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세네카 제국으로 향하다 (15)
다행히 퍼디스나 나를 위험에 빠뜨리고 싶어 하는 누군가가 꾸민 일이 아니었다.
나는 한껏 마음을 놓았고, 남자를 향해 무슨 일이냐며 4황자 특유의 좋은 성격을 연기하며 이야기했다.
“미안하네, 마음 같아선 좋은 자리로 옮겨 천천히 이야기를 듣고 싶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서 말이야…. 무슨 일로 나를 찾는 것인지 물어도 되겠나?”
그에 나를 향해 열렬한 애정을 보내던 남성은 눈물을 훌쩍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혼란스럽게 해서 정말 죄송합니다…. 제 이름은 반스라고 합니다. 저는 꽤 오래전, 황자님의 모친이신 레이트라 님께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훌쩍거리던 반스의 말이 시작되자, 군중들은 소곤거리던 입을 다물고, 반스에게 집중하기 시작했다.
“저는 일찍이 부모를 잃어 빈민가를 전전하던 아이였으나, 레이트라 님 덕분에 그곳에서 벗어나 평범한 생활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저를 제외하고도 많은 이들이 레이트라 님 덕분에 지옥에서 벗어나 살아갈 수 있게 됐습니다.”
반스가 말하는 상황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아주 작은 조각이긴 하지만, 레이트라의 행동을 질타하는 여타 귀족들의 목소리가 4황자의 기억에 아직 남아 있다.
4황자의 친모인 ‘레이트라 미카프란체’는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자신의 마법을 사용해 제국민들의 편의를 챙겼고, 빈민가를 찾아다니며 빈민을 구제하는 일을 했다.
그리고 대다수의 귀족은 그런 레이트라의 행동을 손가락질했다. ‘그녀는 귀족답지 않아’, ‘그녀가 하는 짓은 쓸데없어’, ‘그녀는 우리 귀족의 권위를 망가트리고 있어.’ 등등 레이트라의 좋은 행동을 깎아 내렸다.
“레이트라 님이 그렇게 되신 게… 마치 저희 탓인 것 같았습니다.”
레이트라는 마탑주가 될 인재였으나, 라이언 황제의 눈에 들어 황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황비가 된 레이트라는 4황자를 낳은 뒤, 잠시 조용히 사는가 싶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빈민가 구제에 힘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떤 연유인지 미카프란체 가문이 반역을 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그것은 사실로 판명이 됐다. 때문에 라이언의 피를 이은 4황자를 제외한 미카프란체의 모든 사람이 사형을 당했고, 마법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미카프란체’가문은 멸문했다.
하지만 레이트라를 애정하고 존경하던 제국민들은 미카프란체 가문에 대해 다르게 생각했다. 그들은 빈민가를 구제하거나, 제국민의 편의를 위해 마법을 쓰는 레이트라가 귀족들의 눈엣가시가 되는 바람에 봉변을 당했다고 생각하며 미카프란체가 반역을 했다는 이야기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제국민들은 자신들을 위해 힘쓰고 존중해 주던 레이트라의 자식인 4황자를 안타까워하며 좋아해 주는 것이다.
나는 레이트라를 많이 닮았으니까.
푸른 바닷속 산호초 같은 선명한 코랄 빛의 머리 색, 투명하고 총명한 보랏빛 눈, 하얀 피부, 그리고 웃는 모습까지, 완벽한 레이트라의 아들이다.
“정말 죄송하고 감사하단 말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그렇기에 기회가 온 지금 어떻게 해서라도 황자님을 뵙고 싶었습니다. 이런 제 욕심 때문에 전하의 행차를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신경 쓰지 말게, 나는 괜찮아.”
나는 몸을 숙이며 미안해하는 반스를 달랬다. 그러자 그는 잠시 숨을 고르며 품속에 있던 무언가를 꺼내 내게 건넸다.
“이것을 전해 드리고 싶었습니다.”
반스가 건넨 것은 육각기둥으로 잘 깎인 새끼손가락만 한 자수정이었다.
나는 그 자수정을 이리저리 살피며 그에게 물었다.
“이게 무엇이지?”
