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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33화 (133/227)

133 젠 이프리트의 이야기 (8)

“자연사하면 돌아가게 해 준댔어. 거의 불가능이지.”

“그러네요.”

해탈한 듯한 그의 말에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런 내 대답이 조금 서운했던 건지, 그는 붉은 입술을 우물우물했다.

“빈말이라도 가능하다고 해 주면 안 돼…?”

“쥐 죽은 듯 이곳에 박혀 있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네요.”

“….”

일부러 그런 건 아니지만 냉담한 말이 나왔다. 자연사든 뭐든 그가 돌아간다고 하니 속이 찜찜하고, 기분이 유쾌하지 않았다.

나는 이 언짢은 기분을 누르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보는 그를 향해 물었다.

“돌아가고 싶어요?”

“응.”

이 언짢은 기분은 도대체 뭐지?

“어차피 죽어야 돌아가는 거면, 지금을 행복하게 보내자고 생각하고 있어.”

“…절대 불가능이네요.”

“그렇지? 인간이 자연사할 확률은 4퍼센트도 안 돼. 더구나 여긴 법도 없고, 전쟁 나면 개나 소나 썰어 대는 세상인데, 제국의 황자라면 더더욱 불가능이지.”

“자연사도 불가능이지만, 당신의 행동이 더 문제입니다.”

나는 그의 뺨을 꾹 누르며 내 마음에 들지 않는 말을 하는 입술을 오므리게 했다. 그러자 그는 오므려진 입술을 뻐끔거렸다.

“제가 영혼의 색을 보지 못했다고 해도, 당신의 독특한 언행으로 눈치챘을 겁니다.”

호구라든가, 겁나, 대박 등등 처음 들어 보는 단어와 언행들을 말하는 거다.

처음에는 특별히 신경 쓰이진 않았지만, 가끔가다 튀어나오는 이 세계의 말투를 듣다 보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들었을 때는 문제가 생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말에 그는 잡힌 입술을 우물거리며 변명했다.

“그건 편해서….”

“저야 악마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니 상관없다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닙니다. 악마와 연관이 된 사람을 교황청에서 가만히 둘 것 같아요?”

“교황청? 여기 교황청이란 것도 있었어?”

그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교황청의 존재에 대해서 물었다.

“모르셨습니까? 4황자의 기억이 전부 있는 것 아니었어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어?”

그는 방금 놀란 것보다 눈을 더욱 크게 뜨며 물었다. 조금만 더 놀랐으면 눈이 튀어나왔을지도 모르겠다.

“기억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살아계실 리가 없으니까요.”

“내가 임기응변이 뛰어나서일 수도 있잖아.”

“임기응변으로는 한계가 있습니다.”

“에이. 난 임기응변으로도 충분히 살았을걸.”

나는 은근 허당스러운 면이 있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러고는 작게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에 한숨을 쉬었다.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그의 뺨을 자유롭게 놔준 다음, 그가 놓친 허점을 이야기했다.

“로이븐 황태자의 이야기를 했었잖아요. 기억이 없었다면 그렇게 자세히 못 말하죠.”

“그렇지…. 뭐야, 그거 떠본 거였어?”

“조금요. 어쨌든 조심해야 한다는 건 다름없어요. 이 사실을 교황청이 알게 되면….”

“알게 되면…?”

나는 스산한 표정을 지으며 뜸을 들였다. 어떻게 말해야 그가 조심성을 갖게 될까 고민했다.

“잡혀가요. 자백할 때까지 고문을 한다는데, 죽는 게 나을 정도로 괴롭대요. 악마랑 연관이 없어도 있다고 거짓으로 자백하고 죽는 사람이 많다네요.”

악신을 섬기는 것에 예민했던 옛날이었다면 모를까, 아마도 지금은 심하게 잡지는 않을 거다. 애초에 악마와 연관이 되어있다는 걸 알아볼 수 있는 방법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가 밖에서의 언행과 태도를 조심할 필요가 있으니 조금 겁을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놀라며 불안해했다.

“헉…! 어떡해? 교황청이 나 잡으러 오면….”

