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세네카 제국으로 향하다 (11)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전, 마지막 휴식을 즐기는 기분으로 젠과 함께 침대에 누워 가볍게 스킨십을 하며 장난을 치고 있을 때였다. 분위기를 와장창 깨 버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 아무도 없는 척을 할까 했지만 그동안 밖으로 나가겠다고 언질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자는 척을 할까도 싶었지만 아직 이른 저녁이라 잘 시간이 아니어서 애매했다.
나는 결국 젠의 품에 안긴 채, 한숨을 크게 쉬었다. 그리고 대충 벗어 뒀던 가운을 걸치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젠장. 이래서 황궁에서 살면 안 된다니까. 사방이 눈이고, 사방이 감시다.
문을 열기 전, 거울을 보며 머리를 다듬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빗어 깔끔해진 다음, 문을 살짝 열었다.
“무슨 일이야?”
“황자님,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내 말에 시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 뒤통수가 싸한 느낌을 받았다.
설마… 설마 진짜 왔다고? 그것도 이 시간에?
반신반의하며 시종에게 누가 찾아왔냐고 물었다. 그에 시종은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성녀님이 오셨습니다.”
“허어… 진짜 왔어?”
나는 혼잣말을 하며 놀랐고, 시종은 자신한테 하는 말인 줄 알고, 당황스러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치겠네. 올 거면 내일 오지, 짜증 나게 왜 사람 잘 쉬고 있을 때 오는 거야?
나는 깊은 빡침을 가라앉히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시종을 향해 말했다.
“응접실로 잘 모셔 오겠나? 빠르게 준비하고 내려가지.”
“네, 알겠습니다.”
“응, 고마워.”
나는 시종이 떠나자마자 바로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소리를 지르며 젠을 향해 달려갔다.
“으아악! 진짜 짜증 나!”
젠은 무시무시하게 달려오는 나를 받아서 끌어안아 주며 다정하게 달래 줬다.
혹시나 헷갈릴까 봐 다시 말하는 거지만, 내가 형아다. 내가 젠보다 몇 년은 더 많이 살고, 몇 년을 더 많이 숨 쉬었다.
“성녀가 온 건가요?”
“응… 하, 너무 짜증 나. 이 성녀는 내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거 같아.”
나는 내 앞길을 막는 성녀가 너무 싫다고 툴툴거리며 젠에게 한탄했다. 그에 젠은 반쯤 풀린 자신의 셔츠를 채우며 나를 향해 옅게 웃어 줬다.
“다음에 하면 되죠.”
“내일부터 3일 내내 바쁠 예정이야. 언제 시간이 날지 모른다구….”
“저도 당신과 함께하는걸요.”
젠은 손을 뻗어 따듯한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그리곤 내 이마 위로 짧게 입을 맞춰 줬다.
나는 그 다정한 온기에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달빛이 쏟아지는 절벽에서 처음 입맞춤을 했을 땐, 둘 다 처음이라 쑥스럽고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랐었는데, 이제는 그때와 비교해서 조금 능숙…?해진 것 같다. 아마도.
젠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시도 때도 없이 내게 입을 맞춰 줬다. 그러니 그의 입맞춤에 익숙해지지 않을 수가 없지.
하지만 항상 가벼운 입맞춤이 전부고, 진한 입맞춤은 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아직 익숙하지 않은 키스를 하게 되면 부끄러워질 게 분명했다. 성녀 이 망할 것.
나는 입고 있던 가운을 벗고, 성녀를 만나기 위해 단정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나한테 가장 잘 어울리는 하얀 포엣 셔츠와 목 부분에는 검은 리본을 둘러서 묶었다. 하지만 아무리 묶어도 예쁘게 묶이지 않아 젠에게 묶어 달라고 부탁했고, 젠은 섬세한 손길로 예쁜 리본을 만들어 줬다.
“여기도 묶어 줘.”
