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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44화 (144/227)

144 세네카 제국으로 향하다 (6)

숨이 턱 막혔다.

그는 나를 사랑한다고 말했다.

이건 비꼬는 말도, 꾸민 말도 아니었다. 애정이 가득 담긴 진실한 고백이었다.

심장이 하늘로 붕 떠올라 땅으로 솟구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게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일까?

나는 그의 고백에 대한 대답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긴장한 것인지 목구멍이 턱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맞잡고 있는 그의 손을 내 심장 위로 올려 두근거림을 전했다.

“느껴져?”

“네, 아주 잘 느껴져요.”

내 심장 박동을 느꼈는지 젠은 눈을 사르르 풀며 예쁘게 웃었다.

멍하니 그의 미소를 바라본 나도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처음 들어봐. 누군가가 날 사랑한다는 말.”

엄밀히 따지자면 처음은 아니다.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진 전생에선 번번이 사랑한다는 고백을 받았다. 하지만 그 말들은 내 외관만 따지거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탐내는 가식적인 사람들의 거짓된 애정이었다. 삐뚤어진 애정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그들과 반대로, 젠은 내게 완전한 애정을 담아 말했다.

처음이었다.

“그럴 리가요.”

“응?”

내 이야기를 들은 젠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당신은 제가 본 사람 중에 가장 사랑스러운 사람이에요. 저도 느낄 수 있는 이 감정을 다른 사람들이 못 느꼈을 리가 없어요.”

젠의 다정한 말에 내 마음은 하늘로 붕 떠올랐다. 가슴속에 하얀 뭉게구름으로 꽉 차 있는 그런 몽실몽실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고개를 들고 젠을 바라봤다. 그러고는 진지하면서도 장난스럽게 그에게 물었다.

“내가 사랑스러워?”

“아닌 것 같아요?”

사랑스럽냐는 내 질문에, 그는 질문으로 답했다.

나는 그의 빛나는 금안을 바라봤다. 그의 눈동자에는 장난스러운 기색이 담겨 있지 않았다. 그는 진심으로 나를 사랑스럽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닌 것 같아요?’라니, 물론 내 외관은 사랑스럽고 인간으로서 가장 완벽한 모습이지만, 알맹이는 ‘사랑스럽다’와는 조금 멀지 않나? 제멋대로 날뛰고 성격도 조금 이기주의에 가깝고.

아무튼 내가 생각해도 나는 성가신 사람이다.

“똑똑하다거나 잘생겼다는 말은 많이 들어왔지만, 사랑…스러운 건 잘 모르겠어. 사실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도 처음 들어보는 말이거든.”

젠은 난생처음 들어 본 말에 고민하는 나를 잠시 말없이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전 못된 사람일지도 모르겠어요.”

“응?”

자신이 못된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그의 말에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젠이 못된 사람이라니, 내가 양심적이라는 말과 똑같이 아귀가 맞지 않는 말이었다.

나는 그와 맞잡은 손을 흔들며 위로하듯 말했다.

“네가 못된 사람이면 난 얼마나 못된 거야?”

내 목소리를 들은 그는 다시 나와 시선을 마주한 채,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한 사람이 제가 처음이라 기뻐요.”

미치겠다 정말…. 이제는 두근거릴 심장도 남아 있지 않다.

얘 진짜 연애 한 번도 안 해 본 애 맞아?

“…너 내가 처음인 거 맞아?”

“그럼요, 저한테 미르 님 말고 또 누가 있겠어요.”

거짓말. 믿을 수가 없다.

다정한 건 둘째 치고, 사람을 꼬시는 실력이 보통이 아니잖아. ‘당신은 제가 지킬 거예요’라거나, ‘제가 당신의 처음이라 다행이다’라거나. 이런 심장을 후벼 파는 소리는 어디서 배운 거지? 타고 나는 건가?

나는 미심쩍은 표정을 지으며 젠을 바라봤고, 내 표정을 본 젠은 정말이라며 입을 열었다.

