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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39화 (139/227)

139 세네카 제국으로 향하다 (1)

“찾았다.”

응접실의 문을 연 사람에게서 젠의 모습이 보였다.

하염없이 누군가를 그리워하면, 그리워하는 이의 환상을 보게 되는 걸까?

“오라버니…!”

“윽, 피 괴물….”

처음에는 내가 환상을 보는 줄 알았다. 그때 곁에 있던 한나와 철수가 그를 불렀다.

환상이 아니었다.

너무너무 보고 싶었던 젠이 내 앞에 있다.

나는 천천히 가까워지는 그를 홀린 듯이 바라봤다. 어느새 그는 내 코앞까지 다가와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내 뺨을 감싸며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한시도 검을 놓지 않았는지, 굳은살이 박인 딱딱한 손에서 따듯한 온기가 전해졌다.

“정말 당신이네요….”

“….”

“당신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정말… 정말 다행이에요.”

얕게 올린 그의 입꼬리가 파르르 떨렸다.

여태 그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산처럼 쌓아 놓았다. 하지만 마음과는 다르게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울컥하는 감정이 목구멍을 콱 막고 있었다.

“그….”

나는 손을 들어 내 뺨 위에 있는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에게 잘 다녀왔냐고 묻고 싶었다. 다친 곳은 없냐고 묻고 싶었다. 내가 갑자기 사라져서 많이 걱정했냐고도 묻고 싶었고, 나한테 화가 많이 났냐고도 묻고 싶었다.

하지만 목소리를 내기도 전에 그의 눈이 스르르 감겼고, 내 뺨 위에 있던 손도 힘이 빠졌다. 그리고 그는 속절없이 바닥을 향해 쓰러졌다.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던 내게는 쓰러지는 그의 모습이 슬로모션처럼 느리게 재생됐다.

“젠 님!”

“야!”

마린은 쓰러지는 젠을 보고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 그의 상태를 확인했고, 노반은 깜짝 놀라선 젠의 의식을 되찾아 주기 위해 그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짜악-

노반이 만들어 낸 매서운 마찰 소리에 나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야! 젠! 일어나!”

“노, 노반 잠깐만! 그렇게 때리면 아플 거야!”

젠의 뺨을 몇 대 더 때리려는 노반을 간신히 막고, 한나를 바라봤다.

어서 의원을 불러 달라고 말할 생각이었지만, 한나는 쓰러진 젠을 보며 한심과 안타까움이 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나는 내 시선을 느낀 뒤, 제 감정을 갈무리하곤 덤덤하게 말했다.

“그저 수면에 빠져든 것뿐이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며칠 푹 자면 또 멀쩡히 움직입니다.”

“젠이 자고 있다는 소리야?”

다시 한번 젠의 뺨을 강타하려던 노반이 한나에게 물었다.

그에 한나는 바닥에 쓰러져 눈을 감고 있는 젠에게 가까이 다가갔고, 그의 콧등 아래로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숨을 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한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끔 있는 일이에요. 오라버니께선 자신의 한계치를 넘어 몸을 과도하게 쓰고 나면 항상 이렇게 몰아서 자더라구요. 마치 겨울잠을 자는 동물 같이요.”

쯧쯧.

한나는 혀를 차며 덩치가 큰 시종 하나를 불러 젠의 뒷정리를 맡겼다.

“아, 씻기는 거 잊지 말고.”

한나는 젠이 산에서 구르고 왔으니 깨끗하게 씻겨야 한다고 언질을 남겼고, 덩치 큰 시종은 알겠다는 뜻으로 한나와 나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젠을 조심스레 안아 들고는 밖으로 나갔다.

“황자님, 오라버니가 깨실 때까지 백작저에서 머무시는 게 어떠십니까?”

나는 시종이 나간 후에도 멍하니 응접실의 문을 보고 있었고, 내게 가까이 다가와 팔을 잡아 준 노반 덕분에 한나의 물음에 답할 수 있었다.

“아, 응… 그래도 될까?”

“물론이죠. 시종에게 일러 지내실 방을 준비하겠습니다. 갑시다, 철수.”

머물겠다는 내 말에 부드럽게 웃은 한나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려 했고, 나는 한나가 부르는 철수의 이름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한나가 부르기엔 철수는 너무 한국적인 이름이라 어딘가 조금 어색하면서도, 느낌이 딱 맞아떨어지는 게 웃겼다.

이름 하나는 잘 지은 것 같다.

