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젠 이프리트의 이야기 (13)
셀 수 없이 마물을 베고 또 베었다.
녹을 머금은 색들이 어둠 속으로 흐트러지고, 살구색의 영혼들도 빛을 잃어 스러져 갔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색을 베었다.
몸을 움직여서 생각을 멈추지 않으면, 조금씩 발을 타고 올라오는 이 어두운 그림자에게 완전히 잡아먹힐 것 같았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는 채, 그저 본능대로 몸을 움직였다. 내가 꺼낼 수 있는 모든 오러를 꺼낸 채, 몰려드는 마물들을 학살했다.
내가 뿜어 내는 거칠고 난잡한 오러에 다른 기사들은 내 곁에서 멀리 떨어지려 했고, 오직 투기심이 가득한 마물들만이 내게 달려들었다.
“이프리트 경! 이제 그만 대열로 들어와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마지막 휴식으로부터 보름이 지났습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레오스 경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나는 쉬지 않아도 멀쩡하다. 오히려 휴식을 취하게 되면 망가질 것이다.
그와 약속했던 ‘자신의 몸을 소중히 여기기’는 지키지 않았다. 약조한 사람이 사라졌으니 지킬 필요도, 의무도 사라졌다.
이곳에서 내 숨이 다한다 해도 괜찮다. 미련은 없다. 그걸로 됐다.
영혼이 없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오직 살(殺)의 감정만을 가지고 검을 휘둘렀다.
그렇게 산을 장악한 마물들의 절반이 꺾였을 무렵, 부적처럼 지니고 있던 목걸이가 작게 진동하는 게 느껴졌다.
놀란 마음에 품 안에서 목걸이를 꺼냈다.
목걸이 안에 들어 있는 그의 혈액이 밖으로 빠져나올 듯 요동치다가 다시 잠잠해졌다.
그 움직임을 보고 난 후, 정신이 맑아졌다. 그가 내 곁에 있는 것 같았다.
다시 살 이유가 생겼다.
이 토벌이 끝나고 그를 찾아야 한다. 그는 그의 세계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이곳에 있다.
“허! 완전 로테잖아!”
바람이 부는 듯한 착각이 들었던 순간,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마물도 아니고, 인간도 아닌 무언가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타는 듯한 붉은 빛의 영혼이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것은 별처럼 하얗게 빛나는 그의 영혼과 무척이나 흡사했다.
“누구….”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아서인지, 그것을 향해 내뱉는 목소리가 잔뜩 굳어 갈라졌다.
“생김새는 완전 로테인데 하고 있는 짓이 정반대네. 으, 피 냄새. 이 몸이 제일 싫어하는 게 피 냄새야!”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으악! 이게 다 뭐야! 마물이…! 이거 전부 네가 한 짓이야?”
붉게 빛나는 그것은 마물의 시체로 산을 이룬 광경을 보고는 경악을 했다.
그것은 나를 향해 쫑알쫑알 성질을 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의 뒤로 나를 향해 달려드는 날렵한 마물을 단칼에 베었다.
이 구역에 있는 마물은 전부 처리한 것 같았는데 아직 남아 있나 보다.
“으악! 너 정말 싫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 몸은 미르의 계약자인 불의 정령왕이다! 미르가 네 걱정을… 윽! 하고 있으니까… 적당히 열심히 하는 척하다가 안전하게 돌아오라고… 전해 달랬어. 이 몸은 다 전했으니까 간다.”
그것은 내 주위에 널려 있는 마물들의 시체와 피 웅덩이를 보고 헛구역질을 했다. 그러고는 자신의 할 말만을 한 뒤, 연기처럼 사라졌다.
불의 정령왕….
그가 또 이상한 걸 주워 온 것 같다.
“후…”
그가 오크를 주워 오든 고블린을 주워 오든, 무엇을 주워와도 괜찮다.
그가 이곳에 있다. 그것도 멀쩡하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전보다 몸이 가벼워진 것 같다. 한시라도 빠르게 토벌을 마치고 그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아직 살아서 달려드는 잔챙이들을 처리한 뒤, 기사들이 머물고 있는 막사로 들어갔다.
그 안에는 많이 피곤한 기색으로 회의를 하고 있는 기사단장들이 있었다.
“이프리트 경…!”
“드디어 쉬실 마음이 생기신 겁니까? 얼른 들어가서 눈을 붙이십시오!”
