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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50화 (150/227)

150 세네카 제국으로 향하다 (12)

“너 정체가 뭐야.”

내 물음에 성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정체라니 그게 무슨….”

아까부터 은근히 수상쩍었는데, 젠의 반응을 보니 감이 오는 것 같았다.

젠이 성녀를 보고 놀란 이유가 대충 예상이 된다.

성녀의 미모 때문은 아니다. 그녀가 다른 영애들에 비해 아름다운 편이긴 하지만, 나보다는 아니다. 내가 옆에 있는데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오겠어?

결정적으로 젠은 타인의 생김새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내가 마커스의 몸에 들어갔어도 좋아했을 거라는 사람이 외모를 따질 리가 없지.

게다가 젠과 성녀는 대화는 물론 인사조차 나누지 않은 초면이다. 그런 상대에게 젠이 놀랄 이유는 딱 하나다.

영혼의 색.

분명 저 성녀도 나처럼 이곳 사람들과 다른 영혼의 색을 가진 게 분명하다.

나는 젠의 소매를 살짝 잡아 내게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에 젠은 조금 떨리는 눈동자로 나와 시선을 마주했다.

“무슨 색이야?”

내 질문에 젠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당신과 같은 색이요.”

그럴 줄 알았다.

나는 젠의 소매를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성녀를 바라봤다. 성녀는 동공이 마구 흔들리는 와중에도 표정을 가다듬고 있었고, 나는 그런 성녀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너도 전생자야?”

성녀의 흔들리던 동공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다짜고짜 전생자냐고 묻는 것보다는, 안정감을 주는 게 좋을 거라 생각했다. 그래서 ‘너도’라는 단어로 우리가 같은 상황이라는 것을 은연중에 알렸다.

그에 성녀는 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말했다.

“너도…라니요?”

“난 전생자니까. 너도 전생자 아니야?”

내 말에 성녀는 크게 놀란 듯 입을 떡 벌렸다. 곧이어 소름이 돋았다는 듯 두 팔을 감싸고 문질렀다. 그러고는 고고하게 앉아 있었던 그녀가 내 쪽으로 몸을 쭉 빼며 누구에게 쫒기는 것처럼 급하게 말했다.

“그쪽도 전생자예요? 와, 대박, 진짜 꿈이 아니었구나…. 하긴, 꿈 치고는 너무 길었지…. 그럼 그쪽은 어느 나라 사람이에요? 외관도 다를 테고, 할 줄 아는 말도 똑같아서 겉으로는 모르겠어요…. 코리아? 아메리카?”

“….”

“둘 다 아니에요? 그럼….”

성녀는 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나라를 이야기하려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말을 끊고 한국이라 대답했다. 그러자 성녀는 사막에서 오아시스라도 찾은 듯 기뻐하곤, 호들갑을 떨며 말했다.

“저도요! 와! 어쩜 이런 우연이!”

성녀는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내 손을 쥐며 기뻐했다.

“동포끼리 정보 공유 좀 해 주세요. 혹시 돌아가는 방법 아세요?”

성녀는 돌아가는 방법을 찾고 있던 건지 희망을 가지고 내게 물었지만, 안타깝게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다.

“알았으면 이미 돌아갔겠….”

나는 내 옆에 있는 젠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돌아가고 싶다는 건 절대 아니고, 그냥 예를 들어 한 말이다. 알았으면 이러이러했겠지, 같은. 절대로 돌아가고 싶어서 한 말이 아니다.

나는 젠을 바라보며 내 의견을 표명했고, 젠은 알아들었다는 듯 살포시 웃었다.

반대로 돌아가는 방법을 모른다는 내 대답을 들은 성녀는 전보다 시무룩해진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아… 역시 그렇죠?”

“네, 그렇죠.”

같은 동방예의지국 사람으로서 그녀에게 존댓말로 대꾸를 했다.

방금 전까지는 세네카 제국의 4황자인 나와, 세네카 제국 카트린 후작가 영애이자 성녀로서 이야기했다면, 지금은 같은 전생자이자, 같은 나라 사람으로서 이야기하는 거니까 존댓말을 해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었다. 그녀가 진짜 ‘예언의 힘’이 있는 성녀냐는 거다. 만일 그 힘이 이 세계로 넘어오면서 생긴 힘이라면, 어떻게 빙의를 했는지도 궁금하다. 넘어오게 된 이유와 목적이 뭘까?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됐는지 물어보려 했지만, 그녀의 말이 더 빨랐다.

