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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58화 (158/227)

158 아스본 사절단 환영 연회에 참석하다 (2)

“로지아 카트린 영애와 로이븐 황태자 전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지아는 로이븐과 팔짱을 낀 채로 연회장에 입장했다. 그들은 다른 이들의 인사를 잔잔한 웃음으로 대답해 주고는 우리가 있는 상석으로 다가왔다.

그들이 이쪽으로 도달하기 전까지 나는 메이븐의 얼굴을 살폈다. 가면 뒤에 숨겨진 그의 시선은 지아와 로이븐의 팔 사이로 가 있었다.

저기는 확실히 로맨스 장르구나.

“4황자 전하!”

가까이 다가온 지아는 다른 황자들에게 인사를 한 뒤, 나를 향해 가장 밝은 미소로 인사를 했다.

누가 봐도 ‘나는 4황자가 가장 좋아요.’ 싶은 태도였다.

하아… 쟤는 왜 다 잘하다가 나랑만 연관되면 저런 헤벌쭉하게 되는 건지, 조금 불안하고 너무 안타깝다.

나는 조금 진정하라는 뜻에서 지아에게 차분하게 말했다.

“카트린 영애, 오랜만입니다.”

“전하, 그간 잘 지내셨나요? 제 쪽에서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으셔서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습니다.”

“예, 눈도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엄청나게 바빴다는 내 말에 지아는 입꼬리를 쭉 내리고 실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나와 지아의 대화에 반응한 건 다름 아닌 퍼디스였다.

퍼디스는 나를 은근한 눈빛으로 바라보며 지아에게 물었다.

“카트린 영애, 4황자와 친분이 있는 줄은 몰랐군요.”

구라 치네, 저거 알면서 물어보는 거다. 내 궁에 심어 놓은 제 첩자가 몇 명인데 그걸 모르겠어?

나는 냉한 눈으로 퍼디스를 바라보았고, 지아는 아주 친절한 말투로 퍼디스를 향해 말했다.

“전에 했던 제 예언이 비틀렸어요. 그래서 시간도 맞겠다 확인차, 4황자 전하를 뵈러 갔었죠.”

지아의 말에 퍼디스는 물론 상황을 알지 못하는 메이븐도 놀란 기색을 보였다.

“예언이 비틀리다니요?”

“간단해요. 누군가가 4황자 전하의 운명을 비틀었더라구요. 그래서 운명이 바뀌었어요.”

“그게 가능한 일인 건가요? 영애의 예언은 틀린 적이 없었잖아요.”

퍼디스는 이해가 되지 않는지, 지아를 향해 물었다. 퍼디스의 의문이 커질수록 로이븐의 표정은 점점 살벌해졌다.

곧이어 로이븐은 퍼디스를 향해 낮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3황자의 말은, 4황자의 운명이 카트린 영애의 예언대로 흘러가야 한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로이븐의 위협적인 말에, 퍼디스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곧이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 반대입니다. 영애가 예언했던 4황자의 운명이 정말 바뀐 것인지 확실하게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4황자 전하를 걱정하시는 3황자 전하의 마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아는 퍼디스를 향해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며, 그의 마음을 십분 이해한다고 했다.

쟤 지금 뭔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나는 조금 어색한 표정을 지으며 지아와 퍼디스를 번갈아 보았고, 퍼디스도 지아를 향해 의미 모를 눈빛을 했다가 누가 볼세라 바로 무표정으로 바꾸었다.

그치만 나는 봤지.

“아무튼… 그 암담했던 운명이 바뀌었다니 다행이군요.”

“네, 4황자 전하께 귀인이 나타났죠.”

내가 개죽음을 당하지 않게 되어 다행이라는 퍼디스의 말에, 지아는 젠을 바라보며 활짝 웃었다.

그 미소를 받은 젠은 지아를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이곤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관심을 받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나도 젠과 함께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말을 아낀다는 뜻을 표했다.

로이븐 일행과 멀찍이 떨어진 나와 젠은 사람들이 쓰고 온 가면이 얼마나 웃긴지 대화하다가 가장 우스꽝스러운 가면을 찾는 가벼운 게임을 했다.

