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 세네카 제국으로 향하다 (18)
식사를 마친 후, 황후는 시종을 시켜 간단한 디저트를 가져오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종이 가져온 것은 입자가 큰 설탕 가루가 솔솔 뿌려져 있고 형태가 고풍스러운 모양으로 찍힌 쿠키였다.
황후는 내게 쿠키를 먹어 보라 권했지만, 나는 배가 부르다는 핑계로 손을 대지 않았다.
내가 여러 집안을 돌아다니면서 쿠키를 먹어 봤지만, 마린이 해 주는 쿠키만큼 맛있는 게 없더라.
“저를 부르신 이유가 따로 있으십니까?”
“이유라….”
황후는 싸한 분위기를 풍기며 말끝을 늘렸다. 그러고는 관찰하는 듯한 눈빛으로 내 눈을 지긋이 바라봤다. 내게서 무언가를 찾고 싶어 하는 듯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는지, 곧이어 흥미가 떨어진 듯 시선을 거뒀다.
나는 그런 황후의 반응에도 움츠러들지 않고, 또렷한 눈으로 그녀를 마주 바라봤다. 그리고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희가 애틋한 사이도 아니고, 이유 없는 만남을 가질 사이는 더더욱 아니지 않습니까.”
내 말에 황후의 눈에 작은 이채가 돌았다.
내 말에서 무언가를 찾은 걸까.
“황자의 말이 맞아요. 오늘은 황자에게 전해 줄 게 있어서 부른 거예요.”
황후는 무슨 생각일까.
전에는 겁쟁이 4황자에게 관심은커녕 시선 한 번 던져 주지 않았으면서, 이제야 뭘 한다고 나를 불렀을까.
나는 황후를 바라보며 침묵을 지켰다. 그에 황후는 곁에 있던 시종을 물리고, 아무도 듣지 못하게 온실의 문을 닫았다.
이곳엔 황후와 나, 단둘뿐이었다.
넓은 온실에 적막이 돌 때쯤,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은 황후가 말했다.
“황자, 기억하나요? 레이트라가 감옥에 구금되었을 때, 황자는 벌벌 떨면서도 강직한 모습으로 내게 말했었죠. 레이트라를 도와달라고.”
저 아줌마가 과거 이야기를 하려고 하네. 과거 이야기는 반칙 아니야? 이런 얘기는 백이면 백 마음이 약해진다고.
“네, 기억합니다. 그건 제 처음이자 마지막 부탁이었고, 황후께선 거들떠보지도 않으셨죠.”
조금 가시가 돋친 내 말에 황후는 잠시 침묵을 했다. 그리고 안타까움이 가득 담겨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는 나도 황자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요.”
“이제는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날카로운 내 말에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황후의 반응이 더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해 줄 수 있으면 뭐 하나. 레이트라는 죽었고, 미카프란체 가문은 멸문했고, 나는 볼모로 적국에 묶여 있는 신센데.
나는 착잡한 미소를 지으며 황후를 향해 말했다.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이젠 되돌릴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되돌린 순 없어도, 갚아 줄 수는 있지요.”
황후는 굳센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갚아 줄 수 있다고. 황후는 레이트라를 그렇게 만든 사람을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갚아 줄 수 있다…. 그런 말은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말만으로 끝나지 않게 내가 도와줄게요.”
이 아줌마가… 아까부터 은근히 복수를 조장하네? 뭐 찔리는 거라도 있나?
지금 황후의 모습은 ‘적의 적은 나의 아군이니, 아군을 만들자!’ 같은 느낌이다. 다소 조급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황후를 잘 파 보면 건질 게 있을 것 같다.
4황자야, 황후한테 고마워해라. 덕분에 네 복수가 조금 빠르게 이뤄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지만, 그걸 황후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겉은 침착함을 가장하며 말했다.
“말씀은 감사하지만, 괜찮습니다.”
“그건 내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는 뜻인가요?”
