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젠 이프리트의 이야기 (10)
속 안에 화가 가득 차면 오히려 정신이 차가워질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면서까지 오스먼드 황제를 협박했다. 상처에서 터져 나온 그의 피가, 흐르고 흘러 내 발끝에 닿았을 때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일을 저지르고 나서 내 눈치를 살피는 그에게 냉담하게 굴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빌어먹을 감정을 애꿎은 그에게 풀어낼 것 같았다.
화가 났다.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자신의 목에 검을 들이밀고, 살을 깎아 가는 짓을 벌여 댔다. 그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어찌 보면 그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가질 수 없었다. 그에게 화를 내고 싶었고, 다시는 그러지 말라며 큰소리를 칠 뻔했다.
그 자리에 굳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내가 초라하고 원망스러웠다.
조금만 더 지체했다면 피를 너무 많이 흘려 그의 목숨이 위험했을 것이다.
만약 그가 마법을 쓰지 못했더라면, 혹시라도 그의 마법이 통하지 않았더라면, 같은 불쾌한 가정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똑똑, 똑똑똑, 똑똑똑똑.
그가 문을 두드렸다. 아직 그와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다. 가시가 돋아 있는 것 같은 속을 진정시키고 천천히 대화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는 열어 줄 때까지 문을 두드리려는지, 똑- 똑- 똑똑똑- 똑똑- 같은 이상한 신호를 보내며 끊임없이 두드렸다.
저 문을 열면, 결국 내 마음이 약해질 것을 알고 있다.
그가 아무리 나쁘고 무모한 짓을 해도, 그와 시선을 맞추고 대화를 하다 보면 부정적인 감정들이 사라진다.
나는 결국 저 문을 열게 될 것이란 걸 알고 있다.
* * *
나를 따라 황실로 가겠다는 그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내게 있어 황실은 눅눅하고 질척이는 더러운 감정의 중심이다. 그런 곳에서 그와 조금이라도 함께 있으면 머리가 맑아지고 편해지니 나야 좋지만, 그가 힘들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황제가 이용하는 길이라고 해도, 피곤하긴 매한가지일 거다. 게다가 황실을 싫어하는 건 그도 마찬가지라, 가기 싫지만 나를 위해 억지로 따라가는 느낌이라 마음이 쓰였다.
“젠!”
그는 어느 시종과 대화를 하다, 신이 난 표정으로 내게 다가왔다.
“네, 미르 님.”
“저기 있는 단발머리 시종한테 들었는데, 이 마을 영지민들이 직접 관리하는 온실이 있대.”
그는 온실이 있다는 소식이 기뻤는지, 어깨를 들썩이며 나가는 문을 가리켰다.
“가 볼까요?”
“응! 가자! 노반이랑 마린은 여기 있겠대. 둘이 어제 보드게임 하다가 늦게 자서 아직 피곤한가 봐.”
거짓말일 거다. 노반은 낮잠을 자 줘야 하는 아이고, 마린은 그런 노반을 봐 줄 겸 우리를 위해 잠시 자리에서 빠져 주려는 걸 거다.
뭐가 됐든 즐거워하는 그의 손을 끌어 밖으로 나갔다.
나는 가넷을 타고 가려 했지만, 시종이 말하길 작은 영지라 걸어서도 충분하다고 했다.
“광장이 있는 곳 바로 중앙에 있다고 했어. 아치형으로 큰 온실이라고 했는데… 어! 저기, 저거인가 봐.”
그가 가리키는 손가락 끝에는 하얀 유리로 뒤덮힌 아치형 건물이 있었다.
그 건물을 향해 가까이 다가가자, 은은한 허브 향이 코끝에 맴돌았다. 그리고 내 옆에선 그는 눈을 반짝이며 온실 입구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그와 걸음을 맞추며 들어간 온실은 생각보다 제대로 갖춘 시설이었다. 이프리트가(家)의 온실보다 더 잘 되어 있었다.
“와, 축구 경기장인 줄… 엄청 넓다.”
그의 말을 따르자면, 이곳이 축구 경기장처럼 넓다고 했다.
우리보다 먼저 온실 안으로 들어 온 영지민들은 일자로 쭉 나 있는 길을 한 줄로 걷고 있다. 우리도 그 줄에 맞춰 걸었다.
