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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55화 (155/227)

155 세네카 제국으로 향하다 (17)

“더는… 못 입어….”

“아직 다섯 벌이나 남았는걸요. 조금만 더 힘내세요.”

나는 황자의 체통도 잊은 채, 바닥에 주저앉아 산처럼 쌓인 옷을 바라봤다.

저렇게 산처럼 쌓인 옷을 전부 입었는데도 아직 입을 옷이 남았다는 게 더 소름이다.

젠은 한참 전, 나를 데리고 도망가려다가 들켜서 쫓겨난 지 오래고, 나는 홀로 남아 로렐라이가 입으라는 대로 꾸역꾸역 옷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저기… 나 이제 황후마마와 오찬 약속이 있어서 가 봐야 해.”

“어머, 잘됐네요! 예복 말고도 다른 평상복을 몇 개 가져왔….”

“그건 놓고 가! 감사의 의미로 편지 보낼게! 오늘 너무 고마워. 내일 파티에 입을 예복은 마지막에 입었던 저거로 입을 테니까 걱정 말고!”

나는 아직 내 어깨 위에 걸쳐져 있는 옷을 후다닥 벗어 던지고 로렐라이를 끌어안아 고맙다는 인사를 한 뒤, 밖으로 나왔다.

문을 쾅 열고 밖으로 나오자, 문앞에 기대어 이야기를 나누던 시녀들이 깜짝 놀라 내게 인사했다.

나는 그녀들의 인사를 밝은 미소로 받은 뒤, 로렐라이가 뒤따라오지 않게 빠르게 방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곧 있을 황후와의 오찬 약속을 위한 준비를 했다.

뭘 입어야 단정하게 보일까 고민하던 중, 노크 소리가 들리고 시종이 들어와 이야기했다.

“이프리트 경께서는 메이븐 2황자 전하께 부름을 받고 나갔습니다.”

또…? 그러고 보니 노반도 안 보이는 게 젠과 함께 갔나 보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네. 뭐 때문에 젠을 데리고 간 건지, 조금 불안해졌다.

이상한 거 시키는 건 아니겠지? 이따가 황후와의 오찬이 끝나고 메이븐을 보러 가야겠다.

“알려줘서 고마워.”

“아닙니다. 그리고 황후마마가 보내신 마차가 대기하고 있습니다. 나오시면 바로 출발하실 수 있게 조치 취하겠습니다.”

나는 시종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고, 내 인사를 받은 시종은 정중히 고개를 숙이곤 밖으로 나갔다.

시종이 나간 후 나는 다시 고민을 하기 시작했다. 어두운색을 입어야 하나, 밝은색을 입어야 하나.

평소 같으면 하얀 포엣 셔츠 위 베이지색 긴 바지를 입었겠지만, 황후랑은 아무래도 어색해서 잘 차려입고 가야 할 것 같았다.

마린이 있었다면 뭘 입어야 할지 딱딱 집어 줘서 고민하지 않았을 텐데….

어젯밤 모두가 잠든 사이 휴가를 떠난 마린이 보고 싶어졌다.

나는 대충 한 세트로 묶여 있는 검은색 재킷과 붉은색의 타이를 매고 방을 나섰다.

아까 전 시종의 말대로, 문밖을 나서자 황후가 보낸 큰 마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에스코트를 받으며 그 마차 안으로 들어갔고, 출발해도 된다는 뜻으로 문을 닫자, 마차는 빠르게 출발했다.

오찬이라곤 하지만, 일어나서 먹은 거라곤 작은 빵 조각뿐이니 거의 아침을 먹는 거나 다름없다.

황후의 식사 자리니 퀄리티 좋고 맛있는 음식이 나올 게 분명하다.

나는 어제저녁도 먹지 않아 지금은 아주 배가 등에 붙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나는 음식 욕심이 크게 없고, 아무리 배가 고파도 추하게 입으로 처넣지는 않을 거라는 점이 다행이었다.

만에 하나 내가 음식 욕심이 있고, 밥 먹을 땐 먹는 게 아니라 처먹는 사람이었어 봐, 황후 앞에서 그게 무슨 꼴이야.

“도착했습니다.”