“사람을 만나는 데에 관심이 없었어요. 혼인을 하게 되면, 평생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가능한 영애들과의 만남은 피했었죠. 그러다가 남색가라는 소문이 난 거예요. 덕분에 약혼 제의도 끊겼고, 검에만 집중할 수 있었어요. 누구를 만날 시간도 없었고요.”

“….”

“못 믿으시겠으면 한나한테 물어보세요. 전 당신밖에 없어요.”

그래, 타고난 거겠지.

한나와 레이, 젠 그리고 친하지 않은 에멀슨 공작까지. 젠한테는 애인 그 비스름한 것도 없었다고 했다. 오죽하면 이 끝장나게 잘생긴 미남한테 친구가 없었다고 말했겠어?

나는 방긋 웃으며 믿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젠은 내 질문에 대한 반격을 시작했다.

“그러는 미르 님은 제가 처음인가요?”

“당연하지. 나는 아플 때 빼고 공부만 했어. 완전 우등생이었다고.”

당당한 내 말에 얕게 웃은 젠은 내 뺨을 두 손으로 잡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정말 제가 처음이라 확신하세요?”

“확신해!”

그 말에 얕게 웃음을 지은 그가 으스스한 말투로 겁을 주며 말했다.

“혹시 모르죠, 악마가 가져간 당신의 작은 기억 속에는 다른 게 들어 있을지.”

아.

젠이 내뱉은 말은 내 뼈를 때리는 팩트였다. 순간적으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억을 잃었으니 증명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내 기억을 먹어, 이제는 유일하게 내 전생을 알고있는 악마를 불러 증명을 해야 하나…?

나는 가만히 침묵을 지키다가, 젠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처음이 뭐가 중요하겠어. 지금이 중요하지.”

나는 젠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지만, 그가 내 얼굴을 잡고 있어 완벽히 피하지는 못했다. 덕분에 옆통수에서 스산한 기운이 느껴졌다.

갑자기 내가 쓰레기가 된 것 같은데….

나는 마음을 굳게 먹고 젠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일은 없었을 거야…! 나는 그… 진짜 연애에 관심이 없었고, 만약 누군가와 깊은 관계로 발전을 했다면 상대는 내 다른 이름을 불렀을 텐데, 그런 기억이 전혀 없어. 나 되게 순수했어!”

나는 그를 향해 횡설수설 말했고, 그런 내 모습을 본 젠은 스산했던 표정을 풀고는 작게 웃었다.

“알아요. 미르 님을 보고 있으면 느껴져요.”

“뭘 느꼈는데?”

“음… 연애 고자…?”

내가 연애 고자라는 말도 했었어…? 미쳤구나, 도브로미르. 다른 곳에서 왔다고 아주 광고를 해라.

“내가 그런 말도 썼었어?”

“네, 마커스한테 그러셨잖아요. 저놈은 평생 연애 못할 거다, 라면서요.”

“…그랬었네.”

오죽 답답했으면 그런 말을 했을까.

마커스는 자신이 좋아하는 마린에게 쓸데없는 짓만 해댔었다. 마린의 관심에서 벗어난 것들로만 선물한다든지, 눈치 없이 기분이 저조할 때 마린에게 데이트를 가자며 치근덕댄다든지, 사람은 착한데 눈치가 없다.

그리고 나는 그런 마커스를 보며 젠과 노반에게만 몰래 ‘연애 고자’라고 말했었다.

“그래서, 내가 연애 고자라고? 마커스 같은?”

어이가 없어 되물은 내 말에, 젠은 말없이 내 눈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아니, 아니지.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물론 내가 사랑을 해 보지 못해서 그런 쪽으로 눈치가 없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지만, 나는 엄연히 마커스랑은 다르다.

나는 연애가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마커스는 못하는 사람이다.

“나는 연애 고자가 아니라…!”

나를 연애 고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젠에게 반박을 하려 했지만, 문득 생각난 사실에 가벼운 우울감이 밀려 왔다.

나는 연애 고자가 아닌, 그냥 고자다.

아무리 그곳에 좋다는 음식을 먹어 봐도 안 선다. 남자의 자존심이 축 처져있으니 화장실에 갈 때마다 조금 슬프다. 아니, 좀 많이 슬프다.

