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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41화 (141/227)

141 세네카 제국으로 향하다 (3)

“약속한 대로 세네카에 가 보겠습니다.”

“가기 싫다더니 마음이 바뀐 건가?”

오늘도 어김없이 서류 지옥에 파묻혀 있는 오스먼드는 내 말에 건성건성 대답해 줬다.

가기 싫다는 거 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시간은 얼마나 필요하지?”

“글쎄요…. 한 1년은 걸리지 않을까 합니다.”

“….”

내 말에 오스먼드는 제정신이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눈빛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사람이 두 명이나 있는데, 서류가 가득한 집무실은 정적이 돌았다.

나는 오스먼드의 눈을 피하며 제일 가까이에 있는 서류를 보는 척했고, 오스먼드는 자신의 시선을 피하는 나를 끈질기게 바라봤다. 곧이어 손을 들어 올린 오스먼드가 말했다.

“그건 안 돼.”

그는 단호하게 1년은 너무 길어서 안 된다 말했다. 그에 나는 한숨을 쉬곤 곤란하다는 뉘앙스를 풍기며 말했다.

“성녀가 세네카에서 움직이지 않는 걸로 보아, 다른 곳으로 갈 생각이 없는 것 같은데… 성녀가 필요 없으신가 봅니다.”

“생각이 바뀌었어. 이를 갈면서까지 갖고 싶진 않더군. 1년을 할애해야 한다면 더더욱.”

무슨 바람이 불었대? 한 달 전까지만 해도 성녀를 데려오고 싶어서 이골이 나 있더만.

“그 말은… 성녀가 필요 없으시다는 이야기입니까?”

나는 조심스러운 태도를 취하며 그에게 질문했고, 크게 신경 쓰고 있지 않는 것 같은 오스먼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근처에 놓여 있던 서류를 내게 넘겼다.

“그래, 예언의 능력은 탐이 나지만, 그 능력을 자기 멋대로 사용하는 것 같더군.”

나는 오스먼드가 넘긴 서류를 확인했다. 성녀가 예언했던 날의 일지였다.

성녀가 깨어나고 나서 많은 양의 예언을 했지만, 점점 일주일에 한 번, 이주에 한 번, 한 달에 한 번으로 줄어들었고, 이제는 예언을 아예 하지 않는다고 적혀 있다.

뭐야, 신기가 떨어졌나…?

하긴, 내가 프레오나에서 죽는다는 예언을 한 것 자체가 신기가 떨어졌다는 증거지.

“신성력을 사용하는 날이 현저하게 줄어들었군요.”

“신성력이 사라진 거겠지. 아니면 신성력을 쓰고 싶지 않다거나.”

신성력을 쓰고 싶어 하지 않는다라….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세네카 제국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는 아닐 거다.

전에 메이븐이 해 줬던 말에 따르면 성녀가 내 죽음을 예언하긴 했지만, 그 예언과는 상관없이 라이언 황제는 성녀에게 호의를 보이고 있는 것 같았다.

아버지란 작자가…, 쯧.

“혹시 성녀가 왜 그러는지 알고 계십니까?”

성녀에게 무슨 문제가 있냐는 내 질문에 오스먼드는 양 어깨를 들썩이며 말했다.

“글쎄, 순결을 잃은 것일지도 모르지. 성녀는 누군가와 정을 통하면 신성력이 사라진다고 하니까.”

나는 조금 얼빠진 표정을 지으며 오스먼드의 말을 곱씹었다. 누군가와 사랑을 나누면 신성력을 잃는다니, 참 고전적이면서도 부당한 소리다.

“몰랐다는 표정이군.”

오스먼드는 멍한 내 얼굴을 바라보며 성녀에 대해 설명해 줬다.

보통 성력은 아주 어린 나이에 발현되기 때문에, 성력이 발현된 성녀는 그 신성력을 잃지 않고 좋은 일에 사용할 수 있게 강제적으로 교황청으로 끌려가 순결을 강요받는다고 한다.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 살았던 나로서는, 이런 사이비 같은 관습을 이해할 수가 없다.

성녀도 성녀 마음대로 살 권리가 있을 텐데…. 하긴, 그렇게 따지면 황제의 명령을 들어야 하는 나도 다를 게 없지.

