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136화 (136/227)

136 젠 이프리트의 이야기 (11)

그와 함께 황궁에서 보내는 나날은 큰 탈 없이 평온했다.

아, 생각해 보니 아예 없지는 않았다. 주제를 모르는 잔챙이 하나가 거슬린다 싶더니, 작은 이빨을 숨기고 있던 그 사람에게 호되게 당했다.

로테 별궁에서 주방장으로 일하고 있던 랄프라는 잔챙이는 그를 향한 온갖 모욕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로테 별궁에 있는 모두는 아름답고 선한 미르 님에게 동화되어 그를 좋아하고 아낄 줄 알았지만, 인간관계에는 당연하게도 예외가 존재한다.

내가 놀란 것은 그 예외의 행동보다 그런 모욕을 듣고도 아무런 타격이 없던 그였다.

그가 상처받을 때는 붉은 입술이 안으로 조금 말려 들어가며 눈 끝이 살짝 처진다. 미르 님 자신은 모르겠지만, 내가 그에게 퉁명스럽게 굴거나, 혹은 내가 그의 마음을 거절할 때, 그는 어김없이 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달랐다.

잔챙이는 말했다.

[그러고 보니 세네카의 황자가 웬만한 계집들보다 이쁘게 생기긴 했지. 전에 스치듯 봤는데 사내새끼였는데도 섰다니까. 살짝 웃는 게 어찌나 야릇하던지, 그 음탕함을 너네도 봤어야 해. 그 황자랑은 한 번쯤 같이 뒹굴어도….]

잔챙이는 그를 향한 모욕적인 언사를 지껄였고, 그는 자신을 향한 잔챙이의 모욕적인 언사를 듣고 있는 와중에도 무표정과 다름없는 얼굴로 가만히 듣기만 했다. 그는 확실하게 상처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동요를 한 것은 나였다.

검집에 금이 갈 정도로 잔챙이를 패긴 했지만, 솔직한 마음으로는 그 잔챙이의 육신을 잘게 잘게 토막 내서 마물의 먹이로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잔챙이의 뒤를 받혀 주고 있는 신분이 그렇게 가볍지만은 않았다.

대놓고 짓밟는 방법은 안 된다. 은밀하게 그 잔챙이의 뒷배를 무너트려야 한다. 나는 계획을 정리한 서신을 한나에게 보냈다.

누이가 있다는 건 이런 때 좋은 것 같다.

내가 직접 할 수도 있지만, 마물 토벌을 위한 기사들의 훈련이나, 미르 님을 노리고 있는 다른 시선들을 경계하느라 시간을 내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하찮은 일로 그와 함께할 시간을 더 이상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이프리트 경.”

기사들의 훈련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와중, 뒤에서 익숙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남자를 확인했다.

“무슨 일입니까.”

“아니, 혹시 한가하시면 제 연습 상대가 되어 주셨으면 해서 말입니다.”

남자는 넉살 좋게 하하 웃으며 말했다. 그는 프레오나 제2기사단장인 레오스 경이었다.

몇몇 기사들은 황족을 살해하고 유배를 당한 나를 기피했고, 몇몇 기사들은 망나니 황태자 타루스를 세상에 사라지게 해 줘서 감사하다며 이렇게 이따금씩 말을 걸어왔다.

그중에서도 레오스는 내가 유배를 당하기 전과 후가 다름없는 사람이었다.

사람과 교류를 하지 않았던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던 끈기가 있는 기사였다.

나는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고, 그는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혹시 바쁘시다면… 나중에….”

“아닙니다. 옆으로 가시죠.”

나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검을 챙겼다.

“와, 오길 잘했네요. 저희 2기사단의 훈련이 일찍 끝나서 혹시나 해서 와 본 건데.”

“훈련이 벌써 끝나셨습니까?”

“아, 네. 저희는 숙련된 기사들이라 체력 증진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레오스 경과 나는 하는 일이 다르다.

레오스 경은 자신의 소속인 제2기사단을 이끌고 있다. 이미 잘 훈련된 기사들이라 기사단을 이끌고 가는 데는 큰 문제가 없어 보였다.

반대로 나는 기사의 신분이 아니고, 딱히 훈련이 필요하지 않았기에 한가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정예 기사단에 들지 못하고 떨어져 나간 신입 기사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게 얼마나 귀찮은 일인가 하면, 신입 기사들은 검을 잡는 방식부터 다시 가르쳐줘야 한다.

