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젠 이프리트의 이야기 (9)
‘그’는 사람을 끌어들이는 매력이 있는 사람이다.
상점가 꽃집 청년도 그렇고, 북쪽 저택에선 어린 영애와 공자, 그리고 정체 모를 어르신과 능청스러운 남자까지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
심지어는 세네카에서 온 ‘4황자’의 친구인 필릭스 에반스터 경에게도 무리 없이 자신의 본래 인격을 드러내며 친해졌다.
이 세계의 사람이자 세네카 출신인 그가 이곳에서 자신의 편을 구축하는 것을 보면서 빠른 적응에 다행이다 싶다 가도, 한편으로는 언짢은 마음이 들었다.
“고민이 있으십니까?”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는 내게 장식장의 먼지를 털던 마린이 말을 걸었다.
고민… 아마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을 마린에게 말한다면 아주 크게 혼이 날 것이다. ‘우리 황자님이 어디가 부족해서 밀어내시는 겁니까!’라고 소리치는 마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아니에요. 그냥 조금 피곤한 것뿐입니다.”
“젠 님도 피곤하실 때가 있군요. 사실 젠 님은 항상 굳세 보이셔서 강철로 만들어진 인간이라 생각했었어요.”
마린은 작게 하하 웃으며 다시 장식장에 먼지를 털었다.
어제저녁, 그의 고백을 돌려서 거절했다.
그가 내게 느끼는 감정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고백은 억지로 들켜서 한 고백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에반스터 경이 그의 감정을 떠보지 않았더라면, 그는 나를 그런 의미로 좋아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을 거다. 진지하게 자신의 감정을 생각해 보고, 그만의 답을 내렸겠지.
나는 그가 후회하지 않게 진중하게 생각해 봤으면 했다. 나를 사람으로서 좋아하는 건지, 남자의 감정으로 좋아하는 건지. 만일 그렇다면 세간의 시선 속에서 버틸 수 있는지도 진지하게 생각해 줬으면 했다.
그리고 그의 감정이 확실해지면….
“오늘은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장식장의 먼지를 전부 털어낸 마린이 자신의 고개를 이리저리 꺾으며 몸을 풀며 말했다.
“어디 불편한 곳이라도 있나요?”
“그런 뜻이 아니고, 음… 조금 성가신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성가신 일?
미르 님만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면, 성가신 일이 일어날 확률이 적어진다.
“미르 님이 나오시지 못하게 그의 방문을 막아야겠군요.”
“하하, 내부는 그렇게 해결하면 되지만… 이건 외부의 문제일 수도 있습니다.”
“외부의 문제라뇨?”
“에반스터 경이 어젯밤 일찍 떠나신 이유와 연관이 돼 있을 수도 있습니다. 원래 예정은 오늘 아침이었으니, 일부러 계획보다 더 일찍 돌아가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젯밤 미르 님이 자고 있을 때, 에반스터 경이 세네카로 돌아갔다. 떠나기 전 그는 ‘그대가 그를 잘 지켜봐 줬으면 해. 많이 씩씩해진 것 같지만… 속은 정말 여린 애야.’라며 내게 미르 님을 부탁했다.
나는 그런 에반스터 경에게 ‘그는 당신이 알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당신은 제게 그를 부탁하실 입장이 되지 못합니다.’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상한 소유욕에 휩싸여 감정에 휘둘리는 어린아이 같은 찝찝한 기분이었다.
“마린의 예측이 맞는 것 같네요.”
본능적으로 멀리서 거대한 기운이 느껴졌다. 무언가가 몰려오고 있는 듯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마차를 이끄는 말발굽의 소리, 수많은 기사가 일동 정연하게 발을 맞춰 걷는 소리가 저택 안까지 다 들렸다.
“밖에 뭐야!”
역시 이종족답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노반이 내려왔다. 그러고는 곱게 자고 있던 자신을 깨웠다는 것에 화를 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노반이 혼자 내려오는 걸로 보아, 미르 님은 아직 잠을 자고 있는 듯했다.
