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젠 이프리트의 이야기 (7)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이 꽤 지났다.
내가 성인이 되고 난 후, 가족인 한나와 만난 시간보다 그와 함께한 시간이 더 많다.
그 사람에게 약에 대한 전문 지식이 있는 것도 알았고, 신분과 맞지 않게 요리도 잘한다는 것도 알았다. 귀찮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사는 것과 달리 행동은 다정한 사람인 것도 알게 됐다.
분명 지금쯤이면 프레오나의 수도는 새로운 황제를 맞이하느라 우리의 소문은 잠잠해졌을 거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로웨나로 떠나도 진작 떠났을 텐데….
나 자신조차 알 수 없는 마음에, 나와 가까이에 앉아 있는 그를 바라봤다.
그는 무릎 위에 노반을 올리고, 책을 보고 있었다. 경제에 관한 책이었는데, 눈동자가 흐릿한 게 집중해서 보고 있지 않은 것 같다.
멍한 그의 얼굴에 또 무의식적으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젠?”
“네, 미르 님.”
“무슨 생각해?”
내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걸 느꼈는지, 그는 지금껏 읽은 척하던 책을 덮고 물었다.
“좋아서요.”
“뭐가?”
“그냥 지금이요. 한가하고 좋아요.”
그와 함께 하는 순간마다 그동안은 느끼지 못했던, 진정한 삶을 살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하루가 편했다. 꼭 죽음에서 돌아와, 살아 숨을 쉬는 것 같았다.
나는 그를 향해 살짝 웃었다. 그러자 내 웃음을 본 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아… 응, 어… 어! 한가해서 좋다고? 너도 그동안 바쁘게 살았나 보네.”
“그런 편이죠.”
그렇다는 내 대답에 그는 입꼬리를 씰룩거리며 말했다.
“좀 있으면 불안해질걸? 원래 바쁘게 살았던 인간들은 갑자기 한가해지면 초반에는 좋아하지만 점점 불안해하거든.”
“그래요?”
“응, 바쁘게 산 사람들은 바쁜 일상이 습관이 돼서 강박까지 느끼게 되거든. 물론 다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랬어. 뭐라도 해야 할 것 같고, 조금 초조하고, 조급해지고.”
그는 빙그레 웃어 보이며 무릎 위에 앉아 있는 노반의 털을 쓰다듬었다. 노반은 그르렁 작게 울었다.
“그러셨군요.”
“응. 젠, 너도 불안해지면 나처럼 다 좆 ㄲ… 아니, ‘다 상관없어!’라는 생각을 해 봐. 훨씬 나아질걸?”
그는 가끔씩 긴장이 풀릴 때면, 난생처음 듣는 단어를 내뱉는다.
식재료를 부르는 이름도 그렇고, 의미를 유추할 수 없는 단어들이 그의 입 밖으로 자연스럽게 나온다.
그 밖에도 자세히 들으면 티가 나는 어색한 하대나 그에게서 느껴지는 분위기 같은 것들이, 가끔 그가 신과 관련된 미지의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그가 가지고 있는 색은 평범한 인간이 띄고 있는 살구색과는 전혀 다르다.
“네, 그럴게요.”
“사실 너는 내가 말 안 해도 잘할 것 같지만… 그래도 혹시 지루하다거나 전부 부숴 버리고 싶으면 말해 줘.”
살포시 웃음을 짓는 그에게 나도 같이 웃어 줬다.
지루하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다. 오히려 재밌다. 그와 함께 하는 날이면 하루 한 번은 꼭 웃게 된다.
나는 그를 향해 웃어 주고, 그로 인해 웃음을 짓는다.
* * *
사소한 일에도 그가 어떻게 생각하는지가 궁금하고, 그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지가 궁금했다.
처음에는 아무 상관도 없었지만, 점점 그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졌다. 그에 대한 호기심이 늘어간다.
긴히 할 말이 있다는 말로 비어 있는 방으로 그를 불러냈다.
내 앞에 선 그는 긴장을 했는지 눈동자를 이리저리 빠르게 굴렸다. 내가 조금이라도 그에게 위해를 가하려고 한다면, 그는 당장이라도 문밖으로 도망칠 것 같았다.
“미르 님은 누구시죠?”
“때리는 건… 응…?”
그는 내가 말하기도 전에 움츠러들었다. 아무리 화가 나도 내가 당신에게 손을 올릴 일은 없을 텐데.