나는 코뿔소처럼 이마에 혹이 나 있는 가면을 선택했고, 젠은 코가 피노키오처럼 길게 뻗은 가면을 선택했다.

이번에도 승자는 내가 될 것이다.

젠이 선택한 피노키오는 누더기처럼 별 희한한 색들이 가득 칠해져 있어 개성 점수라도 있는 반면, 내가 선택한 코뿔소는 전체가 붉은색이라 멋도 없고 망측했다.

내가 발로 뚝딱뚝딱 만들어도 저것보단 잘 만들 것 같다.

“오빠…!”

젠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쯤, 지아는 로이븐과 메이븐을 따돌리고 홀로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속삭이는 듯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네, 카트린 영애.”

아무리 가까운 거리이고 목소리를 줄인다고 해도, 초인적인 청각을 가진 사람이 주변에 있을지도 모른다.

내 옆에 있는 젠부터가 영혼의 색을 볼 수 있는 특별한 사람인걸.

나는 지아에게 정신 차리라는 뜻에서 ‘카트린 영애.’라고 딱딱하게 불렀고, 그에 지아도 입을 가린 뒤 고개를 끄덕였다.

“4황자 전하.”

나는 가까이 다가온 지아를 보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에 지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무래도 4황자 전하의 곁이 가장 편해서요. 첫째… 아니, 황태자 전하와 2황자 전하는 정세 이야기가 한창이시라, 제가 끼어들 틈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첫째랑 둘째가 어려운 이야기를 하니까, 도망쳐 왔다는 거다.

나는 제발 말 좀 시켜 달라는 지아를 향해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로이븐이나 메이븐 둘 중 아무나 잡아 연회장에서 춤이라도 추라고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엔 지아에게 너무 미안하다. 나는 방금 전까지 젠과 했던 이야기를 지아에게도 해 주었다.

“영애는 저기 연회장에서 가장 우스꽝스러운 가면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우스꽝스러운 가면이요…? 저는 오른쪽 끝에 계시는 분이 쓰신 코가 길쭉한 가면이 가장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것 같아요.”

지아의 말에, 젠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내게 속삭였다.

“다수결로 제가 이겼네요.”

“….”

에라이.

나와 젠 둘만의 대결에선 항상 젠이 져 준다.

사실 나도 젠이 나한테 져 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제3자의 의견이 들어오면 주관적이었던 우리의 대결은 객관적인 평가로 바뀐다.

“잘 생각해 보세요. 저기 있는 코뿔소 가면은 우스꽝스럽지 않나요?”

“저건… 우스꽝스럽다기보단 좀 무서운데요? 가면에 피 칠갑한 것 같이 보이잖아요.”

지아의 말이 맞다. 저건 우스꽝스러운 계열보다는 해괴한 계열이다.

나도 그걸 인정하는 바지만, 아무래도 나와 젠의 페어플레이에 지아라는 방해꾼이 개입한 것 같아, 게임이 덜 즐거워졌다는 유치한 핑계로 한 번 더 내기하기로 했다.

“그럼 저 코뿔소 가면의 사람이 아스본 왕국 출신일까, 세네카 제국 출신일까?”

이건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다.

“공정성을 위해서 젠이 먼저 골라도 돼.”

“음… 저는 세네카 사람요.”

젠은 잠시 고민하다가 답을 내렸고, 그의 선택에 나는 쾌재를 불렀다.

“그래? 다행이다. 나는 아스본 왕국이라 하려 했어. 세네카는 예술의 제국인데, 명색이 세네카 사람이 저런 괴상망측한 가면을 썼겠어?”

나는 상석의 근처를 돌아다니며 연회장을 관리하고 있는, 꽤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 같은 시종에게 저 코뿔소 가면의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와 달라고 부탁했다.

곧이어 명단을 확인하고 온 시종이 아주 작은 목소리로 코뿔소 가면의 정체를 알려 줬다.

“에반스터 가문의 필릭스 에반스터 경입니다.”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지…? 에반스터? 필릭스?

나는 멍한 얼굴로 시종의 입 모양을 계속 바라봤다. 믿어지지 않아 시종에게 다시 한번 물어봤다.

“미안하네, 내가 잘못 들은 것 같아서 그러는데 누구라고 했지?”