“일단 자기 소개부터 할까요…? 저는 18살 신지아라고 해요. 그쪽은요?”

18살이면 고등학교 2학년이라는 소리다.

허어… 새파랗게 어리네. 아, 새파랗게까지는 아닌가. 그래도 어리다.

난 18살 때 뭐 했더라. 그냥 아프기만 했던 것 같은데.

“몇 살이더라…. 26이었나. 그리고 전 이름이 없어요. 기억하질 못하거든요.”

“기억이 없다니요?”

“당신이 이곳으로 어떻게 오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난 기억을 대가로 여기에 오게 된 거예요.”

“기억을요?!”

“전부는 아니고, 그냥 몇 가지 기억이요.”

내 말에 성녀, 신지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라 했다. 표정 변화가 시시각각 바뀌는 그녀를 계속 보니 조금 풋풋한 귀여움이 느껴졌다.

“몇 가지여도 기억이 사라진 건데…, 괜찮아요?…”

“괜찮아요. 유용한 기억도 아니었으니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솔직하게 아깝다고 생각은 한다.

이도연이 아닌 다른 이름의 기억에는 조금 더 총명하고 지혜로운 기억들이 있을지 누가 알겠나. 그래도 엄청 아까운 건 아니다.

혹시 모르지, 그때도 똘똘했던 내가 이도연이 아닌 다른 이름에 안 좋은 기억이 있어 의도적으로 지우려 했는지.

“당신은 이곳에 어떻게 오게 된 거예요?”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이곳으로 오게 됐는지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표정을 확 찌푸리며 지난날을 회상했다.

“그날은… 비가 아주 많이 오는 날이었어요.”

시작은 폭우였다. 학원을 가야 하는데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우산도 없어서 폭우를 피하려 낡은 서점에 들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택시를 불렀어요. 학원까지 타고 가려고.”

택시가 오는 동안 낡은 서점에서 볼 게 없나 둘러보던 중, 하얀색 커버로 덮인 얇은 책을 발견했단다. 택시를 기다리는 시간에 읽기 딱 적당한 것 같아 책을 펼치니 어떤 소녀의 일기가 펼쳐졌다.

“로지아 카트린의 이야기였어요. 성녀로 깨어나기 전의 일부터 성녀로 깨어나서 결혼까지 하게 된 이야기요. 아,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던 때는 빼고요.”

몇 월 며칠 이런 일이 일어났다. 아딘의 부름을 받았다. 내 마음을 알아주지 못해 속상했다. 그의 작은 친절에 설랬다. 등등 다양한 이야기가 있었다.

“원래 남의 일기 읽는 게 제일 재밌잖아요. 학원도 안 가고 계속 읽었어요. 얇은 책이라 내용도 얼마 없을 줄 알았는데 종이가 얇은 거더라구요. 아무튼 어두워질 때까지 계속 읽다가, 아이를 낳고 이제 새로운 일기를 사야겠다는 마지막 장을 읽고 나서 정신을 잃었어요.”

눈을 떴을 때 높고 낯선 천장이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은 진한 향기를 풍기는 휜 꽃에 둘러싸인 채 있었다고 했다.

“어이가 없었죠. 무슨 상황인가 싶고. 다행인지 언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거 있죠?”

언어는 알아들을 수 있었지만, 글씨는 어떻게 쓰는지 몰라 배워야 했고, 게다가 생활 방식까지 달라서 옷을 어떻게 입는지, 밥은 어떻게 먹는지 등등 아무것도 모르겠다고 했다.

결국 신지아는 다른 이들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 기억상실이라는 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다시 배웠다.

그녀가 기억상실이라는 것을 아는 자는 그녀의 아버지인 카트린 후작과 후작가의 몇 명뿐이란다.

“그래서 글씨가 많이… 그랬었군요.”

“아직도 엉망이에요? 하… 여기 글씨가 무슨 러시아 글씨 같아서 아무리 배워도 모르겠다니까요?”

나는 고개를 저으며 크게 한숨을 내쉰 그녀에게 말했다.

“시녀한테 대신 써 달라고 하세요.”

“아! 그런 방법이…!”

뭔가 대단한 발견을 한 것 같은 그녀의 표정에 미소가 지어졌다.