온실에는 파릇파릇한 초록 풀 말고도 색색의 꽃이나 과일이 열려 있는 나무도 있었다.
나는 다양한 식물들을 보며 건강해지는 느낌을 받았지만, 식물에 흥미가 없어서인지 재미는 없었다. 그래서 식물을 보기보단 식물을 보고 좋아하는 그를 바라봤다.
“여기가 대단한 게 뭔 줄 알아?”
“뭔가요?”
“다 공짜래. 필요하면 뜯어가도 괜찮대.”
그는 포식하는 표정을 지으며 히히 웃었다. 그러고는 처음 보는 새로운 약초나 쉽게 볼수 없는 약초가 보이면 한 움큼 뜯어 종이로 감싸 주머니에 넣었다.
“연구하신다고 무리만 하지 마세요.”
“응, 당연하지.”
내 말에 건성으로 대답한 그는 빨간 꽃봉오리가 피어 있는 청록빛 식물을 뜯으려 했다. 하지만 식물의 뿌리가 꽤 단단한지 그가 이무리 힘을 주어도 뽑히지 않았다.
“도와드릴까요?”
“아니야! 이정도는…! 나도…! 할…수 있어!”
그는 식물을 잡은 손에 힘을 꾹 주면서 이를 앙다물었다. 젖 먹던 힘까지 전부 쓰려는지 말간 얼굴이 곧 터질 것 같이 붉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영지민들도 하나둘 이쪽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삽으로 하루종일 파야 얻을 수 있다는 단단한 ‘카르초’의 뿌리를 곱상한 미르 님이 뽑을 수 있을지 없을 지 내기까지 하는 분위기였다.
“절대 못 뽑아. 나도 못 뽑는데 저렇게 여리여리한 청년이 어떻게 뽑아.”
“왜, 뽑을 수도 있지. 뿌리가 헐렁한 카르초가 있을 수도 있잖아.”
“아서라. 뿌리가 헐렁한 카르초가 어딨어! 나도 절대 못 뽑는다에 오늘 밤에 마실 술잔을 걸겠어.”
“뭐여, 그대들 내기하는 것인가? 그럼 나도 참가하지. 난 뽑는다! 근성이 대단한 청년에게는 카르초도 질 수 밖에 없지.”
“난 못 뽑는다!”
어느새 그의 뒤로 몇십 명이 되는 영지민들이 모였고 내기 판은 점점 커져 갔다. 돌아가는 상황을 들어보면 뽑는다가 3할, 못 뽑는다가 7할이었다.
영지민들의 열렬한 성원에 힘입어 카르초를 더욱 열심히 뽑으려는 그의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평소 같았으면 쓸데없는 승부욕이라며 포기했을 테지만, 어지간히 갖고 싶은 약초였는지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때, 붉은 허리띠를 맨 남성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그대는 어디에 걸겠소?”
“내기는 사양하겠습니다. 괜찮아요.”
“그러지 말고 한번 걸어 보시오. 저기 으스대고 있는 친구가 이 영지에서 가장 맛있는 술을 팔고 있는 사람인데, 만일 저 청년이 맨손으로 카르초를 뽑는다면 오늘 술은 전부 공짜로 푼다고 했소.”
붉은 허리띠를 맨 남자의 말을 들었는지 열심히 카르초를 뽑고 있던 그가 말했다.
“뽑을 수 있다에 걸어! 꼭 뽑아 줄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카르초가 뭐라고 저렇게 열심히 뽑으려 드는 건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가 뽑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궁금했다.
“그래요! 저 청년이 카르초를 뽑지 못한다면, 우리 집 돼지 4마리를 잡아 잔치를 열겠습니다!”
술을 걸었다던 남자의 반대편에 있던 여자가 소리쳤다. 그에 온실 밖에 있던 영지민들도 너도 나도 모여들어 내기의 판이 더 커졌다.
그가 카르초를 뽑는다면 영지민들의 저녁은 술로 배를 채우는 즐거운 저녁이 될 것이고, 뽑지 못한다면 돼지로 배부른 저녁을 보내게 될 것이다.
“난 뽑는다에 걸겠습니다.”
나는 뽑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뽑지 못할 것이었으면 그는 진작 포기했을 것이다.
붉은 허리띠를 맨 남자는 밝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도 뽑는다에 걸었던 사람인지 그를 향해 힘내라는 격려를 보내 주고 영지민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 보니 그의 미모를 보고 하나둘 멈췄던 사람들이 모여 이 판이 시작된 것 같았다.
