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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31화 (131/227)

131 젠 이프리트의 이야기 (6)

굳게 닫혔던 지하 감옥의 문이 열렸다. 어느새 아침이 밝았는지 열린 문 사이로 환한 빛이 들어오며 눈을 찔렀다.

누군가가 나를 향해 가까이 소리가 들렸지만 감은 눈을 뜨지 않았다.

“감옥에서 지낸 하루는 어땠는가.”

오스먼드 2황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부신 눈을 살며시 뜨자, 오스먼드 2황자가 부서진 철장 바로 앞에 서 있었다.

그는 내가 앉아 있는 곳까지 오지 않았다. 감옥 안으로 들어오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나쁘지 않았습니다.”

“다행이군. 그나저나 화려하게도 했군. 문지기에게 말했다면 열쇠를 주었을 텐데.”

오스먼드는 부서진 철장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문지기한테 열쇠를 받아 올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열쇠를 찾는 것보다는 철장을 가르는 게 더 빠르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자, 아무래도 좋다는 어조의 오스먼드 2황자가 말했다.

“그대에게 좋은 소식이 있어, 대다수의 귀족이 그대의 사면에 동의했지. 타루스가 사라져 주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야.”

오스먼드 2황자는 짧은 비소를 날리며 말했다. 귀족들도 타루스의 죽음에 기뻐하지만, 내가 봤을 땐 본인도 꽤 기뻐하는 것 같았다.

하긴, 이젠 황제가 됐으니 기쁠 만도 하지.

“그렇군요.”

“그래, 이제 그대가 원하는 곳으로 가도 좋아.”

그는 내게 돌돌 말아 노끈으로 묶은 종이를 건넸다.

받은 종이를 펼치자, ‘그 사람’의 현재 위치가 적힌 종이가 나왔다.

“이건…”

“가는 김에 4황자가 허튼짓을 하지 않는지 지켜봐.”

오스먼드 2황자는 내게 그 사람을 지켜보며 감시자 역할을 해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미심쩍은 일이 있다면 알리겠습니다.”

“그래, 그대가 잘 지내길 바라지.”

오스먼드 2황자는 내가 감옥에서 나갈 수 있게, 문을 막고 있던 몸을 움직였다. 그러고는 나가 보라며 턱짓했다.

나는 나가기 전, 감옥 안을 살피며 사하탐이 갇혀 있는 곳을 바라봤다. 사하탐은 세상 모르고 감옥에 대자로 누워 편하게 잠을 자고 있었다.

“2황자 전하, 저자를 풀어 주시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저자는 누구지?”

내 말에 오스먼드 2황자가 고개를 돌려 사하탐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지하 감옥에서 태평하게 자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선 코웃음을 쳤다.

“저자는 ‘기론’의 상인입니다. 제 이야기를 해 뒀으니 소문이 빠르게 돌 겁니다.”

“호오… 기론의 상인이 여기엔 왜 잡혀 있는 거지?”

“잘 모르겠습니다.”

“알겠네. 저자에게 문제가 없다면 풀어 주지.”

나는 짧게 고개를 숙이곤 밖으로 나갔다.

어두웠던 지하 감옥과 다르게 지상은 햇빛이 쨍쨍하게 내리쬐고 있었다. 어젯밤, 가넷을 묶어 놓은 곳으로 향하자, 그곳에서 한나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꼴이 말이 아니시군요.”

“그렇네.”

타루스의 피가 흰 셔츠에 튀었는지, 셔츠에 갈색빛의 얼룩이 져 있었다. 오물이 묻은 느낌이라 좋지 않았다.

“여벌의 옷을 가져왔지만… 여기서 갈아입기는 조금 그러니 나중에 갈아입으세요.”

“그래.”

“바로 가시는 거예요?”

중요한 일이 없으니 지금 바로 떠나도 상관없을 것 같다. 백작의 일은 한나가 더 잘 알고 있을 테고, 내가 멀리 떠난다고 딱히 만날 사람도 없…지 않구나.