아니, 잠깐만.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다 큰 성인이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뽀뽀도 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도 하고 그러는 거지. 그런 걸로 성력이 사라져?

정말 쩨쩨한 신이다.

“교황청이 그런 곳이었는지는 몰랐습니다.”

“그렇겠지. 이젠 성녀도 잘 태어나지 않고, 옛날과는 다르게 교황청도 조용히 움직이고 있으니까.”

“그렇군요…”

별 수 없다는 그의 말에 딱히 할 말이 없어 침묵했다.

철수에게 들은 바로 교황청이 믿고 있는 천신 아벨은 힘이 빠져 은퇴했다고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있는 내가 ‘아벨은 이제 끝물이니 교황청은 쓸모없다!’라고 광고하고 다닐 수도 없고, 무력으로라도 교황청을 부수지 않는 이상, 성녀를 위해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다.

오스먼드는 말이 없어진 나를 보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내가 같잖은 정의감에 빠진 줄 알고 안타까워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니다. 그냥 할 말이 없는 거지.

오스먼드는 이 침묵을 끊으려 먼저 입을 열었다.

“성녀가 프레오나로 온다면 교황청의 간섭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성녀의 부모는 세네카의 사람이라 성녀가 세네카에서 지내도 특별히 문제가 되는 일은 없지만, 프레오나에 오면 이야기가 조금 달라진다.

어째서 프레오나로 갔는지 대대적인 조사가 이루어질지도 모른다는 뜻이다.

“그럴 수도 있겠군요. 제 알 바는 아니지만.”

무성의한 내 대답에 오스먼드는 날이 선 눈으로 나를 흘겨봤다.

흘겨본들 뭐 어쩔 건데, 간섭은 네가 받지, 내가 받냐?

“그나저나 그 성녀에게 정말 신성력이 사라졌다면, 폐하께선 그 성녀가 필요하지 않겠군요.”

“그렇지. 그대와 비슷하게 짐이 될 뿐이야.”

오스먼드는 무성의한 대답을 했던 내게 상처를 줄 요량으로 말했겠지만 나는 상처받지 않는다. 조금 빡칠 뿐이지.

“짐이라니 듣기 거북하군요. 제가 폐하를 도와 맡았던 서류의 양으로 저 책장 하나는 채웠을 것입니다.”

나는 툴툴거리며 오스먼드에게 항의했다.

막말로 너네 재상보다 내가 한 일이 더 많을걸? 서류 분류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그리고 내가 너네 정치 회의에 참여만 안 했지, 웬만한 정책은 다 내 손으로 사인해서 통과시켰어, 어?

언제는 지 일거리를 나한테 떠넘겼으면서. 오스먼드는 젠이 없던 한 달간 나를 오지게 굴렸었다.

“그거야 조금이라도 그대의 쓸모를 찾으려 했을 뿐이지. 설마 무일푼으로 내 황궁에서 먹고 자고 할 생각이었나?”

오스먼드는 재수 없는 눈으로 되물었다.

무일푼은 개뿔, 세네카에서 매년 주는 공물이 내 숙식비다!

“전 볼모로 온 몸입니다. 그저 아무 탈 없이 가만히 있는 게 제 역할이죠. 그리고 프레오나에선 볼모인 제 신변을 안전하고 풍요롭게 해 줄 의무가 있습니다.”

“그건 그대가 다른 볼모처럼 내가 하라는 대로 얌전히 있는다는 전제하에 가능한 이야기지.”

오스먼드는 내 이야기는 들어 볼 가치도 없다면서, 내가 숨을 쉬고 있는 것을 다행으로 여기라며 코웃음을 쳤다.

굉장히 억울하다. 내 신변에 위협이 되지 않는 이상, 그동안 나는 가만히 있었다. 물론 중간에 한번 정령계와 중간계의 틈으로 사라지긴 했지만 그건 내 탓이 아니고 프레오나 황궁의 부실 공사 때문 아니야? 공사를 깔끔하게 잘했으면 내가 거기를 발견할 일도 없었을 텐데 말이야.

“억울합니다. 전 세네카의 황자입니다. 사실상 프레오나를 위해 일을 할 위치가 아니라구요.”

“내 창고에서 가져간 와인 값으로 충분했을 텐데.”