“노반, 미르 님이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막고 계세요. 가능하다면 미르 님이 상황을 눈치채지 못하게 해 주면 더 좋고요.”
그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지만, 그럴 가능성이 현저히 낮았다. 이렇게 시끄러운데 잠에서 깨지 않을 리도 없고, 미르 님의 성격으로 껄끄러운 일은 자신이 다 처리하려 드니까 무조건 밖으로 나오려고 할 거다.
노반은 그런 미르 님을 가능한 막아 주며 시간 벌어야 한다.
“왜? 쟤들이 뭔데?”
“프레오나 황실에서 온 자들 같아요.”
운이 나쁘다면 황제가 왔을 수도 있고.
황실에서 왔다는 내 말에 마린은 쥐고 있던 먼지떨이를 두 동강을 냈다. 저렇게 쉽게 부서지는 물건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미르가 방 밖으로 안 나오게 하면 되는 거야?”
“네, 부탁할게요.”
“알았어.”
발을 쿵쿵 구르던 노반이 다시 올라갔다.
노반이 올라가고 난 뒤, 바깥의 소음이 멈췄다.
나는 길게 숨을 내쉰 다음, 정중하게 옷매무새를 다듬고 밖으로 나갔다.
“오랜만이군.”
밖으로 나가자, 저택 주위를 둘러보는 오스먼드 황제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뒤로 한 부대의 기사단이 기립하고 있었다.
황제가 직접 찾아오다니….
“프레오나의 새로운 태양을 뵙습니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가 내 인사를 받아 주자, 나는 고개를 들고 오스먼드 황제의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 먼 곳까지는 어쩐 일이십니까.”
“그대가 전해 준다던 소식이 없어 궁금하기도 했고, 그대들이 이곳에서 어떻게 지내나 확인도 할 겸 왔네.”
오스먼드 황제는 나를 한번 바라보고,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저택을 바라보았다. 내 눈에는 황제가 그를 찾는 것 같았다.
하지만 저택에선 나를 제외하곤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황제는 노반이 가꾸는 텃밭으로 시선을 돌리곤 혀를 찼다.
“식물도 직접 키우는 건가? 꽤나 바쁘게 지내는군.”
“예, 하다 보니 계속하게 됐습니다. 그나저나 폐하께선 이곳에 어쩐 일로….”
“본론은 들어가서 하면 좋겠군.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오스먼드 황제는 내 이야기를 중간에 끊어내고, 저택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를 나누자고 했다.
“방금까지 저택 안을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아직 완벽하게 마무리를 하지 않아 폐하께서 들어가실 만한 곳이 못 됩니다.”
“문제없어. 곧 크로스반 영지에도 가야 하니, 이곳에서 오래 머물지 않을 거니 걱정 말게.”
“….”
오스먼드 황제는 안내가 필요 없다는 듯, 내가 앞장서기도 전에 자신의 발로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따라 들어가려는 시종을 제재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간 오스먼드 황제는 현관 바로 앞에 서서 청소할 것 없이 깨끗한 집안을 쭉 둘러봤다.
그때 차분한 드레스를 입은 마린이 방 밖으로 나와 오스먼드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프레오나의 태양을 뵙습니다. 저는 로테스 남작가의 마린 로테스라 합니다.”
“그래, 만나서 반갑네.”
“바로 마중을 나가지 못한 점 사죄드립니다. 방금까지 청소를 하는 중이라 저택이 많이 어질러져 있었습니다. 폐하께서 신경 쓰시는 일 없게, 정리를 하고 모시려 했습니다.”
마린은 오스먼드 황제에게 청소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덕분에 청소를 하던 중이었다는 내 변명이 문제 제기가 되지 않았다.
“아니, 미리 연락하지 못하고 불쑥 찾아온 내 잘못도 있어.”
오스먼드 황제는 마린에게 괜찮다며 신경 쓰지 말라 하곤, 앉을 곳을 찾으며 소파를 빤히 바라봤다. 그리곤 잠시 미간을 찌푸리곤. 소파 가까이에 다가가 무언가를 집어 들어 올렸다.
