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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57화 (157/227)

157 아스본 사절단 환영 연회에 참석하다 (1)

“와, 가면 무도회가 아니었으면 어쩔 뻔했어.”

나는 깔끔하게 머리를 올리고 부티 나는 연회복을 잘 차려입은 젠을 바라보며 말했다.

가면 무도회라 다행이지, 맨얼굴로 참석해야 하는 연회였으면 큰일 났겠다. 이 영애, 저 영애, 이 영식, 저 영식…… 연회장에 있는 모두가 세상 멋진 젠한테 홀릴 뻔했을 테니 말이야.

젠은 방긋 웃는 나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프레오나에서도 가지 않을 곳을 세네카에서 가게 되네요.”

“연회 말하는 거지?”

고개를 끄덕인 젠은, 파란색 끈으로 테두리가 져 있는 검은색 가면을 썼다.

그의 황홀한 금안이 검은색보다 더 어두운 암흑색 가면과 대비되어 더욱 멋지게 빛이 났다. 게다가 멋진 사람은 아무리 가려도 멋진 사람인 게 티가 나기 때문에, 저 눈과 코를 반만 가려 주는 가면은 큰 소용이 없었다.

에라이, 애인이 이렇게 잘나면 불안해서 어떻게 사냐.

애인이 바람피울까 봐 무서운 게 아니라, 애인에게 들러붙는 놈들이 있다는 게 싫다. 젠이 저주에 걸려서 낮에는 못생기고 밤에만 잘생겨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딱 한 번 한 적이 있다.

물론 멍청한 생각이다. 젠의 미모는 24시간 봐도 질리지가 않는데, 밤에만 봐야 한다고? 어림없지.

“얼굴만 살짝 비췄다가 나오자. 주인공은 따로 있으니 우리는 오래 있지 않아도 될 거야.”

나나 젠이나 연회를 좋아하고 즐기는 타입이 아니지만, 오라고 하면 가야 하는 위치에 있기에, 오라는 제안에 거절할 수 없었다.

심지어 젠은 로이븐에게 직접 초대장을 받았다. 왜 줬는지는 모르겠지만 꼭 오라는 협박 아닌 협박을 남기며 초대장을 줬다고 했다.

사실 초대장이 없어도 젠이 내 호위를 가장하면 함께 들어갈 수 있을 터였다.

기왕 초대장을 받았으니 대충하고 가면 예의가 아니기에 젠은 불청객답지 않게 멋지게 꾸몄다.

그래서 마음에 안 든다.

우리 단둘이 있을 때면 몰라, 아직은 꽁꽁 싸 두고 나만 보고 싶은 단계다.

남들은 애인이 잘생기면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다던데, 나는 아니다. 나중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안 된다. 한 꼬부랑 할아버지 됐을 때쯤? 아, 근데 젠은 할아버지가 돼도 여전히 멋질 것 같은데. 아예 머리 깎고 산으로 들어 가야 하나….

이런 게 집착이라는 건가…. 젠이 이런 내 생각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할지 궁금하다.

노반은 휴가를 떠난 마린이 훅 와서 훅 데려갔다.

노반은 연회에 가지도 못하고 혼자 방에 남아 있어야 했기 때문에, 연회 날짜를 기억하고 있던 마린이 노반을 생각해 먼 걸음을 와 줬다.

나는 마린에게 이왕 노반을 데려간 거 세네카의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라고 일렀다.

어린 여우는 새로운 세상을 알아가는 걸 좋아할 거다.

아마도 마린은 젠과 내 로맨스를 생각해서 노반을 데려간 것 같다. 그 기대에 부응을 해야 할 텐데….

“가 볼까?”

우리는 연회장을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마차는 빠르게 달려 연회장에 도착했고, 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려간 곳에는 화려한 예복과 드레스를 입은 사람들이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한 줄로 서서 대기하고 있었다.

나는 시종을 따라 기다리지 않고 바로 연회장으로 들어갔다.

“도브로미르 4황자 전하가 도착하셨습니다!”

시종의 큰 목소리와 함께 연회장의 문이 열렸고, 높은 천장을 수놓은 화려한 보석들이 빛을 반사해 눈을 찔렀다.

젠장할, 더럽게 반짝거리네.

눈을 깜빡거리며 화려한 빛에 적응하고, 연회장 안으로 겨우 들어갔다. 그리고 빠르게 둘러본 주변 광경은 벌써부터 파시테 궁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을 더욱 부추겼다.