나는 이프리트 백작 가문에서 제적당한 상태지만, 그들은 꾸준히 나를 이프리트 경이라고 불렀다.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몇 번을 말했음에도 그들은 나를 이프리트 경이라고 불렀다.
결국 나도 포기한 상태다.
“북쪽은 끝났습니다.”
“예? 그 많던 마물들을 혼자 처리하신 겁니까…? 북쪽으로 가신 지 열흘도 지나지 않았건만!”
착용한 투구 사이로 보이는 흰머리가 성깃했지만, 아직 정정한 제6기사단 단장인 그레이슨이 말했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아직 토벌이 끝나지 않은 장소를 물었다.
“남아 있는 곳은 어디입니까.”
“지금 치고 있는 남쪽과 아직 가까이 가지 못하는 동쪽만 남아 있습니다.”
남쪽은 마물들의 숫자가 많아서 그렇지, 강한 놈들이 아니라 시간만 들인다면 기사단의 절반으로도 충분히 처리할 수 있는 곳이다.
“문제는 동쪽입니다. 가까이 다가오는 오크 군대가 포효를 하는 바람에 들어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잘 정비된 오크 군대가 동쪽의 출입을 막으면서 이쪽을 치려고 내려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다양한 마물의 군대를 보았지만 오크 군대는 처음이다. 각자 행동하는 무법의 존재인 오크를 다스릴 왕이 나타난 것이다.
“어디까지 내려왔답니까.”
“사흘이면 이곳에 당도할 것 같다 합니다.”
사흘… 아니, 이틀 안에 남쪽을 마무리 짓고, 오크 군대를 저지하러 가야 한다.
“동쪽은 왕의 목을 치면 빠르게 끝날 겁니다.”
“왕이라면… 오크의 왕을 말하는 겁니까…?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비실해 보이는 남자가 덜덜 떨며 내게 말했다.
그의 얼굴이 익숙하지 않은 걸로 보아, 이번에 제14기사단 단장으로 임명된 자인 것 같다. 높은 귀족 가문에서 버리는 자식인 듯, 기사 단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지만, 전혀 기사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번 토벌로 인해 전사한다면 가문의 영광이라 생각하고 보낸 거겠지.
“있습니다. 그들의 왕이 나타난 게 아니라면, 제멋대로인 오크들이 함께 모여 움직이진 않을 테니까요.”
내 말에 얼굴이 하얗게 질린 그는 곧 기절할 것 같이 보였다.
저자를 보니 미르 님이 떠올랐다. 저 비실이보다 미르 님이 몇 배는 더 허약한데, 미르 님이 저 비실이보다 몇 배는 더 용감하다. 대부분은 무모한 거겠지만.
나는 작게 혀를 차고, 결정권을 가진 제1기사 단장을 향해 말했다.
“이틀 내로 남쪽을 처리하고 가능한 빨리 동쪽으로 가야 합니다.”
“우리도 그러고 싶소. 하지만 남쪽은 마물의 숫자가 너무 많아 움직이기도 힘들고, 그렇다고 병력을 쪼개 동쪽으로 갈 수도 없으니 대책 회의를 하는 중이었소.”
그는 내 생각을 물었다.
양쪽을 다 쓸어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면 답은 하나다.
“남쪽에 있는 마물을 동쪽으로 유인하면 되지 않습니까. 같은 마물이지만 그들도 세력 싸움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랬다간 양쪽에서 달려들어 우리 쪽이 전멸할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번 대책은 신중해야 합니다.”
기절하기 직전까지 갔던 비실이가 말했다. 그에 다른 기사 단장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제가 선봉에 서겠습니다. 남쪽 마물의 숫자를 줄이고 동쪽으로 들어가 오크 왕의 목을 벨 테니, 그 후에는 한결 수월해질 겁니다.”
“왕을 지키고 있는 군대를 어떻게 뚫고, 또 오크 왕의 목은 어떻게 벤단 말입니까?”
“제가 본진을 파고 들어갈 수 있게 후방에서 무너지지 않고 잘 받쳐만 준다면 문제없습니다.”
“그게 가능은 합니까? 경의 실력은 잘 알고 있지만, 오크의 왕이라면 만만치 않을 겁니다! 인간이 어떻게 할 수준이 아닐 거라구요!”
비실이는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의 곁에 있는 다른 기사 단장들은 내 계획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확실히 그대라면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뒤만 받쳐 주면 되는 건가?”
대다수의 기사단장이 내 의견에 동의하자, 비실이는 입을 떡 벌리며 소리쳤다.