“어어?”
한 아이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영지민들이 웅성거렸다. 그가 잡은 카르초가 들썩이며 곧 뽑혀져 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두세 번 크게 힘을 준 그의 손에서 1m가 넘는 카르초의 굵은 뿌리가 줄줄이 뽑혀져 나왔다.
덕분에 중심을 잃은 그의 몸이 비틀거렸고, 나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몸을 받쳐 줬다.
“이거 봐!”
그는 내게 기대어 있는 상태에서 손에 꽉 쥐고 있는 카르초를 들어 보였다.
그에 뽑는다에 걸었던 영지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오늘 술독 한번 오르겠구만~!”
“어이, 폰차! 오늘밤 그대의 헛간이 전부 털릴 테니 마음의 준비하시게!”
그는 내게 안겨서 신나 하는 영지민들을 보며 슬그머니 웃고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를 빤히 바라봤고, 내 시선을 느낀 그가 기뻐하며 내게 말했다.
“어때? 나 대단하지. 하,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이렇게 안 뽑힐지 누가 알았겠어.”
“아주 멋지셨어요.”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아주 환하게 웃었다. 그 모습에 내 마음이 살랑였다.
나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의 얼굴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에게만 들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지만 반칙이에요. 마법을 쓰셨잖아요.”
그는 내 말을 듣고 잠깐 멍하게 있었다. ‘들킬 줄 몰랐는데!’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지민들은 자기네들끼리 신나선 오늘 밤 잔치를 열자는 소리를 하며 우리를 신경 쓰지 않았다.
곧이어 정신을 차린 그는 내 목에 자신의 팔을 감고 내 얼굴을 자신에게 가까이 끌어당긴 다음 내 귓가에 속삭였다.
“마법을 쓰지 말라는 법도 없었잖아.”
“그건 또 그렇네요.”
나는 뿌듯하게 웃고 있는 그를 제대로 세워 줬다. 그러고는 열심히 카르초를 뽑느라 빨개진 그의 손을 부드럽게 매만졌다.
“아프진 않으세요?”
“응, 안 아파.”
빨개진 그의 손 위로 내 손을 얽혔다. 나는 그의 손을 간지럽혔고, 그도 나의 손을 간지럽혔다. 그렇게 우리는 깍지를 낀 채 서로의 손가락을 잡아당기고 쓸었다.
그와 가벼운 손장난을 하며 이야기 하고 있을 때, 뒤에서 어떤 아이의 소리가 들렸다.
“헙…!”
풍성한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묶은, 15살은 돼 보이는 여자아이가 우리를 바라보며 입을 막았다.
그는 나와 얽힌 손가락을 풀어내고, 어린아이를 향해 자신의 검지로 ‘쉿’ 입을 막았다.
그에 고개를 끄덕인 아이가 친구들이 있는 곳으로 쫄래쫄래 도망갔다.
“반칙한 거 걸렸나 봐.”
그는 키득키득 웃으며 아이가 사라진 곳을 바라봤다.
그것 때문에 놀란 게 아닌 것 같은데…. 아무렴 어떤가.
“슬슬 돌아갈까요? 노반이 일어났을 거예요.”
“아, 응. 돌아가자. 카르초도 오늘 저녁에 먹으려면 지금 준비해 둬야 해.”
그는 굵은 뿌리가 덜렁덜렁거리는 카르초를 뿌듯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 그를 향해 물었다.
“이건 약초인가요?”
“응, 약초야. 이 뿌리를 끓여서 마시면 눈이 밝아지고, 혈액순환도 좋아지고… 그리고….”
뺨을 조금 발그레하게 붉히며 말을 늘어트리는 그를 향해 다시 한번 물었다.
“그리고?”
“……정력에 좋대.”
입술을 꾹 다문 그의 걸음이 점점 빨라졌다.
나는 부끄러워하는 그의 걸음에 맞춰 걸으며 장난스레 물었다.
“아, 그게 필요하세요?”
정력이 필요하냐는 내 말에 그는 입을 뻐금뻐금 거리다 소리쳤다.
“너… 너는 몰라…! 방금 건강하지 못한 한 남자의 자존심이 뭉개졌어!”
더욱 빠르게 걷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잠시 멍해졌다. 건강하지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