나는 젠을 향해 두 팔을 내밀어 소매에 달려서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는 끈을 리본으로 묶어 달라고 했다. 그에 젠은 가볍게 웃으며 양팔에 달린 리본을 묶어 줬다.
“고마워.”
나는 젠에게 감사 인사를 한 뒤, 팔을 내리려 했지만, 젠이 내 팔목을 잡고 놔주지 않아서 내리지 못했다.
가만히 내 눈을 바라보는 젠의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지금이 그 부끄러워질 신호인가 하며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이어진 젠의 말에 열심히 뛰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제가 같이 가도 될까요?”
그의 물음에 나는 잠시 고민을 했다.
솔직히 같이 가 주면 나야 심심하지 않고 좋을 테지만, 그 돌팔이 성녀가 내 면전 앞에서 대놓고 ‘너는 죽을 운명이다’, ‘너는 곧 죽는다’ 이런 소리를 하면 내 기분은 물론 젠의 기분도 나빠질 테다. 그렇게 되면 젠이 그 성녀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마음에 걸리는 것은, 성녀가 젠한테 반하면 어떡해?
젠은 누가 봐도 매력적이고 잘생기고 완벽한 이 시대의 조각이라 아무한테나 못 보여 준다.
“아니야. 나 혼자 갈게.”
“괜찮겠어요?”
“응, 당연히 괜찮지. 분위기가 이상하면 소리 지를게.”
“그때는 늦어요.”
어떻게 해서든 내 곁에 있고 싶다는 젠을 바라보며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얼굴을 가릴까요?”
내 고민을 알아챈 젠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나는 치부를 들킨 듯한 기분에 민망해졌다. 젠을 바라봤다. 그에 젠은 내가 뭘 생각하는지는 다 알고 있다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아니야. 안 가려도 돼.”
어차피 넌 내 거잖아.
나는 젠과 마주 보며 그를 향해 방긋 웃었다.
잘난 애인이 있는 사람들은 꼭 명심해야 한다. 질투는 해도, 집착은 하지 말아야 한다.
나중에 시간이 나는 대로 건강한 연애 생활에 대한 책을 읽어야겠다. 그런 책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찾으면 어딘가에는 있겠지.
* * *
나는 멀끔해진 몰골로 방 밖으로 나와 성녀가 기다리고 있을 응접실로 향했다.
가는 길 지루하지 않게 젠과 끝말잇기를 하며 걸었는데, 습관적으로 계속 행인, 정인, 죄인, 같이 같은 글자로 끝나는 단어를 말하는 바람에 은근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다.
치열한 접전 끝에는 젠이 더 이상 ‘인’으로 시작하는 단어를 말하지 못해 이번 끝말잇기는 나의 승리로 끝이 났다.
점점 가까워지는 응접실, 파시테 궁에서 처음 보는 시종이 대기하고 있었다. 아마 성녀의 시종인 것 같았다. 나는 시종의 인사를 받으며 응접실 안으로 들어갔다.
“4황자 전하께서 들어가십니다.”
나를 소개하는 시종의 안내가 끝나자, 문이 천천히 닫혔다.
눈앞에 보이는 건, 소파에서 일어나 나를 바라보고 있는 화려한 금발의 여자였다.
저 여자가 성녀구나.
선한 인상이긴 했으나, 보통 ‘성녀’를 생각하면 딱 떠오르는 인상과는 조금 달랐다.
아주 연한 금발과 밝은색의 노란 드레스, 그리고 분홍빛 눈동자와 얇은 입술은 그냥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아니, ‘어디서나’까지는 조금 무리고. 100명 중 한 명 있는 아리따운 귀족 영애였다.
나는 여자를 빤히 바라봤고, 여자는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는 우리를 바라보곤 입을 떡 벌리며 정신을 놓은 듯 중얼거렸다.
“지져스….”