두 눈을 깜빡이며 제 미래를 걱정하는 그를 바라보자 작게 웃음이 나왔다. 그러고는 아직 발그레한 그의 뺨을 잡아 부드럽게 매만지며 말했다.

“제가 구하러 가야죠.”

나는 그와 눈을 맞추며 시선을 교환했다. 그의 투명한 보랏빛 눈에 이채가 돌았다.

잠시 후, 그가 조심스러운 말투로 내게 물었다.

“젠, 너 혹시 나 좋아해?”

좋아한다고…?

그의 물음에 잠시 머리가 하얘졌다. 아무리 이런 쪽에 둔한 나여도 이 질문이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다. 그의 질문은 단순하게 자신을 좋아하냐는 뜻이 아니었다.

예전 같으면 바로 대답할 수 있었을 거다. 난 당신을 그런 의미로 좋아하는 게 아니라고.

하지만….

“…모르겠어요.”

“응?”

나는 그의 눈을 바라봤다.

그의 동공이 조금씩 흔들리고, 내게 잡힌 뺨이 뜨거워졌고, 몸이 얕게 떨렸다. 내 대답을 기다리며 긴장을 하고 있다.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단순하게 그를 ‘좋아하냐’, ‘좋아하지 않느냐’로 묻는다면 당연히 ‘좋아한다’다.

하지만, 그런 의미로 대답한다면….

나는 그의 뺨을 감싼 손을 내려놨다. 차분한 표정을 짓고는 그에게 해 줄 말을 골랐다.

“굳이 제 감정의 정의를 내린다면….”

“….”

차분해진 내 표정에 그의 떨림의 잦아들었다.

“전 당신이 미워요.”

그의 눈에서 작은 물방울이 맺혔고, 이내 밑으로 툭 떨어졌다.

그의 눈물을 보니 가슴 한편이 시렸다. 괜히 모질게 말했나 후회가 들었다.

솔직하게 말해서 내 감정을 모르겠다. 하지만 3자의 시선으로 우리를 바라봤을 때, 내가 그를 미워하는 게 가장 그럴 듯해 보였고, 실제로 조금 얄밉기도 했다.

그 때문에 작위를 잃었고, 가문을 잃었고, 수도를 떠나 북쪽으로 오게 됐다. 그리고 오래 계획했던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 미워할 수 있는 이유로는 충분한 것 같다.

그가 받을 상처가 마음에 걸리지만, 내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해지기 전까지는 조금 골려 주고 싶었다.

그래도 그가 우는 걸 보고 싶진 않았는데.

“울지 마요.”

내 말에 그는 고개를 숙이곤 옷 소매로 빠르게 눈물을 훔쳤다. 그러고는 담담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밉다는 소리 처음 들어봐서 그래. 놀라서 우는 거니까 괜찮아.”

“…”

“미안, 내가 더 신경 썼어야 했는데. 웃긴 질문이었네.”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의 얼굴은 그렇지 않았다. 축 처진 눈과 붉게 변한 눈 주변, 그리고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려는 꾹 다문 입술 때문인지….

“당신을 싫어하진 않아요. 그냥 미울 뿐이지.”

조금 더 골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이상한 취향이 생긴 것 같다.

* * *

그가 외박을 했다.

노반이랑 상점가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았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게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옆에 앉아 있는 마린의 무서운 표정에 걱정한 티를 내기는커녕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분명 마커스가 늦장을 부리다가 오지 못한 걸 겁니다.”

“아마도 그렇겠죠.”

“그리고 황자님이 노반의 의견을 들어준 것도 늦는 데 한몫했을 겁니다.”

마린은 이를 갈았다. 황자님은 자신의 지위를 생각하지 않고 너무 편하게 다닌다는 불평을 했다.

“….”

“노반과 함께 있을 거라 위험하진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걱정되기는 매한가지군요.”

마린은 두 손을 모아 잡고, 무릎 위에 올려뒀다. 그러고는 한곳을 계속 바라보며 입술을 뜯었다.

나는 그런 마린을 향해 물었다.

