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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60화 (160/227)

160 아스본 사절단 환영 연회에 참석하다 (4)

지아와 메이븐의 춤이 끝난 다음, 그들을 지켜보고 있던 다른 귀족들도 연회장 가운데로 나와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춤을 췄다.

연회장의 분위기가 아까보다 풀린 지금이 귀족들의 입이 가장 가벼워지는 시간이다.

무언가를 알아내려면 지금이어야 한다.

나는 곁에 있는 젠과 함께 상석에서 벗어나, 사람들이 많이 분포된 연회장 중앙으로 내려갔다.

원래 라이언 황제의 얼굴만 보고 돌아가려 했지만 쉽게 보내줄 것 같지 않은 분위기였고, 이왕 온 거 라이언 황제에 관해 뭐라도 건져 가면 좋을 것 같았다.

안타깝게도 4황자는 정치에 워낙 관심이 없었고, 기회마저 없어서 라이언 황제의 측근이 누구인지 모른다. 하지만 대충 흰머리가 희끗한 중노년층 귀족들과 대화를 나눠 보면 뭐가 나오지 않을까 한다.

안 나오면 어쩔 수 없고, 그냥 퍼디스의 기분을 거슬리게 하는 목적으로도 나쁘지 않은 발걸음이 될 거다.

정치도 하지 않고, 황권에도 밀려 있는, 별것도 아닌 내가 다른 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걸 비롯해 소통 자체를 하는 걸 퍼디스가 좋아할 리 없다.

아우가 잘되는 꼴을 보지 못하는 심보가 못돼 처먹은 놈이다.

사실상 내가 귀족이랑 대화한다고 해서 얻을 게 뭐가 있나? 많이 얻어 봤자 귀족의 호감도 ‘+10’정도일 뿐이다.

그런데 퍼디스는 그것조차 싫어한다. 겁쟁이 4황자가 다른 귀족과 대화를 나누면, 그다음 날 4황자와 대화를 나눴던 귀족의 이름을 들먹이며 그에게 눈치를 주었고, 더 끈질기게 괴롭혀 댔다.

생각하는 게 딱 초등학생 저학년이다.

“필릭스.”

나는 그나마 이야기하기 쉬운 필릭스의 곁으로 다가갔다. 다들 가면으로 가려 누가 누구인지 자세히 보지 않으면 판별이 어려웠지만, 이 흉측한 코뿔소 가면은 십 리 밖에서도 알아볼 수 있을 거다.

내 목소리를 들은 필릭스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내 얼굴을 본 순간 조금 의외라는 듯 놀라며 말했다.

“웬일이야? 미르, 네가 이쪽으로도 다 오고…. 형님들 허락은 맡은 거야?”

“그냥, 이번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리고 젠이랑 같이 있으니 형님들도 안심하실 것 같아.”

평소라면 로이븐이나 메이븐이 내 곁에 딱 붙어서 다른 귀족들이 질척거릴 때마다 막아 주었겠지만, 지금은 젠이 함께 있어 특별히 내게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지금의 로이븐과 메이븐은 라이언 황제의 눈치를 보며, 지아와 사이가 좋다는 걸 보여 주려 신경을 많이 쓰고 있을 거다.

“그러네, 바빠 보이시고.”

로이븐은 메이븐과 바톤 터치를 한 듯 지아와 춤을 추고 있었고, 메이븐은 푸른색의 가면을 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필릭스의 말대로 바빠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카트린 영애가 제일 바쁘지.”

로이븐과 메이븐은 라이언 황제에게만 치이는 정도이지만, 지아는 두 형제와 라이언 황제 그 두 사이에서 치이는 중일 거다.

얼마나 끔찍한지….

“그렇겠네…, 양쪽에서 치이고 있으니까.”

필릭스는 은근슬쩍 로이븐의 발을 밟은 지아를 바라보며 내 말에 동의했다.

나는 그런 필릭스를 뒤로하고, 그와 대화하는 척을 하면서 누군가가 먼저 다가와서 말을 걸어 줬으면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은 아직 어리거나 혼기가 찬 영애와 영식이었고, 내가 대화하길 원했던 중노년층 귀족들은 한 발자국 물러나 부드러운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4황자 전하가 먼저 나서서 이야기도 하는구나!’ 같은 흐뭇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곳은, 멀리서 보이는 것처럼 전혀 흐뭇한 상황이 아니다.

