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세네카 제국으로 향하다 (8)
이른 아침, 누군가의 부름 없이도 저절로 눈이 떠졌다.
세네카에서의 하루가 시작되었다는 생각에 한숨이 나올 뻔했지만, 바로 옆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에 기분이 좋아졌다.
“좋은 아침이에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침대와 좀 많이 떨어져 있는 책장 쪽에 젠이 있었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내가 보고 있는 젠이 진짜인지 아닌지 의심했고, 현실인 걸 깨닫자, 저절로 입이 떡 벌어지며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평소라면 조금 긴 머리카락으로 눈을 살짝 가렸겠지만, 어째서인지 오늘은 포마드로 머리카락을 깔끔하게 올렸다.
가려도 잘생겼는데, 까니까 더 잘생겼다.
황금의 찬란함을 닮은 금안이 오늘따라 더욱 빛이 났고, 찬연한 콧대와 아름다운 입술, 날렵한 턱선 등등 그냥 전부 다 완벽하다.
젠이 생판 남이었으면 세상은 정말 불공평하다고 생각했겠지만, 이제는 가까운 사이에서 더 가까워진 사이고, 저 남자가 내 남자라 생각하니 가슴이 웅장해졌다.
그는 한쪽 벽을 다 채운 책장을 살피고 있었다. 젠이 보고 있는 책장에는 4황자의 물건 몇 개와 그의 관심사인 약초에 관한 책이나 마법의 관련된 서적이 있었다.
그중엔 젠이 볼 건 없을 텐데.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잠시, 젠은 책장에서 떨어져 내 곁으로 다가왔다. 나는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오는 그의 얼굴을 보며 잠시 넋을 놓는 시간을 가졌다.
진짜 비현실적이다. 어떻게 사람이 땡땡 붓는 아침부터 저렇게 잘생길 수가 있지?
“좋은 아침이야, 젠.”
조각 같은 젠을 충분히 감상했으니 이제 슬슬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덮고 있던 이불 속에서 작고 따듯한 생명체의 꼼지락거림이 느껴져 일어나려던 움직임을 멈췄다.
나는 내 옆으로 다가온 젠을 바라보며 이불을 살짝 들어 올렸다. 이불 안에는 여우의 모습인 노반이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자고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이불을 다시 덮어 주며 노반이 깨지 않게 조심스레 일어났다.
“쉿.”
나는 협탁에 놓인 실크 가운을 입었다. 그리고 우리는 노반이 깨지 않게 조용한 걸음으로 침대를 빠져나와 발코니로 나갔다.
밖으로 나가자마자 보이는 광활한 하늘은 아직 이른 아침이라 새벽의 푸르스름함이 남아 있었고, 시원하게 다가오는 공기도 맑고 상쾌했다.
난간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파시테 궁에서만 볼 수 있는 초라한 전경이 보였다.
있는 거라곤 듬성듬성 나 있는 나무와 다듬어지지 않은 정원뿐이지만,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젠이라 그런지 초라한 전경도 나쁘지 않았다.
“조금 추운 것 같아.”
한겨울인 프레오나보다는 아니지만, 세네카도 겨울인 것은 마찬가지기에 나는 쌀쌀한 공기를 피하려 젠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꼭 껴안았다.
그에 젠은 나와 마주 보고 껴안아 주며 작게 웃었다.
나는 젠을 더욱 꽉 껴안으며 그의 품 안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그리고 웅얼거리는 목소리로 그를 향해 물었다.
“잠은 잤어?”
“네, 많이 잤어요.”
말은 많이 잤다고 하지만 아마 깊게 자지 못했을 거다.
젠은 북쪽에서도 그렇고, 황궁에서도 그렇고 누군가를 경계하는지 항상 얕게 눈만 붙였다.
아, 젠이 토벌에 다녀오고 기절하듯 자던 그때는 제외다.
나는 그의 품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머리는 왜 올렸어? 나야 신선해서 좋은데 너무 잘생겨서 조금 불안하다.”
“황제를 알현하러 가야 하니까요. 제가 잘생긴 게 불안한가요?”