“그게 무슨…! 정말 가능하실 거라 생각하십니까? 허풍도 정도껏이지, 오크의 수가 어마어마하다구요!”
“바론 경, 그대는 이프리트 경의 검을 본 적이 있는가?”
“아뇨. 담당하는 구역이 달라서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물어보겠네. 그대는 잘 훈련된 기사가 웨어울프 한 마리의 숨통을 끊을 때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는지 알고 있나?”
제6기사 단장인 그레이슨 경이 비실이를 향해 말했다. 그에 비실이는 잠시 미간을 찌푸리고 고민하다 그레이슨 경을 향해 대답했다.
“웨어울프는 영리하고 재빠르기 때문에 아무리 잘 훈련된 기사라도 10분은 걸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흉포한 것들은 길면 30분은 걸린다 하죠.”
“이프리트 경은 1분도 걸리지 않는다네.”
“예…?”
비실이는 얼빠진 표정으로 그레이슨 경을 바라봤고,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다른 기사단장들도 한마디씩 붙였다.
“놀랍게도 사실이야. 우리도 처음엔 믿지 않았었지.”
“그는 귀신같이 마물들의 약점을 파악해서 단칼에 끝을 냅니다. 볼 때마다 얼마나 신기한지….”
“그의 오러를 본다면 불가능하다는 말은 나오지 않을 겁니다.”
“맞습니다. 하찮은 마물은 이프리트 경의 오러를 보고 도망갈 정도로 정말 무시무시하죠. 저도 처음 봤을 때의 기분을 아직 잊지 못합니다.”
단순한 허풍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비실이는 그 후로 입을 다물었다. 덕분에 조용해진 막사는 내가 세운 대책으로 토벌이 진행됐다.
남쪽은 운이 좋게 이틀을 넘기지 않고 처리할 수 있었다. 마물들도 동쪽에서 몰려오는 오크 군대를 느꼈는지, 남쪽 깊숙이 있는 정글로 도망간 마물들이 꽤 많았다. 덕분에 오크를 상대하기 더 쉬워진 상태가 되었고, 예정되었던 이틀 뒤, 오크 군대를 마주했다.
광폭해진 오크는 무자비하게 기사들을 향해 달려들었고, 기사들과 나는 왕을 찾으러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수많은 오크를 뚫고 반나절이 지나서야 왕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아주 진한 녹색의 영혼은 오크 왕의 존재를 알리듯, 그 어떤 마물의 색보다 선명했다.
왕을 지키려는 오크의 군대를 가까스로 뚫고 왕의 약점인 오른쪽 어깨를 관통시켜 심장이 있는 곳까지 한 번에 그었다. 그러자 고통스러워하는 오크의 투박한 손이 빠르게 내 머리를 향해 날아왔다.
하지만 오크가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상처를 파고드는 검의 오러가 오크의 움직임을 저지했다. 오크는 숨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내 머리를 손에 쥐려 발악을 했다.
기사들을 상대하러 앞서갔던 오크들은 뒤늦게 왕을 보호하려고 달려들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오크 왕의 숨은 끊어졌고, 뭉쳤던 군대는 다시 흩어졌다.
이제 이곳에서의 내 일이 끝났다. 내가 없어도 문제없을 것이다.
나는 마지막까지 최대한 많은 마물들을 베며, 레오스 경에게 인사만 남기고 프레오나 황궁을 향해 달렸다. 평소보다 더 빠르게 달려 눈도 붙이지 못하고 황궁에 도착했지만, 그는 이미 그곳을 떠나고 없었다.
그리고 그가 이프리트 백작저로 마실을 나갔다는 문지기의 말을 들었다.
그를 바로 만나지 못한 것에 실망할 틈 없이, 바로 이프리트 백작저를 향해 가넷의 고삐를 돌렸다.
이프리트 백작저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벅차 왔다.
익숙한 저택에 도착하고, 빠르게 달려와 준 가넷을 마구간지기에게 맡긴 채, 저택 안으로 거의 뛰어가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내게 인사하는 백작저의 시종들에게 가볍게 손을 올려 인사를 하곤, 그가 있다는 응접실 문 앞으로 가까이 갔다.
두려웠다. 그가 정말 이곳에 있는지, 내가 느끼고 있는 지금이 현실인지 꿈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 심호흡을 한 뒤,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찾았다.”
그의 모습을 두 눈으로 본 순간 정신이 희미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