방금 들어와서 그런가, 황자라 그런가. 연회장 안에 있는 모두가 내게 집중하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이 굉장히 부담스러웠다.

놀던 사람이랑 놀지, 다들 음침한 눈빛에 호기심을 가득 담고선 나와 말 한마디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를 보였다.

다행스러운 건, 세네카에서는 친분이 있는 사이가 아니라면 신분이 낮은 자가 신분이 높은 자에게 말을 거는 건 실례라는 거다.

나는 연회장 상석에 마련된 황자의 자리에 가 앉았다. 당연하게도 황족 중에선 내가 제일 먼저 왔다. 그도 그럴 게 황족 중에선 내가 제일 신분이 낮으니, 낮은 사람부터 천천히 들어와서 마지막에 입장하는 최고 권력자인 황제를 돋보이게 해야 하니까.

나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아는 얼굴이 있나 주변을 둘러봤지만 당연하게도 아는 얼굴이 하나도 없었다.

이곳엔 아스본에서 온 사절단과 세네카의 귀족들이 한데 섞여 있었고, 얼굴을 가리는 가면까지 써서 누가 누군지 식별이 불가능했다.

그래도 필릭스는 알아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아직 안 왔나?

이 자식이 지 친구보다 늦게 와?

“로이븐 얼굴까지만 보고 바로 가자.”

“괜찮으시겠어요? 황제까지 봐야 하지 않을까요?”

“황제는 내가 왔나 안 왔나 관심도 없을걸.”

나는 고개를 저으며 황제까지는 보지 않아도 괜찮을 거라 말했다. 그리고 이 연회에 황제가 올지 안 올지도 모른다. 지 마음 내키면 오고, 안 내키면 안 오던데, 4황자의 기억에 따르면 작년엔 왔었고, 재작년엔 안 왔었다.

잠시 후, 퍼디스가 도착했다는 시종의 말이 울리고, 얼굴만 번지르르한 퍼디스가 사람 좋은 얼굴로 연회장 안으로 들어왔다.

퍼디스는 채도가 낮은 녹금발을 포마드로 올리곤, 얼굴을 반만 가린 하얀 가면을 썼다. 그 덕에 누가 봐도 퍼디스란 걸 알 수 있었다.

퍼디스는 자신한테 다가오는 귀족들의 인사를 하나하나 받으며, 짧게 근황까지 이야기하곤 내 쪽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그래, 저 정도는 해 주니 서자가 황실에서 권력을 잡고 있는 거지.

나는 가까이 다가온 퍼디스를 바라봤다. 원래라면 나이가 어린 내가 먼저 인사해야 했지만, 자존심이 있지. 나는 고개 숙이지 않았다.

실제 나이도 내가 훨씬 많고, 퍼디스 정도야 무시해도 큰일 안 난다.

“이 형님이 직접 선물도 전해 줬는데, 아우가 되어선 만나러 오긴커녕 편지 한 장 남기지 않았더군.”

퍼디스는 자신의 자리에 앉은 채, 시선을 연회장의 무대에 두고 내게 말했다.

생색내는 거야, 뭐야. 지가 언제부터 나를 생각해 줬다고.

나는 퍼디스의 말을 무시했다. 그러자 퍼디스는 미간을 조금 찌푸리며 나를 바라보곤 다시 한번 말했다.

“귀가 먹은 것이냐.”

“귀가 아니라 마음이 닫힌 거겠지요. 형님, 양심이 있으시다면 조용히 계십시오.”

“뭐라?”

나는 고개를 돌려 퍼디스를 바라봤다. 그리고 그의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을 따라 하며 목소리를 낮추고 날카롭게 말했다.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그래, 전혀 모르겠군.”

퍼디스는 ‘어디 한번 말해 봐라, 네가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같은 표정을 지으며 다음으로 이어질 내 말을 기다렸다.

나는 그런 퍼디스에게 차가운 조소를 날리며, 침착하지만 분노가 서려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보내 주신 그 사탕 중 몇 개는 광물처럼 딱딱해선 물에 녹지도 않더군요. 작은 힘으로 내리치니 산산조각 깨졌습니다. 저는 그렇다 쳐도 제 사람들이 먹었다면 큰일이 날 뻔했지요.”

“착오가 있었나 보군.”

