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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59화 (159/227)

159 아스본 사절단 환영 연회에 참석하다 (3)

다시 한번 죽은 마나를 마셔야 한다는 내 말에 필릭스는 기겁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소리 차단 마도구는 만들어 볼게. 근데 마나는… 으, 나한테 시간을 좀 줘. 몸에 무리 가지 않는 선에서 먹을 수 있게 연구해 볼게. 고통을 나눌 더미 인형을 잔뜩 만들어야 하나… 아무튼 우리 둘이선 절대 안 돼.”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필릭스에게 고맙다는 뜻으로 얕게 웃었고, 젠은 나와 필릭스가 어떤 것을 말하는지 눈치를 챈 듯 어두운 표정을 지으며 내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나는 걱정 말라는 뜻으로 젠의 손 위를 내 손으로 덮으며 말했다.

“괜찮아. 필릭스가 해결책을 만들어 주겠지. 그 전에는 안 할 거니까 걱정 마.”

나도 그때처럼 무식하게 아프긴 싫어. 그리고 마나가 없으면 마법을 못 써서 조금 불편할 뿐이지 죽는 건 아니니, 젠이 싫다고 하면 그런 불편함 정도는 참을 수 있다.

그런 내 말에도 젠은 신뢰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잔소리를 하지 않는 걸로 보아, 아마도 나를 완전히 믿지는 않지만, 믿어 보는 척하겠다는 뜻 같았다.

나는 젠의 손을 꽉 잡은 채, 필릭스와 지아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아, 둘은 아는 사이지? 이쪽은 필릭스 에반스터 경, 이쪽은 로지아 카트린 영애.”

사실 내가 인사를 시키기 전까지만 해도, 둘은 의도적으로 눈도 맞추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직접 소개해 주는 바람에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눈을 맞추며 후다닥 인사했다.

“로지아 카트린입니다.”

“필릭스 에반스터입니다.”

보통 인사를 할 때면 안부도 함께 묻는다. ‘잘 지내셨나요.’라거나 ‘처음 뵙겠습니다’ 같은 말을 덧붙이는 게 인사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둘은 그저 자신의 이름을 말한 뒤, 서둘러 서로를 향했던 눈을 돌렸다. 둘 다 사회성이 좋은 성격도 아닐뿐더러, 친한 사람에게만 친근한 성격이기에 두 사람 사이에는 어색함이 좔좔 흘러넘쳤다.

이미 한 번 약혼까지 했던 사이여서 그런지 서로를 어색해하는 게 웃기다.

“둘이 약혼까지 했던 사이인데 너무 어색해하는 거 아니야…?”

상황을 부드럽게 만들어 보려는 내 말에도, 이 어색함은 풀리지 않았다.

그래, ‘전 약혼자’라는 게 그렇게 좋은 관계는 아니긴 하지.

어색한 시간은 흐르고, 연회장을 채웠던 부드러운 음악은 끝이 났다. 곧이어 악단이 바뀌었고, 세네카에 비해 정열적인 아스본 왕국의 음악이 흘렀다.

음악의 효과인지, 어느새 어색하게 쭈뼛대던 필릭스와 지아 사이에는 누가 먼저 이 자리를 뜨나 하는 날카로운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누가 이기나 지켜 보고 있는 와중, 아주 싱겁게도 필릭스가 손을 들며 물러났다.

필릭스는 젠과 딱 붙어 있는 내게 여유가 생기면 파시테 궁으로 찾아가겠고 말한 뒤, 친분이 있는 다른 귀족에게로 갔다.

조금 시니컬하게 말했어도 필릭스 나름대로 자신의 전 약혼녀를 배려한 것 같다.

지아가 빙의한 카트린 영애는 어릴 때 식물인간이었던 터라 친분이 있는 영애가 없고, 지금 돌아갈 수 있는 자리라곤 로이븐과 메이븐의 열렬한 토론장밖에 없다.

필릭스가 그런 것까지 다 고려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보이는 건 저래도 마음이 깊은 놈이니 지아에게 져 준 이유가 있을 거다.

“쟤 착하지.”

나는 떠나가는 필릭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지아에게 말했다. 그에 지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네요…. 첫인상은 되게 안 좋았는데.”

“그랬어?”