“응, 여기 시녀들 되게 많아. 게다가 세네카 황궁은 화원이 유명한데, 거긴 영애들도 많이 지나다닌다고 알고 있어. 걔네가 너 보고 좋아하게 되면 어떡해.”
젠은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질투하는 내가 귀여운지 피식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어떻게 걱정을 안 해. 남녀불문하고 사람들의 미인을 향한 열정이 얼마나 끈질긴지 알아?”
나는 그를 향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아야 한다 말했고, 그는 아무리 위험해도 문제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
“전 이미 당신의 것인걸요.”
어흑.
“혹시라도 다른 이의 유혹에 제가 넘어갈까 걱정되시는 거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
“저를 향한 그들의 열정보다, 당신을 향한 제 열정이 더 끈질겨요.”
젠, 너는 이른 아침부터 내 심장을 쥐고 강하게 터트리려고 하는구나.
나는 하늘 높이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혼신의 힘을 다해 끌어내렸다.
“그래? 얼마나 끈질긴데?”
“시험해 보실래요? 제가 당신을 위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아니, 안 해도 돼.”
나는 다시 그의 품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그러고는 헤실헤실 웃으며 몸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젠이 날 위해 어디까지 하는지는 시험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오히려 시험하는 게 더 위험할지도 모른다. 정말 무슨 일을 할지 모르니까.
그가 지금까지 보여 줬던 것만 해도 충분하다.
“하루 종일 이렇게 가만히 있고 싶어”
“일정이 끝나면요.”
젠은 가기 싫다고 생떼를 쓰는 나를 살살 달랬다.
나는 그런 젠의 품에서 벗어나지 않았고, 노반이 일어나 젠의 다리를 푹푹 밟을 때까지 그에게 안겨 있었다.
* * *
라이언 황제를 알현하기 위해 황제궁의 알현실로 가자, 어제 파시테 궁에서 봤던 시종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시종은 정중한 말투로 우리를 향해 말했다.
“황자님을 제외한 다른 분들은 이곳에서 기다려 주십시오.”
“그게 무슨 소리지?”
“황자님만 안으로 모시라는 명령이 있었습니다.”
프레오나에서 온 젠과 보리언, 그리고 세네카의 사람인 마린까지 라이언 황제를 알현하러 왔지만 전부 거부당했다.
라이언 황제는 오직 나만 들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라이언이 어떤 인간인지 알고 있는 마린과, 라이언 황제의 짙은 영혼 색에 부정적인 젠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그들에게 괜찮을 거라며 작게 웃어 주곤, 찝찝한 표정을 지으며 황제가 있는 알현실 안으로 들어갔다.
알현실은 내가 이곳에 처음 왔을 때와 달라진 것 없이 화려했다.
알현실의 중앙에서 라이언 황제는 권태로운 표정을 지은 채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고급스러운 가운만 입고 있던 처음과 달리, 이번에는 제대로 옷을 갖춘 차림새였다.
“세네카의 태양을 뵙습니다.”
“….”
라이언 황제는 내가 아주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데도 아무 말 하지 않고 가만히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애매하게 숙이고 있는 고개가 저려 오고, 언제까지 이러고 있어야 하나, 그냥 다 때려 치고 튈까 싶을 때쯤, 라이언 황제가 입을 열었다.
“멀쩡하구나.”
그의 말에 잠시 뇌가 정지한 듯한 착각이 일었다.
뭐? 멀쩡해? 그게 오랜만에 본 아들한테 할 소리야?
정말 마음에 안 든다.
“예, 멀쩡합니다.”
“그래, 가 보거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럭저럭 나빴던 기분이 더더욱 나빠졌다.
원래부터 아버지에 대한 신뢰라거나 애정은 개미 발톱만큼도 없었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싶었다. 반가운 척이라도 해주면 어디가 덧나나.
나는 라이언 황제에게 대충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갔다. 어차피 버린 자식인데 예의를 챙겨서 뭐 해. 고개 숙여 인사해 주는 걸 고맙게 여겨야 한다.
알현실 밖으로 나가니, 어제 보았던 시종이 후다닥 내게 달려와선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황자님, 전달할 사항이 있습니다.”
전달할 사항이 있다…라는 게 무슨 뜻이지?