“레이에게 안부 전해 줘.”

“안 그래도 레이 경이 오라버니께 세네카의 4황자님을 잘 부탁한다고 하셨어요.”

“레이가?”

나는 레이가 4황자와 어떤 접점이 있었길래, 내게 4황자님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는 건지 궁금했다.

그에 한나는 어두운 표정으로 내 질문에 답했다.

“그날 세네카의 4황자님을 모시러 갔던 사람이 레이 경이에요. 타루스가 4황자님을 겁탈하던 날이요.”

거길 레이가 갔다고…?

“왜 레이가 갔어. 다른 사람도 있었을 거 아냐.”

“당시에 레이 경이 야근 중이었을 거예요. 전날 바네사 양과 시간을 보내느라 업무에 빠졌었거든요.”

타루스의 악행을 확인하는 데에는 그 누구도 아닌 중립인 몰베인가(家)가 확인하는 편이 깔끔하고 좋을 테니 레이를 보냈을 거다.

오스먼드 2황자의 투명한 계획에 자동적으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레이의 과거를 알고 있었음에도 레이를 보내다니… 역시 황족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런 표정 짓지 마세요. 다행이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4황자님이 레이 경을 위로해 주셨던 것 같아요. 상황이 반전된 것 같지만, 아무튼 레이 경의 상태도 괜찮았어요. 전처럼 하루 종일 속을 게워 내지도 않았고, 열도 오르지 않았어요.”

“…그건 다행이네.”

“네, 그러니 레이 경이 4황자님의 걱정을 하는 거죠. 오라버니도 그분께 잘 대해 주세요. 여러모로 좋으신 분 같아요.”

한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실 나는 그 사람과 잘 지낼 틈 없이, 황궁에서 잊혀질 때쯤 프레오나를 떠날 생각이다.

로웨나 왕국 동쪽에 있다는 드래곤을 만나러 가야 한다.

어렸을 때 스치듯 보았던 그 붉은색을 다시 한번 보고 싶고, 세상 모든 걸 알고 있다는 로웨나의 고룡이라면 내가 영혼의 색을 보는 이유를 알고 있겠지.

“갈게. 잘 지내고 있어.”

나는 얌전히 나를 기다리던 가넷 위로 올라탄 뒤, 한나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그에 한나는 내 인사에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 물러났다.

나는 한나에게 작은 미소를 지어준 뒤, 북쪽을 향해 고삐를 돌렸다.

* * *

그 사람이 살고 있다는 저택까지 쉬지 않고 달려왔다. 꽤 좋아 보이는 저택의 울타리 밖에서 주위를 둘러봤다.

저택 뒤편에 있는 산 뒤로 희미하지만 그 사람의 색이 보였다.

정말 희한하게 저 사람의 색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진다.

선명한 하얀 빛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저택의 울타리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그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상대로 산 아래로 내려오는 그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그 사람은 자신의 품 안에 바구니를 소중하게 품고 조심스럽게 밑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나를 발견했다.

“어?”

그의 얼굴이 점점 나와 가까워졌다.

“황자님.”

“아! 마커스가 보낸 이인가? 반갑네.”

그는 나를 아주 반갑게 맞이했다. 마커스는 또 누구지. 내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활짝 웃음을 지으며 내게 가까이 다가오다가, 잠시 멈칫하는 동시에 내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대는 누구지?”

그는 마커스인지 뭔지가 보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는지, 조금 경계하는 듯한 말투로 내게 누구냐고 물었다.

나는 가까이 온 그의 얼굴을 더 자세히 보려 거슬리는 머리카락을 쓸어넘기곤 그를 바라봤다.

환하게 빛나는 영혼의 색을 무시한 뒤, 그의 얼굴을 살폈다.

조금 긴장한 표정을 짓는 그는 보랏빛의 투명한 눈이 돋보이는 순수하게 말간 얼굴이었다. 붉은빛이 도는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듯했다.

한나는 이 사람이 대륙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일 거라 했다.