“동물을 키우나?”
황제가 집어 든 것은 푸른빛이 도는 흰 털이었다.
저건 노반의 것이다. 항상 저 소파에 앉은 미르 님의 무릎 위로 올라가 신나게 뒹굴더니 오늘 털갈이를 했나 보다.
“작은 여우 하나를 키우고 있습니다. 혹, 신경 쓰이신다면 새로운 의자를 가져오겠습니다.”
“됐네, 상관없어.”
오스먼드 황제는 잡은 털을 바닥에 쓸어 버리곤, 그 소파에 앉았다. 마린은 그를 위해 홍차를 내왔고,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폐하, 황자님께서는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다. 명하신다면 황자님에게 폐하께서 도착하셨다 이르겠습니다.”
“4황자를 보러 온 게 아니니 괜찮네. 내버려 두게.”
“네, 알겠습니다.”
오스먼드는 손을 휘저으며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곤 피식 웃음을 지으며 나를 바라보곤 이야기했다.
“4황자가 많이 피곤한가 보군, 전에는 타루스를 피해 다니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이른 시간에 일어났는데 말이야.”
나는 가만히 입을 다문 채, 오스먼드 황제가 본론을 꺼내길 기다렸다.
“기억하고 있겠지? 이번 해 겨울이 오기 전, 가야 하는 곳을.”
오스먼드 황제는 속 안에 품고 있던 두루마리를 건넸다.
“이게 무엇입니까.”
“풀어보게.”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두루마리를 받았다. 두루마리를 펼치자, 이프리트가의 문양이 찍힌 제안 서류의 내용이 한눈에 들어왔다.
내용은 이랬다. 나는 이프리트가(家)가 직접 선택한 용병으로, 마물 토벌에 출정할 수 있는 특혜를 준다는 것이다.
반갑지 않은 제안서였다.
“용병이란 위치는 그저 형식만 따르는 거니 기분 나빠하지 말게.”
“아닙니다.”
이 제안서가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가 몇 가지 있다. 나를 용병으로 칭하는 건 상관없다.
문제는 이것이었다. 나를 이용하고 버렸으면 그대로 버려 둘 것이지 다시 찾아와서 제국을 위한 일을 하라는 것, 그리고 토벌을 하는 동안 그와 떨어져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눈을 떼면 사고를 칠까, 어디 다치지는 않는지 걱정이 되는 사람을 두고 몇달을 떨어져 지내야 한다.
“다음 해는 부르지 않겠다만, 이번 해까지는 그대가 와줬으면 해.”
마물 토벌은 각 귀족 가문마다 빠짐없이 참여를 해야 했다. 허가를 받은 사병이 있다면 사병을, 사병이 없다면 그에 걸맞는 자금을 제공해야 한다.
그것이 프레오나에서 귀족으로 살아가기 위한 의무다.
이전 해까지 이프리트 가문은 사병도 있고 자금도 있었지만, 매년 나 홀로 참여했었다. 혼자여도 충분했으니까.
타루스 황태자의 숨을 끊은 그 날 이후로 나는 이프리트가 아니게 되었다. 그 말은 토벌에 나가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제가 가지 않는다면 받게 될 불이익이 있습니까?”
“그대에겐 없겠지만, 이프리트 가문에겐 있겠지.”
작년 이프리트 가문은 자금과 사병 대신 나를 내보내겠다는 서류를 제출했었고, 그것에 맞춰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대가 빠지면 계획에 차질이 생겨.”
“….”
“넉넉하게 석 달이면 되는 기간을 더 늘리고 싶진 않아.”
황제는 내 눈을 바라보며 압박을 가했다. 순순히 말을 들으라는 듯한 압박이었다.
그때, 위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그가 이곳으로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오스먼드 황제를 마주했지만, 황제는 그가 있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이군, 4황자.”
그를 바라본 황제의 눈빛에 이채가 돌았다.
“폐하…”
황제를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또다시 마음이 언짢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