저럴 줄 알았어. 당연지사 눈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 젠 얼굴 보고 정신을 못 차리는… 잠깐, 뭐라고…?
“영애, 제가 잘 듣지 못해서 그런데 방금 뭐라 하셨습니까?”
“예…? 아, 그냥 감탄사였습니다. 큰 의미는 없으니 신경 쓰지 마시지요.”
성녀는 내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한 뒤, 바로 옆에 있는 소파에 앉아 고고한 자세를 취했다.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분명 ‘지져스’라 했는데… 언제부터 이 세계의 신인 아딘의 이름이 예수가 됐어?
내가 잘못 들었을 수도 있겠지만 어찌 됐건 찜찜함을 지울 수 없었다.
“우선, 바쁘실 텐데 찾아와 줘서 고마워요. 카트린 영애. 그리고 내가 시간이 많이 없어서 그런데, 바로 본론을 이야기해 줄 수 있을까요?”
나는 나긋하면서도 날카로운 말투로 성녀를 향해 말했고, 성녀는 잠시 나를 바라보며 넋을 놓고 있었다.
이제 보니 젠이 아니라 내 얼굴을 보고 놀란 것 같다.
그래, 이해해. 이 세계에서 미인 대회를 연다면, 내 위로 아무도 없을걸.
“카트린 영애.”
나는 성녀의 이름을 부르며 그녀가 정신을 깨웠다. 그에 성녀는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내 얼굴을 바라보던 시선을 살짝 비스듬하게 돌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내 얼굴을 바라봤다.
나는 그런 성녀를 보며 작게 미소를 지어 줬다.
“크, 큰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황자님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뿐이었죠.”
“저를 말입니까?”
나는 성녀에게 왜 나를 만나고 싶었냐고 이유를 물었지만, 성녀는 얕게 웃는 얼굴로 대답을 회피했다.
“카트린 영애.”
“네, 황자님. 듣고 있습니다.”
“어째서 나를 확인하고 싶었는지 그 이유를 물었는데, 답을 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다시 한번 콕 집어서 이야기하자, 성녀는 미소 짓던 표정을 지우고 입꼬리를 한쪽으로 삐쭉 올렸다. 그러자 그녀의 왼쪽 볼에 보조개가 예쁘게 팼다.
그 모습이 예쁜 건 둘째치고, 고위 가문의 영애로 태어난 자의 행실이랑은 조금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아무리 내가 힘없는 황자라지만, 간단한 예의 정도는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
나는 조금 굳은 얼굴로 성녀를 바라봤고, 성녀는 나를 빤히 바라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시다시피 제게 내려진 신탁과 다른 삶을 살고 계시더군요. 그래서 신기했던 것뿐입니다.”
“신탁이라면….”
“2황자님께서 알려주지 않으셨습니까?”
정확히 말하자면 필릭스에게 들었지만, 접때 메이븐도 말해 줬으니 다를 거 없겠지.
나는 성녀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성녀는 내게 조심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자세한 이야기는 해 드릴 수 없으나, 제게 내려온 신탁에 의하면 황자님께서는 프레오나에서 삶을 마감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프레오나의 정권이 교체되고 새로운 황제가 나왔는데도, 황자님께서는 멀쩡하게 살아계시더군요. 전 그게 의문이었습니다.”
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는 성녀를 바라봤다. 성녀의 표정은 순수하게 의문을 띄우고 있었다. 내가 죽길 바라서 악담을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신탁이든 예언이든 뭘 들은 것처럼 말이다.
성녀를 보기 전까지만 해도, 날 저주한 돌팔이의 머리끄덩이를 잡아서 돌팔이 아니냐고 바득바득 뜯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생각보다 멀쩡해 보여서 놀라는 중이다. 실력 있는 돌팔이인가….
나는 내 옆에 가만히 서서 아무 말 없는 젠을 바라봤다. 젠은 성녀를 바라보며 조금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설마 했더니….
나는 성녀를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너 정체가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