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 세네카 제국으로 향하다 (16)
우리가 탄 마차는 어느새 파시테 궁으로 도착했고, 성문 앞에는 멀끔한 모습의 젠이 마중 나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젠!”
나는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젠을 부르며 그에게 달려가 안겼다. 그에 젠은 나를 한 손으로 안아 들고 살포시 웃었다. 그러고는 다정하게 물었다.
“잘 다녀오셨어요?”
“응, 완전.”
그는 나와 시선을 맞췄다.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우리 사이에 딱 붙어 끼어 있던 노반이 앞발을 구르며 떨어지라고 성질을 냈다.
그에 젠은 내가 안고 있는 노반을 빼앗아 들고는, 몸부림을 치는 노반을 향해 물었다
“노반, 제가 준 임무는 잘 수행했나요?”
“컁!”
“네, 잘한 것 같네요. 약속대로 원하는 사탕 다섯 개를 줄게요.”
임무? 무슨 임무?
나는 의미심장한 대화를 주고받은 젠과 노반을 번갈아 보며, 임무가 무슨 뜻이냐 물었다. 그런 내 말에 그들은 비밀이라며 여상히 웃어넘겼다.
장난스러운 그들의 웃음에 나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치사하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런 내 표정에 넘어가지 않고 무슨 임무인지 알려주지 않으려는 그들의 태도에 결국 나는 백기를 들었다.
해가 져서 쌀쌀해졌기에 밖에서 이러지 말고, 얼른 들어가서 쉬자고 하려 할 때였다.
“이 형님은 눈에 안 보이는 것이냐?”
우리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로이븐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 있었대?
파시테 궁에 도착했을 때 나를 기다리고 있는 젠만 보였다. 그래서 로이븐은 있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로이븐의 뒤에 있는 피곤한 얼굴의 메이븐도 보였다.
나는 어째서 이 저녁에, 형님 두 분 다 파시테 궁에 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섭섭한 얼굴을 한 로이븐을 향해 말했다.
“아, 형님들 오셨습니까…? 언제부터 계신 겁니까?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그래, 아까부터 있었지. 꽤나 즐거워 보이는구나.”
로이븐은 내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해 준 뒤, 이를 꽉 깨무는 듯한 표정으로 젠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로이븐의 뒤에 있는 메이븐은 고개를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로이븐의 날이 선 시선을 받은 젠은 무표정한 얼굴로 로이븐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로이븐은 그런 젠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젠을 향한 로이븐의 주의를 돌리려고 급하게 말을 꺼냈다.
“죄송합니다. 제 시야가 좁아 형님들을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다. 우리가 네 시선이 닿지 않는 구석에 있기는 했지. 지역 행차는 잘 다녀왔니? 아, 이것도 이미 저자와 이야기를 나눴었지.”
그리 말한 로이븐은 젠을 바라보며 이를 으득 갈았다.
젠은 로이븐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굳이 비유를 해 보자면, 아끼던 여동생을 시집보내는 기분이랄까? 이 기분이 지금 로이븐의 기분과 가장 비슷할 것 같다.
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로이븐을 바라봤고, 그의 뒤에 있던 메이븐이 담담히 내게 물었다.
“내 호위 기사가 불편하게 하진 않았고?”
“네, 문제없었습니다. 덕분에 편하게 다녀왔구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내 말에 메이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다. 내 호위 기사보단, 네 연… 이프리트 경이 더 안심이 됐을 텐데.”
메이븐은 젠을 내 ‘연인’이라고 말하려 했지만, 로이븐의 뜨거운 눈빛에 의해 ‘이프리트 경’이라 바꿨다.
그리고 맞는 말이다. 젠이랑 갔으면 안전은 물론 심심할 걱정은 없지. 젠이랑은 지루한 끝말잇기를 해도 재미있을 테니까. 그렇다고 같이 갔던 노반이 재미없다는 게 아니라… 아무튼 젠이랑 함께하지 못해서 뿔이 조금 솟아 있긴 했다.
나는 메이븐의 말에 빈말이라도 ‘괜찮다’라거나 ‘아니다’라는 말은 하고 싶지 않았다.