황태자, 2황자, 그리고 3황자도 아닌, 무려 4황자가 난생처음 다른 이와 두 마디가 넘는 인사를 나눈 것이다. 그러니 신이 나, 안 나.

예상대로 신이 난 영애들과 영식들은 자신들에게 밝게 웃어 주며 인사하는 나를 보고 승산이 있다 싶었는지, 다음 약속을 잡으려 했다.

하지만, 내 곁에 딱 붙어 나를 지키려고 서 있는 젠이 그들이 집적댈 때마다 칼같이 잘라 냈다. 그 바람에 잔뜩 침울해져 떨어져 나간 사람들만 해도 그 수를 손꼽을 수 없었다.

“황자 전하,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게 된 것도 인연인데, 며칠 뒤 저희 백작가에서 열리는 조촐한 티파티에….”

“안타깝지만, 영애. 전하께선 굉장히 바쁜 일과를 보내고 있어 영애의 파티에 참석하실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4황자 전하! 꼭 뵙고 싶었습니다! 실례가 안 된다면 다음 주…”

“약속을 잡고 싶으시다면, 절차에 맞춰 파시테 궁으로 초대장을 보내 주십시오.”

그 외에도 예의를 차리지 않고 내게 달려드는 무례한 사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젠은 내 앞에 서서 그들을 막아 줬다.

젠의 기색에 눌려 꽁지 빠지게 도망가다 꼴사납게 넘어진 영식도 있었다.

옆에서 지켜본 필릭스도 박수를 칠 정도니, 젠의 철벽 방어가 얼마나 뛰어난지 알 수 있다.

나는 굉장히 흡족하고 만족스럽다는 표정으로 젠을 바라봤고, 젠은 내 주변을 둘러보다 내 빤한 시선을 느끼곤 내게 물었다.

“혹시라도 관심 있는 자리가 있었나요?”

“아니, 없어. 앞으로도 없을 거야.”

“네, 보내 줄 생각도 없었어요.”

빛보다 빠른 내 대답에, 젠은 입꼬리를 올리며 애초에 보내 줄 생각도 없다고 말했다.

그에 나는 오랜만에 하는 장화 신은 고양이의 애처로운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장난기가 아주 조금 담긴 말투로 물었다.

“안 보내 줄 거야? 내가 가고 싶다고 해도?”

그에 젠은 내 시선을 빤히 바라보다 웃었다.

“가고 싶으시면 보내드릴 순 있어요. 약속만 잘 지켜주신다는 가정하에요.”

“약속?”

무슨 약속이냐는 내 말에 젠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다른 이들에게 쉽게 웃어 주지 마세요.”

“응…? 웃어 주지 마?”

질투해 주는 건가?

젠이 질투를 해주는 것 같아 은근히 기분이 좋아질 때, 젠은 아직 말이 끝나지 않았다는 듯 다정하게 말을 이어 갔다.

“3초 이상 상대와 눈을 마주치지 마세요. 일정 거리 이상 친해지지도 말고요. 미르 님은 친해지면 상대에게 약해지는 경향이 있으니, 늘 낯선 이들을 쉽게 믿으면 위험해진다는 걸 기억하세요.”

“이프리트 경,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어. 얘가 은근 순해 보여도 낯선 사람들한테는 경계를 엄청 하거든. 근데 또 친해지면 마음이 여려서 다 해 주려고 그래. 해 줄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그래서 마음만 아파하고. 보는 나는 환장하는 거야.”

필릭스는 그동안 자신이 겪었던 마음고생은 젠에게 토로하며, 나를 말리는 젠을 칭찬했다.

하지만 젠은 필릭스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내게 다시금 지켜야 할 안전 사항을 이야기해 줬다.

“특히 어린아이나 동물에겐 더 약해지시니 가능하면 만나지 말고, 만난다 해도 쳐다보지 마세요.”

“응, 알았어. 노력해 볼게.”

“그리고…”

“또 있어…?”

끝나지 않는 젠의 잔소리에 나는 반사적으로 또 있냐고 되물었다. 그에 젠은 당연한 소리를 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값비싼 물건을 준다고 해도 혹하지 마세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저한테 말씀해 주세요.”

말은 안 해서 그렇지, 제가 미르 님보다 돈 많아요.