이쯤 되면 포기하고 고자로 살아갈 법했지만, 포기할 수가 없었다. 이걸 어떻게 포기하겠어….

시무룩해진 내 표정을 본 젠은 의문을 표하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턱을 조심히 들어 올려 상태를 살폈다.

“미르 님.”

“이 몸은 하자가 많은 몸이야….”

“네?”

체력도 약해, 근육도 안 붙어, 중요 부위에 피도 안 쏠려. 이 끝장나는 얼굴을 제외하고는 볼 곳도 없다.

“이런 나라도 괜찮아?”

젠은 축 처진 내 모습을 보곤, 하하하 너털웃음을 지으며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전 당신이 마커스의 탈을 쓰고 있어도 사랑했을 거예요.”

“으악, 그런 말은 하지 마. 생각만 해도 끔찍하니까.”

그래, 듬직하고 수더분한 중년 남성보다는 젊고 예쁘게 생긴 고자가 훨씬 낫다.

나는 진심으로 질색했고, 젠은 그런 내 모습을 다정하게 바라보다 미소를 지었다.

“처음 당신을 만났을 때, 그저 신기했어요. 환하게 빛나는 영혼이 평범한 사람과는 달라 관심이 갔었죠. 생각해 보면 그때부터 당신을 좇고 있었어요.”

젠은 내 귓가에 가까이 다가와 나를 사랑하게 된 이유에 대해 속삭였다.

“당신은 제게… 마른 장작 위에 튄 불씨였어요.”

“마른… 장작?”

다 좋았는데 갑자기 마른 장작이라고?

“죄송해요. 떨려서 그런지 말을 멋지게 하지 못하겠어요.”

자신도 웃겼는지 푸흐흐 웃는 그를 따라 나도 웃었다. 덕분에 마음 아픈 생각에서 벗어났다.

나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웃고 있는 젠에게 말했다.

“처음부터 날 좋아한 거야? 영혼이 예쁘게 빛나니까?”

“다른 사람과는 다르게 환히 빛나서 관심이 갔지만, 그것 때문에 좋아한 건 아니에요.”

“그럼? 내가 왜 좋아?”

나는 클리셰 드라마에 나오는 진부한 대사를 했다. 내 무엇이 그렇게 좋냐고.

그에 나와 눈을 맞춘 젠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을 부르면서 환하게 웃을 때, 노반을 쓰다듬어 주면서 깜박 잠에 들 때, 늦게 잠든 마린을 걱정할 때, 입 안 가득 음식을 집어넣을 때, 얼굴이 흙으로 범벅이 됐는데도 열심히 일할 때, 목욕하고 나와선 붉어진 얼굴로 우유를 마실 때, 무언가에 실패해서 풀이 죽었을 때, 움직이는 몸짓 하나하나가 전부 좋아요. 숨만 쉬고 있는 지금도 미르 님이 좋아요”

더 말해 볼까요?

몇 시간은 더 말할 수 있는지, 자신 있어 보이는 젠에게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물어 놓고도, 이렇게 열렬하게 답해 줄 줄은 몰랐다.

젠의 고백에 부끄러워져 얼굴이 달아오른 게 느껴졌다. 정작 낯간지러운 말을 한 젠은 아무렇지 않게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와 시선을 맞추며 두근거리는 심장을 천천히 진정시키며 말했다.

“젠이 좋아. 심장이 터져도 좋을 만큼. 시간만 주면 너의 어디가 좋은지, 뭐가 좋은지 다 말해 줄 수 있는데 지금은 생각이 안 나. 머리가 텅 빈 것 같아.”

나는 그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댔고, 항상 일정하게 뛰었던 그의 심장 박동이 조금 빠르게 뛰고있는 걸 느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나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고, 젠은 내게 다시 한번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좋아해요. 당신을 사랑하고 있어요.”

나는 그의 말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그의 허리춤에 있는 셔츠를 꽉 잡았다.

곧이어 그의 손이 내 뺨을 부드럽게 감쌌고, 서로의 입술 사이는 가까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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