메이븐과의 대화가 끝나고, 나는 아직도 젠을 향해 차가운 시선을 보내는 로이븐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형님들께서 제 궁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메이븐은 모르겠으나, 로이븐은 세네카 제국의 황태자씩이나 돼서 꽤 한가한 것 같다.
어제 오전, 황제와의 알현을 마치고 로이븐을 보았다. 저녁엔 지아랑 이야기하는 와중에 벌컥 로이븐이 들어왔고, 오늘도 어김없이 로이븐을 파시테 궁에서 만났다.
황제보다 만나기 어려운 사람이 황태자라는데, 그런 것치고는 세네카에 돌아오고 나서 로이븐과 꽤 많이 마주친다.
“나는 네가 돌아오는 걸 보고 가려 했다. 무사히 도착한 걸 봤으니 이제 나도 돌아가야지.”
로이븐은 인자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얼른 자신들의 궁으로 돌아가라는 뜻에서 딱 끊어 내는 인사로 받아쳤다.
“네, 형님. 좋은 저녁 보내십시오.”
내 인사에 메이븐은 고개를 끄덕였고, 로이븐도 손을 흔들어 줬다.
나는 동생 된 도리로 그들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며 배웅해 주려 했지만, 로이븐은 땅에 발이 박힌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에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쉰 메이븐이 로이븐의 팔뚝을 잡고, 파시테 궁에서 벗어나려 했다.
“자, 잠깐! 내 이것만 말하고…!”
“추합니다.”
“숙며, 숙면은 따로 취하거라! 알겠느냐, 미르야!”
“하아….”
팔불출 첫째를 끌어내는 둘째의 한숨 소리가 처량하게 들리는 밤이었다.
* * *
나는 눈을 뜨자마자 시녀들 손에 맡겨져 분주하게 움직였다. 그런 와중 화려한 자줏빛 드레스와 그와 어울리는 긴 챙 모자를 쓴 여성을 맞이했다.
“역시! 4황자 전하는 뭘 입으셔도 아름다우십니다! 옷을 만드는 보람이 있네요!”
“그런가…? 오랜만에 듣는 칭찬이라 그런지 조금 쑥스럽네.”
여성은 세네카에서 제일가는 드레스 숍 ‘로렐라이’의 주인인 마담 로렐라이다.
세네카를 제외하고도 여기저기 손이 뻗어 있는 거물이라, 여타의 귀족들이 주문하면 거절하고, 애초에 받지도 않는다. 심지어는 다른 왕국 왕의 초대도 거절하는 대단한 사람이다.
그런 그녀가 왜 내게 왔냐 물으신다면, 대답은 간단하다.
“하…, 전하를 보지 못했던 시간은 제게 깜깜한 어둠과도 같았답니다. 전하의 몸이 너무 그리웠어요.”
로렐라이의 적나라한 말에, 아직 꿈나라에 빠져 있는 노반의 등을 토닥여 주던 젠의 표정이 확 굳었다.
그녀가 가져온 의상들을 전부 던져 버릴까 고민하고 있는 것 같다. 차가운 젠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 건지, 로렐라이는 아직 만족할 수 없다는 듯 황홀한 표정을 지으며 은근한 손짓으로 내 오른쪽 가슴과 허리에 손을 올렸다.
“이 적당히 벌어진 어깨, 얇은 흉곽을 타고 내려오는 이 가냘픈 허리 라인, 탐스럽게 튀어나온 이 엉덩이의 볼륨감. 완벽한 대칭을 이루는 이 다리 라인, 그리고 마지막을 장식하는 봉긋한 복숭아뼈까지…. 정말 완벽해요.”
“아하… 하….”
“전하께서 황족이 아니셨다면 당장이라도 본을 떠서 제 전용 마네킹을 만들었을 텐데…. 정말 아쉬워요. 전하, 폐하께는 비밀로 하는 건 어떠신가요? 제가 가진 게 꽤 많은데, 그리해 주신다면 전하께 제 재산의 절반을 드릴 수 있어요.”