“네, 저를 딱 보자마자 표정이 싹 굳어서 새하얘지더니 식사하는 내내 입도 안 열고, 제 질문에도 예, 아니오로만 하고, 엄청 딱딱했어요.”

필릭스의 행동도 이해는 간다. 걔는 혼인하고 싶어 하지 않았으니까, 지아를 보고 혼란스러웠을 거다.

그래도 사람을 앞에 두고 새하얘져선 딱딱하게 군 거는 못된 행동이다.

“못된 놈이었네.”

“놀라긴 했을 거예요. 정말 갑작스런 만남이었거든요.”

지아는 여상히 웃으며 필릭스의 뒷모습을 보았던 고개를 돌렸다.

나는 멍하니 정신을 놓고 있는 지아를 향해 물었다.

“그건 그렇고, 나는 네가 메이븐이랑 들어올 줄 알았는데 로이븐이랑 들어와서 놀랐어.”

“아, 그거 폐하가 시키신 거예요. 저번 주까지는 둘째를 그렇게 밀더니, 이제는 첫째인가 봐요.”

그 말인즉슨, 첫째인 로이븐과 둘째인 메이븐을 둘 다 만나 보고 더 마음에 드는 쪽을 선택하라는 뜻이었다.

라이언, 이 쓰레기 새끼. 진짜 아버지 맞아?

“쓰레기 새끼….”

“인정해요. 세네카에서 제일 나쁜 사람이 있다면 라이언 황제일 거예요. 제가 읽은 일기장에서도 황제가 나오는 장면은 읽다가 넘겼는걸요.”

“거기에 뭐가 쓰여 있었어?”

“…이거 진짜 소리 차단되고 있는 거 맞아요?”

내 질문에, 지아는 주변의 눈치를 살폈다. 남들이 들어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응, 필릭스가 이 연회장 안에 있는 한 계속 유지돼. 나가면 풀리지만.”

내 말에 지아는 코뿔소 가면을 뚫어져라 응시하며 조심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저도 대부분 넘겨서 기억은 잘 안 나는데. 이놈이 진짜 나쁜 놈이에요.”

지아는 내게 가까이와 자신이 알고 있는 황제의 나쁜 짓을 말하기 시작했다.

황제는 세네카를 가장 강한 제국으로 만들기 위해 협박, 인신매매, 살인까지 서슴지 않고 했다고 한다. 그뿐이랴, 본래 가지고 있는 인성도 나빠서 4황자를 포함한 쓸 곳이 없는 자기 자식은 버리기 일쑤였다고 한다.

나는 지아의 입에서 나오는 라이언 황제의 쓰레기 행위에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혹시… 그 버린 자식이 황후의 자식이야? 로이븐이랑 메이븐 말고.”

라이언 황제를 향한 황후의 반응이 기억났다. 혹시나 하고 물은 내 질문에 지아는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가리엘 황후 말씀하시는 거죠? 그분도 정말 딱해요….”

“딱해…?”

“이건 가리엘 황후가 로지아에게 말해 준 건데요, 가리엘 황후와 라이언 황제 사이에선 4명의 아이가 있었대요.”

내가 아는 황후의 자식은 로이븐과 메이븐이 전부다. 나머지 두 명은 어디 갔어?

“첫째 로이븐보다 더 빨리 태어난 여자아이가 있었어요. 그 아이는 걷지도 못할 때 사고사로 세상을 떠났죠. 그런데 사실은 라이언 황제가 죽인 거예요.”

나는 지아의 말에 표정이 점점 흉악해졌다.

아니, 지 자식을 죽이는 아비가 어디 있어? 거기다가 갓난아이를.

“이건 로이븐과 메이븐도 모르고 있을 거예요. 첫째 황녀의 죽음에 대해서 함구령이 내려졌거든요. 귀족들도 전부 쉬쉬하고 있어요.”

“그럼 남은 한 명은?”

“막내도 여자아이였대요. 라이언 황제는 또 죽이려 했구요.”

나는 예상한 것이 다 들어맞아 허탈해졌다. 그리고 동시에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도대체 왜?”