나는 영문도 모른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시종은 자신의 오른쪽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내, 내 앞에서 읽기 시작했다.
“내일은 제국민들의 민심과 안정을 위해 수도와 주변 지역 행차를 하셔야 합니다. 그저 마차 안에서 손만 흔들어 주면 되는 것이니 큰 무리는 없을 겁니다. 그리고 사흘 뒤, 황후마마께서 황자님을 오찬에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나흘 뒤, 아스본 왕국의 사절단이 도착합니다. 축하 연회가 열릴 예정이니, 황자님께서도 참석하셔야 합니다. 세부사항은 황자님의 궁으로 따로 전해 드리겠습니다.”
한마디로 ‘너 엄청 바쁘다.’라는 이야기다.
시종의 말이 점점 길어질수록 내 속은 썩어들어 갔다. 물론 표정 관리는 철저하게 하고 있다. 겁쟁이 4황자라면 아무리 짜증 나는 상황이어도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을 테니까.
“그래, 고맙네.”
“예, 마지막으로 폐하께선 용무가 많고 바쁘시니, 혹 폐하께 전하실 말씀이 있으시면 제게 알려 주십시오.”
나는 이어지는 시종의 말에 큰 소리로 의문을 표할 뻔했다.
어딜 봐서 저게 바쁜 사람이냐? 용무가 많고 바쁘긴 개뿔, 권태로움이 가득한 얼굴에선 광이 나더라.
오스먼드는 하루 종일 서류 지옥에 빠져서 일만 하던데, 라이언 저놈은 띵까띵까 놀면서 전부 부하들한테 일을 떠넘길 게 분명하다.
저런 것도 황제라고, 쯧.
나는 미간에 주름이 지는 것을 참으며 말했다.
“친절하게 일러 줘서 고맙네.”
“아닙니다, 그럼 살펴 가십시오.”
나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여 인사한 시종은 한 발자국 물러나 라이언 황제가 있을 알현실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는 황궁 복도는 휑했다. 표정 관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오자, 난 줄곧 짓고 있던 웃음을 지웠다.
역시 오는 게 아니었다. 오스먼드가 뭐라 해도 그냥 프레오나에 붙어 있어야 했다. 괜히 잠시라도 프레오나를 벗어나 보겠다고 세네카를 좋게 평가해서는 안 됐었다.
“후….”
그나저나 얘네는 어디 간 거야?
나는 주위를 둘러보며 같이 온 일행을 찾았지만, 그들의 머리털 하나 볼 수 없었다.
젠이나 보리언은 프레오나 사람이라 조금 걱정이 되었지만, 아무래도 마린과 함께 갔을 테니 큰일이 날 것 같지는 않았다.
아무리 찾아도 단서 하나 찾지 못해, 나 혼자라도 파시테 궁으로 돌아가야 하나 생각할 때쯤이었다. 알현실로 들어갔던 시종이 다시 나와 내게 말을 걸었다.
“황자님, 죄송합니다. 제가 깜빡 잊고 전하지 못한 말이 있습니다. 로이븐 황태자님께서 손님들을 데려가셨습니다.”
시종은 내 일행을 로이븐이 데려갔다고 말했다. 그리고 밖으로 나가면 로이븐이 보낸 마차가 준비되어 있으니 그걸 타고 로이븐의 궁으로 가라고 했다.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주먹을 꽉 쥐고 허공으로라도 펀치를 날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꾹 참고 감사 인사를 하고 황궁 밖으로 나갔다.
시종의 말대로 황궁 앞에는 로이븐이 보낸 듯한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의심을 품으며 그 마차에 탔고, 다행히 누군가가 꾸민 음모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른 곳으로 빠지지 않고 로이븐의 궁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4황자의 궁인 ‘파시테 궁’은 화려한 세네카에 비하면 초라하다. 하지만 황태자인 로이븐의 궁은 명실상부 ‘세네카’였다.
황자들 사이에서도 서열이 갈리겠지만, 너무나도 차별이 극명하게 보여 혀를 내둘렀다. 그때 멀리서 나를 반기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미르! 네가 너무 보고 싶었다, 내 아우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로이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