“에반스터 가문의 필릭스 에반스터 경입니다.”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저 추하고, 해괴하고, 괴상망측한 코뿔소 가면을 쓴 자가 세네카 제국의 사람이었고, 더욱 놀라운 건 그 대상이 내 친구라는 거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다 있나.

“이번에도 제가 이겼네요.”

코뿔소 가면의 정체를 까발린 시종이 물러가고, 만족스러운 표정의 젠이 다시 한번 속삭였다.

그에 나는 젠을 바라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지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두 분은 무엇을 걸고 내기하시는 거예요?”

“아무것도 걸지 않았습니다.”

“네…? 그럼 무슨 재미로 게임을 해요?”

지아는 놀라면서 우리에게 되물었다.

그치, 지아가 놀라는 것처럼 무언가가 걸어야 게임이 더 재미있어지겠지만, 우리는 딱히 무엇을 걸지 않아도 재미있게 논다.

연인들은 별것 아닌 일에도 재미있어 하는 거 아니야?…

사실 첫 연애라 모르겠다. 나랑 젠이 유독 내게 특별한 걸지도.

“이프리트 경과는 가만히 있어도 즐거우니, 뭘 해도 즐거운 거 아닐까요?”

내 대답에 지아의 표정이 잔뜩 찡그려졌다. 그리곤 ‘아, 커퀴벌레….’ 하고 아주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다 들렸다, 이놈아.

“카트린 영애, 에반스터 경은 만나 보셨나요?”

“아… 제 전 약혼자분이시죠? 네, 몇 번 만났었지만 어색해서 그런지 말을 많이 나누지 못했었습니다.”

“잘됐네요. 이번에 친해져 보는 것도 괜찮을 거예요.”

나는 조금 멀리 떨어진 시종을 다시 불러 코뿔소 가면을 이쪽으로 데리고 와 달라고 말했다.

그에 고개를 숙인 시종은 종종걸음으로 필릭스를 데려왔다.

필릭스는 영문도 모른 채 시종을 따라온 건지, 해괴한 코뿔소 가면 뒤에 있는 당황한 표정이 보였다.

그나저나 가까이서 보니까 저 가면 진짜 괴상하네.

“뭐야, 4황자 전하가 부른 거였어? 놀랐네.”

필릭스는 주변을 살피다가 결국 나와 눈이 마주쳤고, 가면 밑으로 보이는 익숙한 내 얼굴을 확인한 뒤, 긴장을 풀며 말했다.

나는 그런 필릭스에게 안부 인사를 전했다.

“오랜만이야. 그리고 너무 놀라워. 내 친우의 예술 감각이 이렇게도 뛰어났을 줄이야, 상상도 못 했지, 뭐야.”

“아, 이거? 예쁘지. 마법으로 구현한 가면이야. 가면을 쓰지 않은 원래 얼굴을 볼 수 있게 해주지.”

필릭스는 쓰고 있던 뻘건 코뿔소 가면을 벗고선 내게 내밀며 자랑했다.

아무리 상대의 맨얼굴을 볼 수 있는 가면이라지만 너무 괴상한 디자인이다. 나는 돈을 준다고 해도 저 가면은 쓰지 않을 거다.

“일단 그것 좀 해 줘. 소리 차단 마법.”

“연회장에서 해도 돼…?”

“안 된다는 법은 따로 없고, 아직 폐하도 오시지 않았으니 괜찮을 거야.”

내 말에 필릭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을 소리 차단 마법으로 둘렀다.

나는 한결 편해진 기분에 고맙다고 인사했다. 그러고는 조금 미안한 기색을 표하며 필릭스에게 말했다.

“있잖아… 혹시 소리 차단하는 마도구도 만들 수 있어? 물론 마법을 쓰는 게 더 편하긴 하지만, 나는 마법을 쓰면 마나가 견디지 못하니까. 아, 그리고 나 마나 다 썼다…? 그거 다시 먹어야 될 것 같아.”

내 말에 필릭스는 그때의 그 따가움과 아픔이 다시 떠올랐는지, 끔찍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물론 그의 표정을 보며 내 표정도 찌푸려졌다.

나도 가능하면 마나 없이 살고 싶은데, 있다가 없으니까 많이 불편하더라.

어쩌겠어…, 다시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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