상큼한 돈 자랑에 입꼬리가 올라가며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역시 세상은 불공평한 게 맞나봐, 잘생긴 애가 몸도 좋고, 일도 잘하고, 돈까지 많아.

하긴, 아무래도 그렇지. 그동안 젠이 잡은 마물 수만 해도 어마어마하니까. 퇴치해서 받게 되는 돈이나, 마물의 가죽이나 부속품을 돈으로 환산하면… 아마 웬만한 소왕국 몇 개는 가뿐히 살 수 있을 거다.

“응, 갖고 싶은 거 있으면 젠한테 말할게.”

“그리고…”

“또 있어…?”

이제 정말 끝난 줄 알았는데, ‘그리고’를 외친 젠의 말에 입을 떡 벌렸다.

내가 조금 무모하게 살긴 했지만, 이렇게 긴 잔소리를 들을 정도로 형편없이 살지는 않았던 것 같았는데…, 그 정도였어?

나는 이번에는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긴장하며 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미르 님을 화나게 하는 자가 있다면, 일단 저지르세요. 다음은 제가 할게요.”

나직하게 속삭이는 그의 말에 심장이 쿵쿵 울렸다.

나는 젠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고, 그도 나를 마주 보며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좋아진 기분에 어깨를 들썩이자, 곁에 있던 필릭스가 팔을 문지르며 우리의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흠…!”

나는 무언가를 떨쳐내듯 고개를 탈탈 터는 필릭스를 무시하며 헛기침을 하곤 말을 돌렸다.

“역시 기다리는 것보단 먼저 다가가야 하려나?”

이때까지 영애와 영식들 말고는 내게 다가오는 귀족이 없었다.

이렇게 기다리는 것보단 차라리 내가 먼저 가서 말을 걸어야 하나 고민하며 젠에게 물었다.

그에 젠은 고개를 저으며 먼저 다가가면 황제에게 오해를 사기 쉽다며 그러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의견을 냈다.

나와 젠의 이야기를 들은 필릭스는 작게 흥미를 보이며 속삭이듯 조용히 물었다.

“왜, 뭐 하는데?”

“그냥 조금… 이상한 소문을 들어서.”

“이상한 소문?”

나는 흉측한 코뿔소 가면 사이로 보이는 필릭스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고민했다. 필릭스가 4황자의 오랜 친구이자 가장 친한 친구는 맞지만….

황제의 일을 말해도 될까…? 아니, 그전에 필릭스가 관련돼서 좋을 게 있을까.

나야 일이 틀어지면 세네카에서 도망쳐 프레오나에서 살면 되지만 필릭스는 세네카의 사람이고, 훗날 세네카의 정수인 마탑에서 일하게 될 텐데, 황제의 눈 밖에 나면 좋을 게 없을 거다.

“나중에 확실해지면 알려줄게.”

“음…? 그래, 알았어.”

필릭스는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것처럼 나중에 바로 관심을 끊었다.

나는 다른 귀족들이 다가와 안부라도 물어줬으면 하는 마음으로 기다려 봤지만, 다들 정중하게 고개만 숙이고 다가와 말을 걸지는 않았다.

연회장에 막 들어왔을 때는 예의에 어긋나지만, 분위기가 풀리고 이쪽에서 먼저 중앙으로 내려왔을 때는 말 걸어도 된다고 알고 있는데…

이런 내 속을 눈치챈 젠이 내 귓가에, 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동안 황태자와 2황자가 미르 님을 과보호를 해서 다가오지 못하는 것 같아요.”

동감한다. 이건 오랜 과보호로 생긴 투명 방어막이다.

아직 팔팔한 영애나 영식은 조금 머뭇거리다가 내가 자신들을 향해 온순하게 웃어 주면 다가왔지만, 알 거 다 아는 귀족들은 내게 말을 걸었다간 로이븐과 메이븐이 눈치를 줄 테니 꺼려 하는 걸 거다.

젠장. 아쉽게도 연회장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없는 것 같다.

괜히 내려왔네.

아. 그래도 큰 수확은 없었지만, 마냥 헛걸음은 아니었다.

내게 다가오는 자들에게 철벽 방어를 펼치는 젠의 듬직한 모습을 잔뜩 본 것만으로도 좋았다.

나는 상석으로 올라가지 않고, 연회장 중간에서 시선이 맞닿은 라이언 황제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한 뒤, 가면이 가득한 연회장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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