“황제는 여자아이가 황권을 탐내는 게 싫었던 거예요. 그리고 황좌를 노리지 않는다면, 다른 왕국으로 시집을 가겠죠. 말도 안 되는 이유지만, 제 고귀한 피를 다른 왕국에 퍼트리는 게 싫다는 이유도 있었어요. 그 내용부터는 막 열이 뻗치고, 읽기도 싫어서 뒷장으로 넘겼어요.”

쓰레기라는 호칭조차 아까운 놈이었다. 완전 핵폐기물의 폐기물이다.

라이언은 자신의 피를 중요시한다. 4황자의 친모인 레이트라의 가문이 역사에서 사라졌는데도, 그 피를 이은 나는 아직 멀쩡하게 살아 있다.

그 이유는 라이언 황제의 피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같은 자식이라도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취급이 전혀 달랐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진짜?

질척한 오염물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속이 메스꺼웠다.

“아무튼 자기 자식한테도 이러는데 남들한테는 오죽했겠어요? 무슨 고대 생물이랑도 관련되어 있다던데, 진짜 쓰레기 중에 쓰레기예요. 사고사로 죽었다는 것도 말이 좋아서 사고사지 암살당해 죽었을 거예요.”

지아는 라이언 황제가 괘씸하다는 듯 분노한 태도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나는 지아의 말에서 귀에 꽂히는 무언가를 들었다.

“고대 생물?”

“아주 짤막하게 적혀 있던 거라 확실하진 않은데, 라이언 황제가 고대 생물을 전부 잡아다가 무슨 전쟁 병기를 만든다고 그랬던 것 같아요.”

좋지 않은 예상이 떠올랐다.

혹시라도 내가 하는 예상이 맞는다면….

“그 고대 생물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어?”

“아뇨, 이름은 나와 있지 않….”

“가리엘 황후 마마와 라이언 황제 폐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타이밍 정말 거지 같다.

나는 지아에게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말했고, 이곳에서 가장 흉측한 코뿔소 가면을 쓴 필릭스를 찾아 마법을 풀어 달라는 시선을 보냈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필릭스가 우리를 감싸고 있던 소리 차단 마법을 풀었다.

지아는 다시 로이븐의 곁으로 돌아갔고, 나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황제와 황후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인자한 표정을 지으며 연회장을 가로질러 상석으로 바로 왔고, 황자들의 인사를 빠르게 받은 뒤, 자리에 앉아 아스본 사절단을 환영하는 인사를 했다.

이번에도 큰 분란 없이 찾아와서 기쁘다, 앞으로도 어쩌구저쩌구 웅앵웅. 한 번 꼴이 보기 싫어지니 목소리조차 듣기가 싫어졌다.

나는 라이언 황제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가만히 있었다. 그동안 황제의 말이 끝났는지 다시 악단의 잔잔한 연주가 흐르기 시작했다.

환영 인사도 끝났겠다, 황제는 시간이 조금 지나면 바로 돌아갈 거다.

나는 황제가 돌아가면 바로 돌아갈 요량으로 젠과 함께 가만히 앉아 타이밍을 보고 있었는데, 어느새 연회장 한가운데서 지아와 메이븐이 춤을 추고 있더라.

“신기하지 않아?”

나는 연회장에 들어왔을 때부터 내게서 눈을 떼지 않는 젠에게 말했다.

“뭐가요?”

“쟤랑 나는 적응의 민족인 것 같아. 어이없고 당황스러울 텐데 참 적응을 잘해.”

내 말에 젠은 내게 시선을 맞춰 부드럽게 웃었다. 그리고 내 귓가로 다가와 ‘미르 님은 너무 잘하셔서 탈이에요.’라고 말했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젠을 마주 보려고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뒤에서 나를 보고 있던 황제와 눈이 마주쳤다.

“….”

나는 차게 식은 얼굴로 황제에게 고개를 숙였고, 황제는 내 인사를 무시한 뒤 다시 지아와 메이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지, 가면이 없었다면 황제를 경멸하는 눈빛까지 다 보였을 거다.

“미르 님, 표정 푸세요.”

젠은 잔뜩 굳어 있는 내 입꼬리를 살짝 찔렀다. 그 덕에 험악해 굳었던 하관이 스르르 풀렸다.

“나 아까도 이랬어?”

“조금이요. 그래도 멀리서 보면 모를 정도예요.”

가면이 문제가 아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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