동의한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호감을 주는 외모였다. 내가 그동안 많은 사람을 만나 보진 않았지만, 이 사람처럼 생기기는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네카의 다른 황자들의 얼굴도 봤었지만, 이 사람처럼 수려하게 아름답진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그러고 보니 다른 황자들의 영혼의 색은 평범한 인간의 것과 다르지 않았는데, 유독 이 사람의 색만 이렇게 빛이 난다.

영혼의 색을 볼 수 있는 내 눈에는 이 사람이 세상 그 어떤 존재보다 아름답다.

“처음 뵙겠습니다. 젠 이프리트라고 합니다.”

내 이름에 그는 돌덩이처럼 굳었다. 그러고는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내게 되물었다.

“…누구?”

“이프리트가(家)의…”

“내 그대를 모른다는 뜻이 아니라…!”

그는 내 말을 자르며 경악했다.

그는 자신이 내게 어떤 짓을 벌였는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내가 이곳에 올 줄은 전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하긴, 내가 살아 있을 줄 몰랐겠지.

내 이름을 말하자, 그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얼굴에 다 보이는 게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본격적으로 관찰하듯 그를 바라봤다. 그는 심각한 표정을 짓다가도 무언가를 깨우친 듯 눈썹을 위로 올리기도 했다.

점점 울상이 되어 가는 그의 표정에 그만 뜸 들이고 괜찮다고 말하려 했지만, 그가 우물쭈물하며 입을 열었다.

“그… 내가 아직 죽기엔 못 해 본 게 너무 많고…요. 나 이거 열심히 땄는데…요. 우리 여우한테 먹여 줘야 하거든…요.”

품에 안은 바구니를 소중하게 품으며 쭈뼛쭈뼛 존대를 하는 그의 말에 하마터면 소리 내서 웃을 뻔했다.

그가 안고 있는 바구니를 보니, 여러 색의 베리들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이렇게 많이 따려면 시간이 좀 걸렸을 텐데, 저 작은 손으로 하나하나 땄을 그를 생각하니 입꼬리가 올라갔다.

“혼자 따신 겁니까? 많이 따셨네요.”

“응… 여우가 은근 많이 먹어서…. 요.”

그는 말을 하면서도 아주 조금씩 내게서 멀어졌다. 내게 미안해하면서도 나를 경계하는 것 같이 보여서, 마물의 먹이를 빼앗은 작은 동물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말 편히 하세요. 원망스럽지만 탓할 생각은 없습니다."

“으응… 알고 있었구나….”

아, 못 참겠다.

나는 올렸던 머리카락을 다시 내리고, 작게 웃었다. 그를 더 보도 있으면 실례가 될 정도로 웃을 것 같아, 가넷을 데리고 마구간이 있는 곳으로 들어갔다.

저택 뒤쪽에 있는 마구간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뒤, 이곳까지 쉬지 않고 달리느라 수고했을 가넷의 고삐를 풀어줬다. 그리고 방금 전의 그를 생각하며 웃었다.

“아마도 이곳에서 오래 있을 것 같아. 그래도 네가 원하는 만큼 달리게 해 줄게.”

푸르르 입을 떠는 가넷을 쓰다듬어 주며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마구간을 나가자, 저택 안으로 들어가 있을 줄 알았던 그가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그 와중에도 바구니는 소중하게 품고 있었다.

내가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도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상념에 빠져 있었다.

그의 팔 사이로 손을 넣어 그를 일으켜 줬고, 그는 크게 놀라며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봤다.

“악!”

그와 눈이 마주쳤고, 내 얼굴을 바라본 그의 동공이 한순간에 커졌다.

그는 놀란 와중에도 품고 있던 바구니를 꽉 붙들고 놓지 않았다.

“찬 곳에 앉아있으면 몸에 좋지 않습니다. 들어가서 마저 이야기 나눌까요?”

나는 그가 들고 있던 바구니를 부드럽게 뺏어 들곤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허어…!’ 같은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내 뒤를 따라왔다.

나는 이 사람을 평생 가도 미워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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