조금 서운한 느낌이 들었다. 그동안 그가 나와 함께 지낸 순간이 조금 무서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쳤다.
“처음부터 괴리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실례일 것 같아 물어보진 않았어요.”
가만히 그의 반응을 살폈다.
어느 순간 그가 내뿜는 빛이 일렁거리는 것 같아 시야를 가리고 있던 머리카락을 쓸어 올려 자세히 바라봐야 했다.
영혼이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이 사람이 처음이다. 저건 동요하고 있는 건가?
“저도 이제 미르 님과 꽤 많이 친해진 것 같은데, 이런 거 물어볼 사이는 되죠?”
곤란한 질문의 이유를 만들어 냈다. 그런 내 말에 그는 울렁이던 마음을 애써 누르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말했다.
“응, 물어봐도 돼. 근데 다 알고 있지 않아? 세네카 제국의 4황자잖아.”
그는 스리슬쩍 웃으며 대답했다.
그와 함께 지내면서 알게 된 사실이 있다. 그는 황족과는 어울리지 않는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잘 모르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조금 다른 면이 분명히 보인다.
처음에는 세네카에서 볼모로 보내는 황자를 귀족같이 생긴 평민으로 바꿔치기한 줄 알았다. 하지만 그런 것 치고는 귀족의 예의라든가, 교양이 몸에 배어 있었다.
바꿔치기가 아니라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다. 그의 영혼이 바뀐 게 아닐까.
“육체는 그렇겠죠, 영혼은 아닌 것 같지만.”
내 말에 잠잠하던 그의 눈꺼풀이 떨렸다. 유지하고 있던 평정심도 다시 흐트러졌다.
괜한 이야기를 한 걸까 걱정이 됐지만, 그래도 그가 어떤 존재인지, 진정한 그를 알고 싶었다.
“증거는?”
“당신 영혼의 색만 달라요.”
“나만 까만가 보네. 그거 죄를 많이 저질러서 그래.”
그는 내 시선을 피하며 자신의 색이 까맣다고 말했다. 나는 그의 심장께로 손을 올려 환하게 빛나는 빛을 잡아보려 했다.
“아뇨, 빛나요. 보석같이.”
“….”
내 손이 그에게 닿자, 그의 몸이 잠깐 굳어졌다. 그리고 가볍게 쿵쿵대는 그의 심장이 느껴졌다.
그의 두근거림은 그에게 닿은 내 손을 타고 내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심장이 점점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전 영혼의 색을 볼 수 있어요. 인간은 살구색, 마물은 대체적으로 어두운 녹색, 노반은 연한 파란색. 그밖에 다른 종족들도 고유의 색을 가지고 있어요.”
“근데 나는 네가 알고 있는 인간의 색이 아니다. 뭐 그런 거지?”
그의 눈빛에 총기가 돌았다.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어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어렸을 적, 부모님께 이야기했을 때는 공부하기 싫은 어린아이의 투정이라 여기며 가볍게 넘겼었다. 그 이후부터는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것 같아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믿으시네요?”
“못 믿을 건 또 뭐야. 네 말대로 난 인간이지만, 다른 곳에서 왔으니까.”
그는 살며시 웃으며 내게 말했다. 자신은 다른 곳에서 왔다고.
“다른 곳이요?”
“응, 다른 곳.”
“신기하네요. 어떻게 오신 건지 알려줄 수 있어요?”
나는 그의 눈을 빤히 바라보다 심장 위로 올렸던 손을 어깨에서 목, 뺨까지 천천히 올렸다. 그러고는 부드럽게 뺨을 쓰다듬으며 자꾸 피하려는 시선을 내게 맞췄다.
그에 그는 다시금 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너, 악마 알아?”
“알죠. 좋아하진 않지만.”
“걔가 날 데려왔어.”
악마… 그랬구나. 딱히 충격적이진 않았다. 내가 영혼의 색을 보는 것처럼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니까.
그중에서도 악마는 고대에서부터 인간사에 관여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악마를 처단하는 교황청의 권력도 아직 굳건하니, 악마와 관련됐다는 이야기는 확실히 가능성이 있는 일이다.
“…그랬군요.”
발그레 달아오른 그의 뺨이 붉은빛을 내는 말캉한 과일처럼 고왔다. 분홍빛으로 물든 그 부분을 조심히 문지르며 다가가자, 그는 당황하며 자신이 이 세계에 오게 된 경위를 다급하게 쏟아 냈다.