이 영리한 자식, 이 이야기를 여기서 꺼내다니.

“…그건 제 노동에 대한 당연하게 받아야 하는 보수입니다. 폐하께서 제 보수를 주지 않으셨으니 제가 가져간 것이죠. 그리고 폐하께선 제 노동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제 노동의 값은 꽤 비싸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경력도 쌓여 갈 테니 여타 장인들과 비슷하게 때마다 값이 오를….”

“그만.”

오스먼드는 미간을 찌푸리며 검지손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댔다. 닥치라는 소리였다.

말할 자유도 빼앗아 버리는 이 더러운 황궁을 얼른 벗어나든가 해야지.

수도에서 지내길 권했던 한나에게는 미안하지만, 곧 죽어도 수도에서 살 일은 없을 거다.

이런 놈이 있는 곳에서는 못 산다.

나는 한시라도 빨리 젠을 만나러 가고 싶은 생각에, 이 이야기를 마무리를 짓고 로테 별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폐하께 있어 성녀는 필요 없으신 겁니까?”

“성녀의 신성력이 건재하다면 필요했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그래, 필요 없어.”

신성력을 사용하지 않는 성녀에게 큰 미련이 없어 보이는 오스먼드 덕에 나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그를 향해 말했다.

“그럼 제가 세네카에 갈 이유도 사라졌군요. 세네카에서 신성력을 쓰지 않으면, 프레오나에서도 마찬가지일 테니까요.”

나는 방긋 웃으며 이렇게 시간 낭비할 바에는 북쪽으로 돌아가겠다는 이야기를 하려 할 때, 오스먼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시도는 해 봐. 혹시 모르잖아.”

“성녀가 신성력을 쓸 수 있는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만일 그렇다면 데려와.”

말이 쉽지, 내가 무슨 수로 성녀를 데려와.

“제가 무슨 수로 성녀를 데려옵니까. 전에도 말했다시피 말은 걸어 볼 수 있을 테지만 성녀가 절 마음에 들어 할지는 미지수입니다.”

“그대라면 할 수 있을 거야.”

오스먼드는 책상에 기대어 손으로 턱을 괴곤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조소 어린 표정과 함께 온 그의 말은 ‘너는 누구나 꼬실 수 있잖아.’라는 뜻 같았다.

“시도는 해 보겠지만 장담은 못 합니다. 식물의 마음이면 모를까, 사람을 홀리는 데에는 재주가 없습니다.”

나는 언짢은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고, 내 대답에 그는 코웃음을 쳤다.

진짜라니까? 내가 사람 홀리는 재주가 있었다면 너부터 홀려서 프레오나를 꿀꺽했겠지.

“석 달.”

“….”

“석 달 후에 돌아와. 성녀를 데려오지 못해도 책임을 묻지 않을 테니.”

오스먼드는 다시금 서류로 시선을 돌렸고 나는 의문에 빠져들었다.

성녀를 데려오지 않아도 되는데 세네카에 갈 필요가 있는 건가? 혹시나 성녀가 신성력을 일부러 쓰지 않을 것 같다는 그 작은 확률 때문에 보내는 거야? 왜? 저 오스먼드가?

오스먼드가 언제부터 이렇게 여유가 있는 사람이었어?

“폐하의 말은….”

“그래, 그냥 고국으로 돌아가 휴식을 취한다 생각해. 돌아오는 길에 선물을 가져오면 더 좋고.”

정말 미친 건가…. 얘, 어디 아파? 왜 이래? 볼모한테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휴식을 준다고? 그것도 석 달이나?

갑자기? 왜?

오스먼드가 단단히 미친 게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반면, 원하지는 않았지만 세네카에 다녀오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알겠습니다. 그럼 1년 후에 뵙죠.”

“뭐?”

내 말에 오스먼드는 보고 있던 서류에서 눈을 떼곤, 어이없다는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짜식 쫄기는.

“농담입니다. 혹 일정에 차질이 생긴다면 서신을 보내겠습니다.”

“그래. 난리 피우지 말고 조심히 다녀와.”

다시 서류로 눈을 돌린 오스먼드는 나가보라며 손짓했다.

밖으로 나온 나는 대기하고 있던 보리언과 인사를 나누곤, 모터 주둥이 텟과 함께 젠이 있는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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