“한나는 철수를 철수라고 불러?”

“네, 그가 본인의 이름이라고 자랑하기에 그렇게 부릅니다.”

“자랑했어?”

딱히 그럴 것 같지 않았던 철수가 이름 자랑을 했단다.

내 질문에 한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철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정령의 언어라 그런지 발음하기 조금 어렵지만, 멋진 이름이라 생각합니다.”

“….”

언제부터 철수가 정령의 언어였어?

나는 한나의 뒤에 서서 멋진 미소를 짓고 있는 철수를 바라봤다.

철수는 철수 나름대로 내 정체를 숨겨 주기 위해 둘러댄 말이라고 했다. ‘철수’는 내가 살던 세계의 언어가 아닌, 자신이 쓰는 정령의 언어라고 한나에게 말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자신의 영특함에 빠져 자아도취를 하는 중이다.

“그래…. 멋진 이름이지, 철수.”

“내 이름도 멋져.”

“당연하지! 노반이 제일 멋져.”

나는 내 팔을 꾹 잡은 노반을 번쩍 들어 안아 올렸고, 노반은 재벌 집 아들처럼 고고하게 내 목에 팔을 두르고 우쭐한 표정으로 철수를 바라봤다.

그에 철수는 코웃음을 치며 한나에게 어깨동무를 시전했다. 뭘 뽐내려는지 모르겠다.

둘 사이에 이상한 구도가 생긴 것 같다.

“그럼 저도 정리를 돕겠습니다. 이곳에서 며칠 머무신다는 소식을 황궁에 전해야 하니, 황자님은 잠시 여기 계세요. 노반이랑 떨어지지 마시구요.”

마린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정리했다. 그리고 응접실에서 나가려는 한나의 뒤를 따랐다.

소란스러웠던 응접실은 사람들이 밖으로 나가 한순간에 적막해졌다.

나는 노반을 안아 든 채 소파에 앉는 척을 하다가, 잠시 바깥의 눈치를 보며 살며시 일어났다.

“미르, 어디 가려고?”

“젠한테 가려고.”

“가도 자고 있을 텐데?”

“그래도 옆에 있어 주고 싶어서.”

나는 켕기는 게 없는 사람처럼 아주 당당한 걸음으로 응접실 밖을 나섰다. 마린이 응접실에서 가만히 있으라고 했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전에 왔을 때 한번 가 봤던 젠의 방을 알음알음 찾아 올라갔다. 정확하게 기억이 나질 않아 조금 헤맸지만 잘 찾았다.

굳게 닫힌 문을 열자, 아까보다 훨씬 깨끗하고 깔끔해진 젠이 넓은 침대 위에 누워 눈을 감고 있었다.

우리는 젠이 누워 있는 침대로 가까이 다가갔고, 침대 끄트머리에 걸터앉아 고요히 잠에 빠져 있는 젠을 살폈다.

“젠은 멍청이야. 미르를 앞에 두고 쓰러지는 멍청이.”

“젠도 무리했을 테니까…. 피곤했을 거야.”

“나는 안 그래. 나는 미르 앞에서 쓰러진 적 없어.”

노반은 한껏 우쭐해진 모습을 보였다. 아주 작은 아기 때부터 키워 온 아이가 ‘나 이제 많이 컸어요.’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조금 골려 주고 싶은 마음이 들어 노반을 향해 말했다.

“대신 노반은 잘 울잖아. 내가 본 것만 해도 4번은 넘은 것 같은데에?”

“그건…!”

노반은 자신이 울보라는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지만, 부정하지 못하겠는지 볼이 크게 부풀어 오르고 빠지기를 반복했다.

나는 노반의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노반, 우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야. 마찬가지로 쓰러지는 것도 부끄러운 게 아니고. 이건 열심히 달려오려고 노력했다는 증거잖아.”

내 말을 들은 노반은 고개를 끄덕이곤, 미동도 없이 누워 있는 젠을 바라보았다. 그리곤한숨을 푸욱 쉬더니 그의 옆으로 벌러덩 누웠다.

그러고는 천장을 바라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르, 나는 젠이 부러워.”

응? 희미하게 들린 목소리에 나는 확인차 노반에게 되물었다,

“젠이 부럽다고?”

노반은 고개를 끄덕였고, 천장을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내가 더 오래 살았는데, 나보다 젠이 훨씬 어른인 것 같아.”

그렇지…. 노반이 우리보다 몇 배는 더 오래 살긴 했다만, 넌 아직 아기잖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참았다. 우리 애 또 삐질라.