“아무튼 그렇게 오게 됐어요. 그리고… 괜찮으시다면 편하게 대해도 될까요? 그리고 저한테 말 편하게 하세요.”

조금 머뭇거리며 하는 말이 나를 편하게 대해도 되겠냐는 거였다.

나는 안 될 거 없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녀는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오빠는 어떻게 오게 된 거예요?”

18살한테 오빠라고 불리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렇다고 아저씨라 부르라기에는 너무 나이 든 것 같고… 삼촌은 뭔가 아닌 것 같고. 오빠와 아저씨 사이에 무언가가 없나?

“나는….”

‘악마랑 계약해서 왔어’라고 말하면 놀라려나.

아니지, 18살이면 사리 분별 정도는 다 할 텐데. 어린애도 아니고 내가 신경 써 줄 필요는 없지.

“악마랑 계약해서 왔어.”

나는 그녀에게 내가 겪은 대략의 일을 이야기했다.

아팠던 유년 시절과 운 좋게 심장 수술을 받은 이야기. 그 이후로 아픈 곳 하나 없이 멀쩡해졌다. 하지만 그 수술은 누군가가 날 위해 삶의 기회를 넘겨준 것이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 채 평범하게 살았다.

하지만 몇 년 뒤, 친형과도 같은 형이 나를 위해 자신의 기회를 넘겨줬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살려준 형을 위해 악마와 계약해 형을 살리고 그대로 이곳에 오게 됐다.

짧은 내 이야기를 들은 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정말 슬픈 이야기라고 했다.

“오빠 의리 있으시네요… 멋져요. 저는 겁쟁이라 오빠처럼 그렇게 못했을 거예요.”

나는… 의리 있는 게 아니라, 죄책감을 느끼기 싫어한 거다.

물론 형을 살리고 싶다는 마음도 컸지만, 그것보단 나 때문에 형이 망가지고 죽어 간다는 게 싫었다. 형의 부모님은 내게 별말씀 하지 않았지만, 눈에선 나를 향한 원망을 숨기지 못했었다.

오로지 형의 선택이었지만, 나 때문에 형이 그렇게 된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기분을 느끼기 싫었다. 그래서 악마와 거래를 한 거다. 내가 형을 살려줬으니까, 내 탓 하지 말라고, 내 잘못 아니라고.

“내 이야기는 이게 전부야, 나는 네가 더 궁금해. 진짜 예언을 할 수 있는 거야?”

내 말에 지아는 조금 부끄러운 듯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제가 했던 예언은 일기장의 내용 중 일부를 말한 거예요. ”

그래서 나에 대한 예언이 틀린 거였다.

지아가 읽었다는 카트린 영애의 일기장 속 4황자는 내가 아니라 겁쟁이 4황자였을 테니까.

“그럼 그 일기장에서는 4황자가 프레오나에서 죽어?”

“네, 되게 처참하던데요?”

지아는 내게 일기장에서 봤던 이야기를 해 줬다.

전쟁에서 패한 세네카는 프레오나 제국에 보내는 볼모로 겁쟁이 4황자를 보냈다.

여기까지는 똑같다.

“세네카의 악몽이 오빠에게서 시작해요.”

지아는 소름이 돋는지 몸을 부르르 떨며 침착하게 말했다.

“조금… 그런 말이긴 한데… 4황자가 프레오나로 간 다음에 그쪽 망나니 황태자한테 그… 밤에 만나는 그런 걸로 굴려졌대요. 그러다가 그쪽 2황자가 반정을 일으키면서 4황자를 황태자 사람으로 착각해 싹둑 해 버리는 바람에 세네카가 난리 났었죠.”

다 예상 가능했던 일이다.

내가 갔을 때도 타루스는 나를 탐하려 했었다. 유약한 겁쟁이 4황자는 타루스에게 반항 한번 못하고 당했겠지…. 타루스, 이 쓰레기 새끼. 올바른 죽음이 있다면 타루스의 죽음을 뜻하는 걸 거다.

그리고 오스먼드가 착각해서 4황자의 목을 쳤다고? 그럴 리가 없다. 오스먼드는 착각이 아니라 일부러 그런 거다. 전쟁을 다시 일으키려고.

“4황자의 일이 세네카에 알려지자마…”

똑똑-

지아가 이야기를 이어가려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리며 밖에 있는 시종의 외침이 들려왔다.

“로이븐 황태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형이 여길 왜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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