑한 것 같소.”
“그럼 내일 잘 나가길 바라겠습니다.”
나는 사하탐에게 짧게 인사를 한 뒤 다시 철장이 부서진 감옥으로 들어갔다.
바닥에 기대어 앉아 머리를 기대곤 눈을 감았다. 얕은 잠을 자려 했지만 나를 계속 부르는 사하탐에 의해 잠에 들 수 없었다.
“그, 그대 살아 있는가?”
“하아….”
“그저 궁금한 것이 있소! 혹시 그대, 사형을 당하는가? 잘 생각해 보니 황태자를 죽이는 건 큰 죄가 아니오!”
사하탐은 내가 대꾸를 하지 않아도 조잘조잘 떠들었다.
“프레오나 황태자의 악명은 소인도 익히 들었었소! 그러니 그대를 탓할 사람은 없겠지만, 그래도 황족이 아니오? 그대 괜찮은 거 맞소?”
“….”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게 아니라 도망가야 하는 거 아니오? 철장에서 나왔으니 밖으로도 나갈 수 있는 것 같소만, 어서 도망가시오!”
사하탐은 자신의 앞을 가로막는 철장 문을 쾅쾅 내리치며 말했다.
그에게 대답해 주지 않으면, 지금처럼 밤새 말을 걸 것 같아 한숨을 깊게 내쉬고 그에게 말했다.
“안 죽습니다.”
“그대가 죽지 않는다니 다행이지만… 그게 가능한 일이오?”
“당신의 말대로 황태자의 죽음을 많은 사람이 반겼으니까요. 귀족들의 회의를 거쳐 정상참작으로 가벼운 죗값을 받게 될 것 같아요.”
“정말 다행이오!”
내 말에 사하탐은 하하 웃으며 박수까지 쳐 줬다.
오늘 처음 본 내게 정이라도 든 건지 조금만 더 하면 눈물까지 흘리려 했다.
“혹시 괜찮다면 세네카 볼모 황자와의 첫 만남 이야기를 해 줄 수 있겠소? 이건 소인 말고도 궁금해할 사람이 많을 것 같아서 말이오.”
“….”
“물론 그대가 다른 이에게 말하지 말라 하면 말하지 않겠소. 소인만 알고 있을 테니 말해 주면 안 되겠소?”
“….”
“확실히 같은 성별의 사랑은 남들에게 인정받기 힘들다고 생각하오. 그렇지만 그렇기에 더 빛나는 사랑 이야기가 아니겠소? 소인은 그대들의 사랑이 정말 대단하다고 생각하고 있소.”
사하탐은 끊임없이 말했다. 세네카의 볼모 황자와의 사랑 이야기를 말해 주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계속 조잘거려서 내 귀에서 피가 나오게 할 속셈인 것 같았다.
나도 사랑 이야기를 꾸며 내서라도 저 입을 다물게 하고 싶었지만 할 말이 없었다.
우리는 사랑을 나눈 것도 아니었으며, 마주 보고 이야기를 나눈 적조차 없다.
“…첫눈에 반했습니다. 멀리서 지켜만 보고 있었지만, 어쩌다 보니 그분과 이야기를 나눌 기회가 왔고. 그 이후에 가까워졌습니다.”
대충 비슷하게 지어 냈다.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라고 생각해서 입을 다물었더니, 사하탐은 운명 같은 사랑 이야기라며 좋아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정말 풋풋한 사랑 이야기라 소인이 다 떨리는 것 같소. 시작은 다 그런 거지! 소인과 소인의 반려의 만남에도 아주 큰 시련이 있었소….”
잠을 자기에는 그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