10분 이상 검을 들고 있으면 팔을 덜덜 떠는 놈도 있고, 휘두르는 것과 찌르는 것만 하면 될 줄 아는 놈, 그리고 어디서 배워 왔는지 모를 이상한 검술을 펼치는 놈도 있다.

한 명 한 명 고칠 점을 잡아 주니, 이제 겨우 간신히 대열을 맞추기 시작했다.

나는 나와는 달리 숙련된 기사단을 맡아 훈련이 빨리 끝난 레오스 경에게 말했다.

“부럽군요. 저들은 아직 멀었는데.”

“이프리트 경의 일이 고된 걸 알고 있습니다. 이제 보니 처음 기사 작위를 수여했을 때보다 많이 기사다워졌군요.”

당연하다. 그동안 잠도 재우지 않고 완벽하게 될 때까지 훈련을 시켰으니. 기사가 되길 포기하거나 의자 없는 나약한 자들은 진작에 빠지고 없다.

“노력했으니까요. 다들 열심히 했으니 레오스 경의 기사들과 붙어도 쟁쟁할 겁니다.”

“그런가요? 저희도 많이 분발해야겠군요. 하하.”

레오스 경은 좋은 사람이다. 방금 이 대화를 다른 기사단장과 했다면 어디 신입 기사들과 자신의 용맹한 기사단을 비교하느냐며 역정을 냈을 거다.

“오늘 훈련을 마쳤다고 했으니, 지금 레오스 경은 한가하신 겁니까?”

“예…? 아, 예! 지금은 한가합니다. 내일은 예정된 훈련도 없어서 밤새도록 검을 맞댈 수 있습니다.”

“아, 밤새도록은 제가 힘듭니다. 절 기다리는 사람이 있거든요.”

나를 반겨 주는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수마의 빠져 잠들었을 때를 제외하곤, 그는 항상 돌아오는 나를 반겨 줬다. 내가 일정을 끝내고 별궁 안으로 들어가면, 그는 하던 일을 멈추고 가까이 다가와 오늘도 수고했다며 밝게 웃어 줬다.

그러고는 내가 없어서 많이 심심했다고 작은 투정을 부렸다.

저녁에 늦게 돌아오면 저녁밥을 같이 먹지 못해서 서운하다고 했고, 일찍 들어오면 저녁밥을 같이 먹게 돼서 만족한다고 했다.

내가 돌아오면 식사의 여부부터 챙기는 그 덕분에 전에는 3일에 한 번 먹을까 말까 했던 식사를 이제는 하루 한 끼는 꼭 먹게 되었다.

그가 보고 싶어졌다.

“레오스 경, 저랑 내기하지 않겠습니까?”

“내기요?”

“네, 제 몸에 레오스 경의 검이 한 번이라도 닿는다면, 레오스 경이 원할 때마다 검을 맞댈 상대가 되어 주겠습니다.”

내 말에 잠시 입을 떡 벌린 레오스 경이 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합을 맞춰 달라고 10번 물어보면 9번을 거절했었다. 그랬었기에 ‘원할 때마다 검을 맞댈 상대가 되어 준다’는 내 제안은 그의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었을 것이다.

“정말입니까?”

“예, 대신 2시간이 지나도 제 몸에 경의 검이 닿지 못할 시에는….”

“시에는…?”

이런 내기를 걸어도 되는 건가 잠시 고민했지만,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내일까지 저들의 훈련을 레오스 경에게 맡기겠습니다.”

한마디로 레오스 경에게 훈련을 떠넘긴다는 거다.

내 말에 레오스 경은 잠시 멍해졌고, 곧이어 정신을 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설마 2시간 내내 제 검을 전부 피할 수 있겠습니까? 저도 실력 있는 기사이니, 한번은 닿을 수 있을 겁니다.”

자신만만한 레오스 경에 고개를 끄덕인 채, 검을 뽑았다.

* * *

“젠! 오늘 엄청 늦게 올 거라면서, 빨리 왔네?”

어둠이 찾아온 늦은 밤, 자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그는 방바닥 한가운데에 앉아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제 일을 대신 해 주겠다는 착한 사람이 있어서요. 뭐 하고 계셨어요?”

“아, 약초 다듬고 있었어. 오스먼드한테 온실에 들어가게 해 달라고 떼쓰고 왔거든. 도서관도 출입이 가능하고, 황실 재상이 일하는 방도 가능하고, 오스먼드 개인 금고도 가능하면서 온실만 출입이 불가능하다는 게 말이 돼? 얘 일부러 나 놀리려고 그러는 게 틀림없어. 진짜 마음에 안 드는 놈이야. 정이 가려고 해도 안 가.”