“맞습니다. 완전한 불량품이었죠. 보낸 사람이 불량이니, 그 선물까지 똑같더군요.”

퍼디스가 선물로 보내 준 사탕을 세면대에 부어 물을 받아 놓은 날, 나는 너무 화가 나서 잠을 자지 못했었다.

그날 저녁 세면대를 사용하러 들어갔을 때 깜짝 놀랐다.

나는 아무리 퍼디스가 나빠 봐야 배앓이를 하는 약물이나 정신이 날아가는 약물을 넣은 사탕일 줄 알았다. 그런데 그걸 넘어서 아예 녹지 않는 유리 구슬 같은 게 세면대에 남아 있었다.

그래, 사탕이 녹지 않으면 이상하게 생각해서 버리는 사람도 있겠지.

하지만 일반적인 사람의 반응은 사탕이 녹지 않으면 반사적으로 그 사탕을 깨물어 본다. 혹시라도 내가 그 사탕을 깨물어 먹는 사람이었다면?

유리가 입 안에서 산산조각이 나 입 안은 걸레짝이 돼서 피를 줄줄 흘렸을 거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노반이 그 유리 사탕을 몰래 주워 먹었더라면?

나는 회까닥 돌아 퍼디스를 찢으러 갔을 거다.

“전에는 등신처럼 가만히 있었지만, 이제는 가만히 있을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 밟을 땅을 잘 보고 밟으십시오,”

“마음가짐이 바뀌었나 보군.”

퍼디스는 냉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의 입꼬리가 살살 떨리는 걸 보면, 속으로는 버러지 같은 게 개기려 들어서 화가 잔뜩 나 있는데 보는 사람들이 많아 참는 것 같았다.

“전에는 저 하나만 참으면 원만하게 넘어갔었지만, 지금은 그러질 않길 바라는 사람이 많아져서 말입니다.”

나는 퍼디스를 향했던 고개를 돌리곤 연회장을 바라봤다. 마침 메이븐의 입장을 알리는 시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예상치 못하게도 메이븐의 이름만 불렸다.

나는 지아가 메이븐이랑 들어올 줄 알았는데…. 지아는 누구랑 들어오는 거지?

“형님, 제가 전에 떠날 때도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현명하게 사셔야 한다고.”

“….”

“목 위에 붙어 있는 머리를 쓰십시오. 장식으로 달고 다니지 말고.”

나는 그 말을 끝으로, 연회장 안으로 들어온 메이븐을 반겼다.

메이븐은 몇몇 귀족의 인사만을 받고 빠르게 상석으로 올라왔다. 얼마나 빠르게 올라오던지, 평소 침착하던 그와는 조금 다른 것 같았다.

그는 붉은 기가 도는 눈동자와 잘 어울리는 회색 가면을 썼다. 누가 만든 가면인지 아무 장식 없이 디자인이 심플했지만, 메이븐 특유의 얌전한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메이븐은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나와 젠에게 가까이 다가왔고, 표정은 무뚝뚝하지만 다정한 말투로 물었다.

“빨리 와 있었네. 지루하진 않았어?”

“네, 이프리트 경도 함께 있으니 지루하지 않았습니다. 그나저나 형님은 카트린 영애와 함께 올 줄 알았는데….”

내 말에 메이븐은 미간을 작게 찌푸리곤 입을 닫았다.

이거… 둘 사이에 뭔가 있다. 싸웠나?

나는 내 옆에 서 있는 젠을 바라보며 메이븐에게 지아와의 일을 물어볼까 말까 입 모양으로 물었다. 그에 젠은 작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물어보지 말자는 뜻이었다.

그래, 가만히 있지, 뭐. 물어봐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없잖아.

그때, 입장을 담당하는 시종의 큰 목소리가 다시 한번 연회장을 울렸다.

“로지아 카트린 영애와 로이븐 황태자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이럴 수가…! 설마 삼각 관계야?

나는 젠을 바라보고 있던 고개를 돌려 메이븐의 표정을 살폈다.

그의 표정은 마치 아주 쓴 뿌리 식물을 씹었지만, 남들이 알지 못하도록 감정을 가다듬고 있는 듯했다.

한마디로 표정 관리를 하고 있다. 멀리서 보면 아무렇지 않아 보이겠지만, 가까이 서 있는 내게는 메이븐의 목에 선 핏대가 작게 꿈틀거리는 게 보였다.

이거 재미있어지겠는데?

나는 젠을 보며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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