“많이 걱정되나요?”

“네…. 분명 문제없으신 걸 알지만, 혹시라도 예상치 못했던 일이 벌어져 오지 못하신 게 아닐까란 생각이 듭니다. ”

마린은 크게 한숨을 쉬고는 잡은 손을 더욱 세게 쥐었다.

마린도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가 제 입으로 말하진 않았겠지만, 마린은 세심한 사람이니 그의 말투나 요리 등등에서 이미 그를 파악하고도 남았을 거다.

“그러는 젠 님도 많이 걱정하고 계신가 보네요.”

“네?”

“보고 계신 책이 엉망이 됐어요.”

마린의 말대로, 내가 방금까지 보고 있던 책의 절반이 구겨져 있었다.

아. 언제 이렇게 됐지.

“전 찾으러 가야겠어요. 마린은 쉬세요.”

“안 됩니다! 지금 나가면 위험할 겁니다. 이곳은 다른 곳보다 밤이 어둡고, 산세도 험해서 길을 잃기 십상입니다. 해가 뜨면 찾으러 가세요.”

“문제없어요.”

나는 구겨진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기 위해 재킷을 챙기고 현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마린이 밖으로 가는 문을 막고선,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시는 마음은 알지만, 지금 나가도 찾을 방법이 없습니다. 이미 어딘가로 들어가 주무시고 계실 텐데, 그곳을 어떻게 찾습니까.”

상점가 근처에 있는 여관이나,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아서 마커스의 집이 어디 있는지 물어보면 된다. 시간이 늦어서 머물 곳이 없으니 아마도 여관이 아니면 마커스의 집에 있을 테니까.

“날이 밝으면 가세요. 그편이 나을 겁니다.”

나는 마린의 강경한 태도에 꼬리를 내렸다. 그리고 마린은 날이 밝을 때까지 잠시 눈을 붙이라며 나를 소파 뒤로 밀어냈다.

방으로 올려보내지 않는 걸로 보아 몰래 탈출하지 말라는 뜻 같았다.

마린의 말대로 해가 뜨고 출발했다. 마음 같아서는 마린이 잠들자마자 바로 나가고 싶었지만, 마린은 어지간히도 잠들지 않았다. 오히려 날카로운 단도를 숫돌에 갈며 정신을 집중하려고 했다.

날이 밝자 마린에게 다녀온다는 말을 남기고 가넷과 함께 상점가를 향해 달렸다.

빠르게 달려 도착한 상점가는 장사꾼들이 많아서 그런지 이른 아침부터 나와서 장사 준비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그중 아무에게나 가서 마커스의 집이 어디 있는지 물었다.

상점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지내는 마커스의 집으로 가까이 다가 문을 두들겼다.

다섯 번 두드렸을 때쯤, 금방 잠에서 깬 것 같은 마커스가 문을 열어 줬다.

“누구시… 헉! 이, 이프리트 경!”

“황자님을 모시러 왔는데, 이곳에 계시나요?”

마커스는 졸린 눈을 비비다가 내 얼굴을 보곤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나는 그를 향해 최대한 상냥한 말투로 말했다. 하지만 표정은 그렇지 못했는지, 마커스는 눈동자를 이리저리 돌리며 눈치를 봤다.

“계시냐고 물었습니다.”

“아, 네! 넵! 계십니다. 지금 황자님께선 주무시고 계실 텐데….”

마커스는 말끝을 흐렸고, 그가 있을 방문과 나를 번갈아 가며 바라봤다.

아직 조용한 게 한창 잠에 빠져 있는 것 같다.

“앉아서 기다릴 테니 깨우지 말고 안내 부탁해요.”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마커스를 향해 말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인 뒤 나를 안으로 들여보내 줬다. 마커스는 내게 자리를 안내해 주고 나서 주방으로 쪼르르 들어가 커피를 내왔다.

“조, 조금만 기다리시면 나올 겁니다.”

“그러지 말고 앞에 앉아 보세요.”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숙이고 떠나려는 마커스를 잡고 앞에 앉혔다. 나는 할 말이 아주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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