그는 이마에 주름이 지도록 찡그리며 약초를 쥐고 있던 주먹을 더욱 꽉 쥐었다.

하루 종일 그와 함께 있었을 오스먼드 황제를 생각하면 속이 울렁였다. 내겐 당장 하지 않아도 되는 일을 시키면서, 자기는 미르 님과 시시덕거렸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밥은 먹었어? 어제 안 먹었으면서 먹었다고 거짓말 쳤던 거 다 알고 있어. 어제는 밥 먹을 시간도 없이 바빴다며?”

이런… 들켰나.

“네, 오늘은 간단하게 빵을 먹었어요. 어제도 간단하게 먹을 시간 정도는 났었어요. 그래서 미르 님은 오늘 온실을 다녀오신 건가요?”

“말 돌리긴… 응, 이것저것 많더라. 나한테 없는 것만 가져왔어.”

그는 제 앞에 놓인 약초들을 내게 보여 줬다. 그의 얼굴보다 더 큰 바구니 안에 이런저런 약초들이 짓이겨져 있었다. 그리고 이 많은 걸 전부 짓이기느라 꽤 힘을 썼는지 그는 뿌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잘했다고 칭찬하라는 것 같았다.

“열심히 하셨네요.”

“응, 완전 열심히 찧었어. 오늘 낮부터 계속 이러고 있었더니 이젠 오른팔에 감각이 없는 것 같아.”

그는 오른팔을 내 쪽으로 뻗고는 덜덜 떠는 시늉을 했다. 그에 나는 그의 팔을 조심히 그러잡고 아프지 않게 살살 주물렀다.

“이쯤 되면 근육이 붙을 법도 한데….”

“그러니까. 완전 저주받은 몸뚱이 같아. 열심히 움직여도 체력이 안 느니까 운동하기도 싫은 거 있지?”

“그래도 해야 해요. 미르 님의 말에 따르면 엄청 지금 미르 님은 ‘저질 체력’이니 조금이라도 운동해서 기본 체력이라도 만들어야죠. 말이 나왔으니까 잠깐 운동하러 나갈까요?”

“으으… 오늘은 안 돼. 팔도 아프고 피곤해서 아무것도 못 해! ”

고개를 저으며 절대 나가지 않겠다는 그에게, 나는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은근하게 말했다.

“아쉽네요…. 모처럼 일찍 끝나서 미르 님과 나들이라도 가려 했는데.”

“나들이…? 나들이면 당연히 가야지! 그 정도는 갈 수 있어!”

나들이를 가자는 내 말에, 그는 아프다던 팔을 신난 강아지처럼 휘휘 저었다. 작업을 하던 약초 바구니 위에 얇은 천을 덮어 두곤, 내 팔을 잡아 옷방으로 들어갔다.

“천천히 준비하세요.”

“응, 알았어.”

그는 눈 깜짝할 새에 파자마를 벗은 뒤, 푸른 빛이 도는 일상복 위에 후드가 있는 어두운 밤색 로브를 걸쳤다. 그러고는 내게도 자신과 비슷한 로브를 걸쳐 주고 방 밖으로 빠르게 나갔다.

“노반은 마린이랑 같이 있을 거야. 요새 둘이 카드 게임에 푹 빠져서 정신없더라고.”

그는 마린과 노반이 카드 게임을 하느라 자신을 따돌린다며 작은 하소연을 했다. 그러면서 입꼬리는 올리는 게 마린과 노반이 즐거워하는 모습이 흐뭇한 것 같았다.

“미르 님.”

“응?”

“이번엔 저희 둘만 가요.”

마린과 노반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려던 그의 손을 잡고, 이번에는 단둘이 가자며 조용히 말했다.

그에 눈이 동그래지며 놀란 그는 다시 한번 되물었다.

“우리 둘만?”

“네, 저희 둘만.”

“어디 가려고…?”

그는 노반과 마린에게 미안한 듯 곤란해 보였지만, 내가 말한 곳이 어디일지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그는 흥미로운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남들한테 알려지면 안 되는 비밀 장소요.”

나는 그를 향해 살포시 웃으며 귓가에 속삭였다.

“비밀 장소?”

“네, 비밀 장소.”

별처럼 예쁜 눈을 반짝이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