노반은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고, 천장에 붙어 있는 조명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노반에게 가볍게 물었다.

“노반이 생각하기에 젠은 어른 같아?”

“응, 젠은 어른이야. 막 나가는 것 같아 보여도 생각이 깊고, 강하잖아. 어른다운 일은 하나도 못 하는 나랑은 달라.”

“그래?”

“이번에 느꼈어. 젠은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야. 미르가 그랬었지? 어른은 자신의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랬었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곤, 조금 풀이 죽어있는 듯한 노반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미르가 사라지고, 사라진 미르를 젠이 가장 열심히 찾았었어. 근데 젠은 토벌을 하러 가야 했잖아.”

“응, 그랬지.”

“내가 젠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면, 토벌이 어떻게 되든 신경 쓰지 않았을 거야. 그냥 무작정 미르를 찾았겠지.”

노반은 자신의 손을 뻗어 내 검지 손가락을 꽉 잡았고, 나는 그런 노반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줬다.

노반의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손가락에 엉겼다. 그에 엉키지 않게 노반의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어 주고 마무리로 손끝을 이용해 살짝 긁자, 노반은 기분이 좋은지 눈썹을 씰룩거리며 말을 이었다.

“젠이 그랬어. 최대한 빨리 돌아오겠다고. 그러니 폭주하지 말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리고 진짜 빨리 돌아왔잖아.”

맞다. 마물 토벌의 예상 기간은 대략 석 달이었다. 하지만 젠은 예상 기간보다 보름은 더 빨리 토벌을 끝내고 수도에 도착했다.

이건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나 이번 토벌은 여태껏 겪었던 그 어떤 토벌보다 힘이 들 거라는 말이 있었다. 마물의 수와 그것들의 광폭함이 전과 달리 더 강해졌다며 걱정하는 말들이 많았다.

그런 흉흉한 소문이 있는데도 이렇게 빨리 도착했다. 젠이 무리해서 토벌을 강행한 게 틀림없다.

“그건 젠이 무리하게….”

“나도 알아 젠이 무리한 거. 그치만 난 그게 너무 부러워. 무리를 했지만 어른의 책임을 다한 거잖아.”

노반은 어른이 되고 싶은 걸까?

아이의 시선으로 볼 땐 어른이 멋지게 보이겠지만, 어른들은 다시 어려지고 싶어 한다. 자신에게 부여되는 의무와 책임을 거부하고 싶으니까.

“노반은 왜 어른이 되고 싶어?”

“성인식은 진작 끝났지만 내가 어른이 됐다는 느낌이 없어서 이상해. 그리고 난 오래 살았잖아. 내가 미르랑 마린 그리고 젠을 지켜 줘야 하는데….”

노반은 침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자신이 얼른 어른이 돼서 우리를 지켜 줘야 한다고.

그 마음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 미소가 지어졌다.

“노반, 나는 노반이 노반만의 속도로 자랐으면 좋겠어. 천천히 지금의 너를 가꾸고 다듬었으면 해.”

“내 속도?”

“응, 사람은 다 자신만의 속도가 있어. 예를 들어… 내가 책 한 권을 빠르게 읽으면 10분도 안 걸리는 거 알지?”

내 말을 들은 노반은, 드디어 나와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난 책 한 권을 읽는 데에 10분이 걸려. 하지만 모든 사람이 나처럼 빨리 읽지는 않아. 전부 다르지. 마린은 40분, 노반은 1시간. 마커스는 책을 안 읽지.”

“맞아.”

노반은 키득키득 웃음을 터트렸다.

“그렇게 다 자신만의 속도가 있는 거야. 만약 노반이 나를 따라 하겠다고 책을 10분 만에 읽으려고 한다면, 노반은 그 책의 내용을 다 이해하고 기억하고 있을까?”

“아니! 해 봤는데 금방 잊어버렸어. 내용도 머리에 다 안 들어왔고.”

“맞아. 조급해하면 안 돼. 자신의 속도를 지켜서 차근차근 읽어야 책 속에서 얻는 게 많아져.”

나는 순진한 아이와 같은 초롱초롱한 노반의 눈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는 노반이 노반의 속도에 맞춰서 천천히 자랐으면 좋겠어. 그렇게 차근차근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노반은 어느새 멋진 어른이 되어 있을 거야.”

작은 아이는 상쾌해진 얼굴로 밝은 웃음을 지었고,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 번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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