황후는 침착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황후가 내 줄을 아예 끊어 버리지 못하게 적당히 뒤로 물러서면서도, 적당히 다가갔다.
“황후마마, 저는 제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습니다. 황후마마께서도 상대를 알고 있다면, 섣부른 판단으로 뛰어들어서는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 말에 황후는 눈을 크게 떴다. ‘네가 알고 있어?’ 같은 눈빛에, 의외의 소식을 들은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느낀 것이 정확했는지, 흥미를 드러낸 황후가 내게 되물었다.
“황자, 황자는 상대가 누군지 알고 있었나요?”
“저는 황후께서 생각하시는 만큼 멍청하지 않습니다.”
나는 진지한 표정으로 황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에 황후는 놀란 기색을 감추며 점잖게 말했다.
“황자의 의견을 듣고 싶군요.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내게 말해 주겠어요?”
나는 그리 말하는 황후의 눈을 바라봤다.
황후는 나를 떠보고 있는 거다.
내가 말하는 게 허풍인지 아닌지, 상대를 향한 각오가 있는지 없는지.
이걸 말해, 말아.
솔직히 내가 생각하고 있는 상대가 확실한 건 아니다. 그냥 추측일 뿐이지. 그래도 90%의 확률로 정답일 거다.
문제는 내가 이걸 말하고 난 뒤에 황후가 보일 반응이다.
아까는 크게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지금은 좀 긴가민가하다.
만약 황후가 함정 수사를 하고 있는 거라면? 만일 그런 거라면 내가 여기서 더 깊게 들어갈수록 낭패다.
“함구하겠습니다.”
“함구하다니요?”
“송구한 말씀이지만, 전 황후마마를 완벽하게 믿을 수 없습니다. 솔직히 황후마마께서 제게 이렇게까지 해 주시는 것이 납득이 되지 않습니다. 갑작스럽기도 하구요. 제 마음을 이해해 주실 거라 믿습니다.”
나는 황후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였다. 그에 황후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미안한 기색을 표하며 입을 열었다.
“그렇군요…. 미안해요, 황자. 내가 황자의 기분을 생각하지 않았군요.”
“….”
“사과의 뜻으로 내 밑천을 먼저 말해 줄게요. 이러면 황자의 마음이 편해질까요?”
황후도 어지간히 조급한가 보다. 4황자 같은 도움이 될지 안 될지도 모르는 애를 잡고 이야기를 끌어나가는 걸 보면 말이다.
내가 반드시 필요한 상황이거나, 한 명이라도 더 아군이 필요한 상황인가 보다.
나는 밑져야 본전이니 먼저 자신의 밑천을 드러내 준다는 황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는 진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이언 황제가 그 사건의 배후예요. 황자도 알고 있었나요?”
“…예, 제 예상이랑 일치합니다.”
함정 수사는 아닌 것 같다.
나는 황후가 황제의 욕을 하는 나를 잡아 고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황제의 이름을 말하는 황후의 표정이 너무나도 분해 보였다.
여기도 뭔 일 있구만?
나는 일그러진 표정을 숨기려 하는 황후를 바라보며, 내가 예상했었던 것을 알려줬다.
“당시 저희 어머니는 라이언 황제가 가장 아끼는 황비였습니다. 그녀 자의로 빈민가를 구제한다든가, 여러 마법을 민가에 써서 황궁이 얻게 되는 이득이 줄어들어도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셨었죠.”
“….”
“세네카 최고 권력자인 황제의 여인을 죽일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황제뿐입니다. 그리고 마법의 능통한 어머니를 잡을 수 있는 것도 황제의 권력뿐이었죠. 분명 저를 인질로 잡고 어머니를 협박했을 겁니다.”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말하는 나를, 황후는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자신의 친아버지가 자신의 친어머니를 사지로 끌고 갔다는 걸 아들의 입으로 스스럼없이 말하고 있으니 충분히 안쓰러워 보일 거다.
게다가 4황자는 유약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으니 더더욱.
“미안해요, 황자. 내가 괜히 나쁜 기억을….”