“이것은 레이트라 님께서 제게 남기고 가신 것입니다.”
반스는 고개를 살짝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눈물이 고여 있는 그의 눈은 사뭇 진지해졌다. 그리고 그가 이야기를 시작하려 할 때, 나는 그의 말을 멈추고 메이븐의 호위 기사를 향해 말했다.
“이자와 조용히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 잠시 기사들과 사람들을 물려줄 수 있겠나? 조금 멀리 떨어져 주기만 하면 되네.”
내 말에 메이븐의 호위 기사는 가까이에 있던 기사들과 제국민들을 물렸다. 그리고 나는 반스와 높이를 맞추려 몸을 숙이곤, 낮은 목소리로 시작되는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몇 년 전, 레이트라 님이 저희 마을에 찾아오셨습니다. 또 다른 빈민들을 데리고 오셨죠. 그때는 레이트라 님의 가문이 반역을 꾀한다는 소문이 돌던 때였습니다.”
레이트라는 자신의 가문이 위험에 빠져 있을 때도 어김없이 빈민가를 구제하고 다녔다.
정말 대단한 여성이다.
“그랬었군….”
“네, 저는 레이트라 님을 향해 인사를 했고, 정말 감격스럽게도 레이트라 님이 저를 알아보았습니다. 전에 만났었던 성실했던 청년이라면서 저를 반겨 주셨었죠.”
“그래, 어머님은 기억력이 좋았지, 자신이 만난 사람은 절대 잊지 않으셨어.”
“네, 맞습니다. 레이트라 님은 저와 함께 빈민가를 빠져나왔던 이들의 근황이나 제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궁금해하셨습니다.”
반스는 그때를 생각하면 울컥하는지, 다시금 눈물을 훔쳤다. 그러고는 울먹이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크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었다.
나는 그런 그에게 인자한 웃음을 지어 주며, 그가 진정하고 다시 이야기하려 할 때까지 천천히 기다렸다.
“그렇게 레이트라 님과 이야기를 이어 가던 와중, 무장을 한 기사들이 들이닥쳐 레이트라 님을 잡아갔습니다.”
“아….”
“그때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여기 있는 쌍둥이가 태어나는 날이었습니다. 레이트라 님은 저희 아이들의 축복을 빌어 주셨었죠.”
나는 아직 어린 나이인 쌍둥이를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반스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눈시울을 다시금 붉혔다.
“그 자수정은 레이트라 님께서 그때 제게 넘겨 주신 물건입니다.”
“어머니께서…?”
“예, 맞습니다. 레이트라 님이 제게 이것을 주실 때 아무 말씀 하지 않았지만, 저는 이걸 황자님께 전해 드려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반스가 건넨 자수정은, 4황자의 어머니인 레이트라가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다.
4황자가 가지고 있는 레이트라의 마지막 기억은, 4황자가 잠들기 전에 돌아와 전에 읽지 못했던 동화책을 읽어주겠다는 레이트라와의 약속이다.
그날 이후, 레이트라는 감옥에 갇혀 아무도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며칠 뒤 그녀의 숨이 끊어졌다.
반역자는 그의 신분이 어떻든 장례도 제대로 치르지 못한다.
4황자는 라이언 황제의 명령으로 인해 파시테 궁에 갇혀 몇 달을 나오지 못했었고, 당연하게도 레이트라의 마지막 가는 길을 봐 주지 못했다.
남겨진 4황자의 비통하고 원망스러운 기분이 느껴졌다.
“고맙네…, 이건 내 어머니의 마지막 유품이야.”
나는 반스를 향해 차분히 감사 인사를 했다.
라이언 황제는 레이트라의 궁을 태우고 부쉈다. 그리고 그녀가 가졌던 것들을 전부 없앴다. 아주 큰 가구부터 작은 장신구 하나까지 모조리 없앴다.
4황자가 가진 유일한 레이트라의 유품은, 어릴 적 필릭스와 함께 숨겨 놨던 죽은 마나가 전부였다.
나는 반스에게 어머니의 유품을 전해 줘서 다시 한번 고맙다고 이야기했고, 내 길을 막아선 그에게 아무런 책임을 묻지 않도록 호위 기사를 불러 부탁했다.