본래 세네카의 4황자는 자신을 괴롭히는 3황자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했고, 프레오나 제국에 볼모로 오는 것을 끔찍이도 싫어했다고 한다. 그런 와중 4황자는 운이 좋게 악마를 만나 계약을 했고, 자신을 괴롭히는 세네카의 3황자를 프레오나의 볼모로 보내 주길 원했지만, 자신이 원하는 결말로는 만들어 내지 못했다. 프레오나의 3황자는 볼모로 오기엔 능력이 출중했고, 4황자가 프레오나에 가지 않으면서도 3황자에게서 벗어나는 방법은 4황자가 사라지는 것뿐이었다. 교활한 악마는 결과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었다.
“교활하네요.”
“악마가 그렇지 뭐. 그래서 악마는 4황자의 영혼을 꺼냈고, 비어 버린 육체를 나로 채운 거야.”
뭐…?
“당신… 계약을 한 거예요? 악마랑?”
“응. 당연히 했지. 두 번이나 했는걸?”
“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악마와 계약을 했다는 그의 말에 걱정이 되면서도 의아함이 들었다.
내 놀란 표정에 그는 살포시 웃으며 답했다. 악마에게 바친 것은 자신의 이름뿐이라고.
악마에게 이름은 기억을 뜻한다. 악마에게 이름을 주면, 그 이름으로 불렸던 시기를 잊어버리게 된다고 했다.
점차 안 좋아지는 내 표정에 그는 ‘영혼’보다 ‘이름으로 불렸던 기억’이 더 싼값이라며 나쁘지 않은 거래였다고 했다.
“이름….”
“걱정돼?”
그는 고개를 내 손바닥에 뺨을 기대고는 갸웃거리며 익살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의 표정에 잠시 웃음이 나올 뻔했지만, 짐짓 단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당연하죠. 악마는 믿을 게 못 돼요. 당신의 언어로 호구라고 하죠? 안 그래도 착해 빠졌는데 교활한 악마와 계약이라니….”
“내가 호구란 말도 썼구나… 들킬 만했네.”
“들키는 건 상관없는 겁니까?”
“응. 따로 숨기라는 말은 없었으니까 괜찮아. 그리고 내가 유리한 계약이었으니까 걱정 마.”
본인이 더 유리한 계약이라고 하긴 했지만…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는 평소에 똑 부러져서 빈틈이 없었지만, 이상한 곳에서 마음이 여려지는 사람이었다. 거절해도 될 법한 무리한 부탁을 들어준다거나, 노반에게 안 된다고 말했음에도 마음이 약해져 져 주는 편이 상당히 많았다.
미심쩍은 내 표정을 확인한 그가, 걱정 놓으라는 뜻에서 말을 덧붙였다.
“따지자면 사기 계약이긴 한데….”
“사기요?”
“나 이름 두 개거든.”
잠깐 사고회로가 멈춘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이 자주 불리던 이름과, 쓰지 않는 이름 중에 쓰지 않는 이름을 줘서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말했다.
이 사람다운 방식이라 생각했다. 오스먼드 2황자 아니, 프레오나의 황제에게 나를 걸고 빠져나갔던 것처럼 악마와도 그와 비슷한 거래를 했다.
영리한 그답게 알아서 잘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럼에도 걱정이 되는 건 마찬가지다. 100년을 살지 못하는 사람과 영겁의 세월을 사는 악마 사이에는 분명 큰 차이가 존재한다.
“악마가 그렇게 쉽게….”
“인간한테 당할 정도면 어지간히 급했었나 봐. 당시 상황에 맞는 영혼이 나밖에 없었다고 그랬거든. 그러니까 내가 악마한테 잡혀간다는 걱정은 안 해도 돼. 난 악마보다 오스먼드가 더 무서워.”
그는 프레오나의 황제를 생각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가 생각하는 무서움의 기준이 나와는 전혀 다르다고 생각했다. 사람은 베어 버리면 그만이지만, 악마와 같은 미지의 존재는 어떻게 대항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기 때문에 만일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그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을까 봐 걱정스럽다.
자신이 악마를 이겼다는 듯한 뿌듯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를 향해 물었다.
“당신이 원래 살던 곳으로 돌아갈 수는 있는 거예요?”
그러자, 그는 잠시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단호하게 이야기했다.
“응.”
아….
긍정을 뜻하는 그의 대답에 어쩐지 마음 한구석이 시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