로렐라이는 한 치의 거짓도 없는 진심인 듯, 눈에 불을 켜며 나를 설득하려 했다. 그녀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아주 뜨거웠다.
어느새 우리 쪽으로 가까이 온 젠이 내 몸에 닿은 로렐라이의 손을 떼어 줬다. 하지만 로렐라이는 자신의 손이 내 몸에서 떼어진 지도 모른 채, 자신의 재산이 얼마나 있고, 앞으로는 이만큼 더 벌 수 있다며 나를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그녀의 뜨거운 시선을 피하고, 어색하게 하하 웃으며 은근슬쩍 주제를 돌렸다.
“근데 나 조금 살이 많이 붙지 않았어?… 최근 들어 많이 먹긴 했는데. 뱃살도 조금 나온 것 같고.”
“네, 전보다는 살이 오르신 것 같네요. 아! 걱정하지 마세요. 딱 적당하게 올라서, 허리가 쏙 들어가 보입니다! 고혹적이게 돋보이는 아름다운 선이 되었어요. 한층 더 아름다워지셨네요. 조그마한 바람이지만, 여기서 조금 더 살이 오르셔도 아름다우실 것 같아요.”
로렐라이는 내 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분석하듯 말했고, 고칠 것 없이 완벽하다는 듯 쉴 새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로렐라이에게 슬슬 그녀가 가져온 나머지 옷들을 입어 보자 했고, 그녀는 자신이 온 이유가 이제 생각이 났다는 듯 박수를 짝 치며 가져온 여러 벌의 옷을 둘러보았다.
“흐음, 뭐부터 입힐까나.”
로렐라이는 앞으로 몇 시간 동안 내게 옷 입히기 놀이를 할 수 있어 신이 났는지 콧노래를 부르며 가져온 옷을 살폈다. 나는 내게 가까이 다가온 젠의 팔을 꽉 붙잡고 그의 가슴팍에 기대었다.
겁쟁이 4황자는 그녀와 만나면 녹초가 돼선 하루 종일 움직이지 못했었다.
4황자의 기억으로 옷을 갈아입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알고 있는 나는 그녀가 듣지 못하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젠은 나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웃었다.
“웃어?”
나는 앞으로 시작될 지옥을 생각하며, 젠을 향해 은근히 위협적인 말투로 말했다.
웃어? 내가 웃겨?
하지만 젠은 그런 내가 가소로운지,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고 평소처럼 다정하게 말했다.
“제 어렸을 때가 생각나서요.”
“젠이 어렸을 때?”
“네, 전 옷을 시착할 때마다 하기 싫어서 도망쳤었거든요.”
젠은 내 얼굴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나는 젠을 바라보며 푸훗 하고 소리 내어 웃었고, 젠은 다정히 내 뺨 위로 손을 올려 나긋하게 말했다.
“같이 도망갈까요?”
그의 매혹적인 미소에 홀려 거의 고개를 끄덕일 뻔할 때, 내가 입을 의상을 선정한 로렐라이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흠흠!”
나는 거의 입을 맞출 정도로 가까워진 젠과 후다닥 떨어져 시선을 돌렸다.
신경 쓰일 일은 없었지만, 이상하게 민망한 장면을 들킨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워졌다.
하지만 로렐라이는 우리가 뭘 했던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자신의 할 일을 시작했다.
“자, 시작은 이 예복부터 해 볼까요?”
로렐라이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을 안으로 불렀고, 결혼식 신랑이 입을 법한 새하얀 예복을 자신 있게 시녀들에게 건넸다.
시녀들은 그녀에게 받은 예복의 단추를 풀곤, 부드러운 실크 소재의 와이셔츠부터 섬세한 손길로 내게 입혀 줬다.
“다음은 이거, 그다음은 이거. 그리고 여기 있는 거 전부 입어 보고. 이건 특별히 신경 써서 입혀 드려야 해. 내가 제일 밀고 있는 옷이니까.”
로렐라이는 폭풍이 휘몰아치듯 시녀들을 준비시키며, 내게 펼쳐질 시착 지옥을 예고했다.
나는 멍한 눈으로 산처럼 쌓여 가는 예복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