마차는 멈추고, 도착했다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마차 밖으로 나와, 나를 기다리고 있던 황후의 시종을 따라, 황후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오찬 약속이라 당연히 식당으로 갈 줄 알았는데, 시종은 투명한 유리 창문이 붙어 있는 온실 안으로 들어갔다.

온실이라니, 보통 온실은 손이 많이 가는 곳이고, 관리하기가 힘들어 본궁과 떨어져 있는 경우가 많다.

황후 궁은 정말 호화로운 궁이다. 파시테 궁에는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지.

멍하니 온실을 바라보는 나를 잠시 기다려 주던 시종은 내가 정신을 차리자, 다시 나를 안내했다.

지나가는 걸음마다 푸릇푸릇한 풀이 돋아 있었고, 나무는 물론, 꽃이 활짝 펴서 가는 길을 예쁘게 장식했다. 또한, 온실답게 쌀쌀한 밖과는 차원이 다르게 따뜻했다.

황후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다다르자, 초록빛 식물들이 우거진 장소 가운데에 길쭉한 테이블이 있었다.

노랗고 금빛이 도는 가벼운 이브닝 드레스를 입은 황후는 상석에 앉아, 고고한 몸짓으로 차를 마시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황후마마를 뵙습니다.”

“오랜만입니다, 4황자 전하.”

황후는 마시던 찻잔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내게 자신의 오른쪽 자리를 권한 뒤, 내가 자리에 앉자 차분하게 가라앉은 말로 안부를 물었다.

“큰일을 당했다 들었는데, 몸은 괜찮은지 걱정이 드네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함께 지낸 이들의 도움으로 이제는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황후는 잠시 내 기색을 살피다가 멀리 떨어져 있는 시종을 부른 뒤, 준비한 음식을 내오라고 말했다.

시종은 황후의 말에 고개를 숙인 뒤 온실 밖으로 나갔다. 우리는 시종이 돌아올 때까지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겁쟁이 4황자의 기억에 황후는 그저 ‘방관자’였다.

물론 황후가 4황자의 친모도 아니고, 그녀의 배려를 당연하게 생각하는 건 아니지만, 그냥 좀 행동이 짜증이 난달까.

라이언 황제가 4황자를 철저히 무시했을 때, 황후는 그의 옆에서 냉한 눈빛을 보내며 함께 그를 무시했다.

퍼디스가 괴롭힐 때도 가만히, 귀족들이 4황자를 무시할 때도 가만히 있었다.

4황자가 레이트라의 누명을 벗겨 달라고 사정했을 때도 황후는 아무 말없이 4황자를 내치고 돌아섰다.

가해자도 싫지만, 그 옆에서 아무 말 없이 다 지켜보고 있는 방관자도 싫다.

그냥 좀 많이 재수가 없다. 그래도 자기 아들들이랑 놀지 말라고는 안 해서 감사해야 하나.

아무튼 황후에 대한 좋은 기억이 없다.

재수가 없을 뿐, 특별하게 무섭지는 않았다.

그렇게 내가 황후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고 트레이가 들어왔다.

트레이에는 덮개로 씌워 둔 음식으로 가득했다.

그리고 황후와 내 앞에 음식을 놔 줬는데, 둘 다 다른 음식이었다.

황후는 풀떼기가 가득한 샐러드였고, 나는 해산물이 적당히 첨가된 수프와 진한 육즙이 담겨 있을 듯한 스테이크였다.

베지테리언 그런 건가.

“먹어요.”

나는 황후가 포크를 들기까지 기다렸다가 그제야 스푼을 들어 수프를 떠먹었다.

조개의 깊은 풍미가 입 안을 가득 채웠고, 자잘하게 씹히는 관자와 부드러운 크림의 맛이 잘 어울렸다.

프레오나가 육식의 제국이라면, 세네카는 해산물의 제국이다.

제국을 대표하는 식재료답게 수프의 맛은 짜지도, 싱겁지도 않고 딱 적당히 맛있었다.

식전 식사로 나오는 수프를 먹은 뒤, 메인 요리로 보이는 고기를 자르려고 했다. 그때, 나를 바라보고 있는 황후와 눈이 마주쳤다.