그에 호위 기사는 그렇게 조치하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이제 출발해야 저녁에 황궁으로 들어갈 수 있다며 그만 길을 떠나자고 나를 설득했다.
“그럼 나는 가 보겠네. 이렇게라도 어머니의 유품을 전해 줘서 고마워.”
“예, 전하. 항상 평안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는 반스를 향해 작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마차 안에는 내가 언제 돌아오나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노반이 있었고, 내가 마차 안으로 들어가 모습을 보이자, 노반은 소리 없이 방방 뛰며 나를 반겨 줬다.
나는 자리에 앉아 노반을 안아 올려 무릎에 앉힌 채, 반스에 받은 자수정을 다시 한번 살폈다.
“이걸 어쩌나….”
오늘 일은 분명 라이언 황제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라이언 황제는 레이트라의 물건을 전부 없앴다. 내가 이 자수정을 받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이것 또한 가져가서 없애겠지.
뭔가 숨기고 있는 게 있다.
그녀의 관한 단편적인 기억을 가지고 있는 내가 봤을 때도 자애로운 황비 레이트라의 죽음과 미카프란체의 멸문은 석연치 않은 점이 많다.
우선 반역, 도대체 무슨 반역을 꾀했다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미카프란체 가문은 반역을 해서 얻는 이득이 없다. 그들은 레이트라가 유일한 자식이었고, 위치도 꽤나 높아 그들은 그들의 생활에 만족하고 풍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게다가 미카프란체 가문이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증거가 공개되지 않았다. 그저 반역을 저질렀다는 라이언 황제의 전언과 몇몇 귀족들의 동의만으로 미카프란테 가문은 멸문했고, 레이트라는 죽었다.
내가 진짜 레이트라의 자식이었다면 어머니의 오해와 억울함을 풀려고 노력했겠지만, 글쎄….
사실 억울함을 풀어 주고 싶어도, 내게는 그럴 힘이 없다.
프레오나에서는 오스먼드를 잘 구슬리고, 영혼의 맹세로 협박을 하면 어느 정도 먹혀 들지도 모르겠지만, 라이언은 아니다.
나는 라이언의 약점을 잡은 것도 없고, 그와 대면하기조차 꺼려진다.
내가 창피해서 말은 안 했지만, 4황자의 기억에 있는 라이언 황제가 너무 무서워서 그런지, 전에 라이언 황제를 대면했을 때 조금 움츠러드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런 게 바로 각인된 공포라는 건가.
“…제까짓 게 무서워 봤자 사람이지.”
“꺙?”
내 혼잣말에 노반이 고개를 돌려 꺙? 하고 물었다. 덕분에 어두운 생각에서 벗어났다.
역시 우리 노반이 최고야.
“노반,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아들 된 도리는 해야겠지?”
“컁!”
“그렇지. 그게 아들의 몸을 받은 최소한의 예의겠지.”
자의가 아니었다고 한들, 지금의 나는 세네카의 4황자다.
어머니의 복수, 까짓것 한번 해 보지 뭐. 특이점이라면 그때가 언제 올지 모른다는 거지만.
세네카를 깡그리 망하게 하면 로이븐이나 여타 다른 애들이 걸리고, 그렇다고 라이언의 목만 쓱싹하기에는 호위를 뚫기가 어려울 것 같고….
하아… 세상에 쉬운 일 하나 없다.
“뒷일은 나중에 생각하자. 일단 이것부터 해결해야 하는데…, 내가 자수정이 있던가.”
나는 반스에게 받은 자수정을 살펴보며 생각에 빠졌다.
나를 제외하곤 이걸 자세히 본 사람은 없을 거다. 라이언 황제가 이걸 가져오라고 한다면, 아무 자수정이나 내밀어 상황을 모면할 수 있을 거다.
나는 아공간 주머니를 뒤져 수많은 보석들 중에 레이트라의 자수정과 가장 비슷한 자수정을 찾아 손에 꽉 쥐었다.
어머니의 마지막 유품이니 뺏기지 않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