“괜찮습니다. 어머니에 관한 일에는 이제 많이 무뎌졌습니다.”
나는 얄팍한 조소를 지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이러면 더 처량해 보이겠지.
작전대로 황후는 아까보다 유연한 태도로 나를 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그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때의 황제는 무언가를 꾸미고 있었어요. 레이트라는 그걸 눈치채고 있었죠. 의문을 가진 레이트라는 황제의 일을 조사했었고, 결국 단서를 잡았죠.”
“황제가 꾸민 무언가라면….”
“아쉽게도 그건 내가 알아내지 못한 거예요. 황자는 레이트라에게 들은 게 없나요?”
단서와 관련해 레이트라가 알려 준 게 없냐는 황후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레이트라가 4황자에게 단서를 알려 줬을 리가 없다. 그런 위험한 정보는 알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험하고, 그때의 4황자는 아주 어렸던 터라 언제 어디서 단서를 흘릴지 모르니 더욱 조심스러웠을 거다.
“그날, 그녀와 그녀의 가문이 그렇게 된 이유는, 황제가 숨기고 있는 것을 알게 된 것 때문이에요. 그것이 대귀족 가문을 멸문시켜서라도 숨겨야 할 정도로 중요한 일이라는 거지요.”
나는 황후의 말에 동의했다.
확실히 미카프란체 가문은 그렇게 쉽게 무너질 가문이 아니다. 어찌 보면 프레오나의 이프리트 가문보다 더 단단한 가문이다. 세네카 개국 공신과 다름없는 가문 중 하나였다.
그런 가문을 내치면서까지 황제가 숨겨야 하는 게 도대체 뭘까.
“알아내려고 노력해 봤지만 황제가 세운 방어가 단단해서 어렵더군요. 그래도 교황청과 관련되어 있는 건 알아냈어요. 잃은 것에 비해 조촐한 수확이었네요….”
황후는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황후의 분위기를 맞추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황후가 말한 것 중에서 정신이 확 드는 단어가 껴 있었다. 황제가 숨기고 싶어 하는 것에 교황청이 관계되어 있다고…? 이건 또 무슨 조합이야.
“교황청이라니, 그곳은 중립을 지키는 곳이 아니었습니까?”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죠. 하지만 교황청의 사제 중 하나가 황제와 사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걸 확인했어요.”
스케일이 점점 커진다.
하필이면 많고 많은 곳 중에서 교황청이라니, 그곳은 조금 많이 꺼려지는데….
차라리 로웨나 왕국이면 좀 좋아. 젠을 위해서 한 번은 가야 하는 곳이니, 가는 김에 정보 수집도 하면 좋았을 텐데.
평생 갈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곳인 만큼, 교황청은 너무 생뚱맞다.
황후가 알고 있는 것은 이게 전부인 것 같았다. 나는 착잡한 표정을 지은 채 황후를 바라보며, 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의문을 조심스레 물었다.
“황후마마, 괜찮으시다면 어떤 연유로 제게 이런 말씀을 해 주시는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저는 황후마마께 큰 도움이 되질 못하지 않습니까.”
조심스러운 내 말에 황후는 작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날 사라졌던 이들과 가장 가까운 사람이 황자니까요.”
“아….”
“그리고 가끔 황자가 눈에 걸렸어요. 황자도 알고 있다시피 로이븐이 황자를 워낙 아끼고 좋아하니, 황자의 소식을 꽤 많이 전해 들었고, 어렸을 적 내게 부탁했던 황자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었어요. 죄책감이 들었죠.”
황후는 전부터 내가 자신의 마음에 걸렸다는 말을 하며, 황제를 들어내고 싶은 진짜 이유를 얼버무렸다.
감추고 싶다기보단, 말하기 싫어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이유가 무엇이든 나보다 급해 보이는 것 같아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의외로 지아한테 물어보면 답이 나올 수도 있고, 알아낼 방법은 많다.
나는 황후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미래를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