왜 자기 음식은 안 먹고 나를 보고 있대.

나는 조심스러운 어투로 나를 바라보고 있는 황후를 향해 물었다.

“황후 마마께선 고기를 드시지 않는 것입니까?”

내 말에 황후는 자신의 앞에 놓인 샐러드를 바라보곤 말했다.

“몇 년 전부터 먹지 않는 버릇을 들였더니, 이젠 잘 안 들어가더군요.”

“그렇군요….”

나는 황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채 내 앞에 놓인 고기를 썰어 입 안으로 넣었다.

별다른 소스는 없었지만 후추와 소금으로 간을 한 것 같다. 스테이크는 프레오나만큼 신선한 고기는 아니었지만, 황실에서 나오는 음식이니만큼 맛있었다.

나는 다시 한번 고기를 썰려고 했지만, 나를 지켜보는 황후의 시선이 너무 신경 쓰였다.

황후는 아직 제 음식에 손 하나 대지 않았다. 나는 황후의 눈치가 보여서 들고 있던 식기를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는 황후를 마주 봤다.

그러자 의아하게 생각한 황후는 나를 보며 물었다.

“왜 더 드시지 않고.”

“혼자 먹는 걸 좋아하지 않아서요.”

전에도 말했다시피 겁쟁이 4황자는 같이 먹어 줄 사람이 없어서 매 식사를 혼자 해결했다.

그런 4황자가 이제는 혼자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누군가와 함께 먹는 식사가 더 맛있다는 걸,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나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황후에게 말했다.

이 모습을 철수가 본다면, 너는 정말 가증스러운 인간이라며 치를 떨 수도 있는 그런 연기였다.

“그렇군요.”

황후는 입꼬리를 아주 미세하게 올려 웃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후에게 말했다.

“고기를 싫어하시는 게 아니라면 조금이라도 드시는 게 몸에 이롭습니다.”

단백질 섭취는 해 줘야 몸이 움직이지. 채소만 먹으면 늙어서 골병 날 확률이 높다.

조심스러운 내 말에 황후는 고개를 끄덕이곤, 대기하고 있던 시종을 불러 고기가 조금 들어간 샐러드로 다시 내오라 했다.

나는 황후의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 먹지 않고 기다렸다.

“인상이 많이 변했군요.”

나를 지긋이 바라보던 황후가 말했다.

‘인상이 변했다.’라…. 당연한 말이지. 애초에 이 몸에 들어 있는 사람이 바뀌었으니까.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고.

“그렇게 느끼시는 것도 무리는 아닙니다.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저는 프레오나 제국에서 여러 사람을 만난 뒤, 저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게 됐고, 사람으로서 성장했습니다.”

“….”

“물론 폐하께선 절 그런 의미로 프레오나에 보내신 게 아니겠지만, 어찌 됐건 제겐 얻을 게 많았던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동안 이런 상황이 오게 될 때, 상대에게 할 수 있는 대답을 생각해 뒀었다.

사람은 성장을 하면 바뀐다. 게다가 사람만 보면 움츠러들던 소심한 겁쟁이 4황자니까. 그런 그가 긍정적으로 바뀐다면 얼마든지 큰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다.

그리고 유전자가 워낙 좋잖아.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좋아진 것 같아 다행이네요.”

자애로운 미소를 지은 황후는 때마침 시종이 가져온 샐러드를 먹었다.

아까와 비슷한 샐러드였지만 다른 게 있다면 얇게 갈린 고기가 들어가 있다는 것이었다. 내 입장에선 그거나 저거나 다를 게 없지만, 그래도 아예 안 먹는 것보다야 낫지.

나는 황후가 먹는 걸 지켜보다가, 다시 내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자르고 입 안으로 넣었다.

다 식었다.

나는 더 먹지 않고, 황후가 자신의 몫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황후의 식사가 끝나고 식기를 내려놨다.

만족스러운 점심은 아니었지만, 고팠던 배를 채웠으니 마냥 나쁘지만은 않았다.

식사가 끝났으니 이제 본론을 이야기할 차례다.

왜 평소 하지도 않던 짓을 하면서, 날 오찬에 초대한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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