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아스본 사절단 환영 연회에 참석하다 (5)
나는 라이언 황제가 무슨 일을 벌이는지 알아야 했다.
지아가 말하길, 라이언 황제가 전쟁 병기를 만들기 위해 고대 생물을 사용한다고 했다. 지아는 그 고대 생물이 무엇인지 모른다고 했지만, 내 추측에 따르면… 그건 드로이프다.
그래야 아귀가 맞는다.
노반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드로이프 마을이 전부 불에 타 짓뭉개졌지만, 드로이프의 시체는 보이지 않았다고 했다.
라이언 황제가 뭘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우리 노반을 슬프게 한다면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황제를 저지할 거다.
“그치만 황후도 못 알아낸 걸 무슨 수로 알아내냐 이 말이지….”
“정보원이 필요하신 건가요?”
욕실에서 금방 나온 젠은 젖은 머리의 물기를 털어 내며 침대 끄트머리에 앉아 있는 내게 말했다.
나는 그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스에게 받은 레이트라의 자수정을 젠에게 건넸다.
“아, 이게 그거군요.”
이 자수정에 대해 젠에게 말한 적이 없었는데, 그는 이게 무엇인지 이미 알고 있는 듯 말했다.
아, 혹시 노반이 스파이였나?
“노반한테 들었어?”
“네, 신경 쓰이니 잘 지켜보라는 명령이 있었어요.”
젠은 어젯밤, 노반과 이야기를 나누었던 순간을 기억하며 가볍게 웃었다. 그리고 노반이 자신에게 큰소리를 치며 나와 떨어지지 말고 나를 잘 지키라고 명령했다는 것을 알려 줬다.
‘이 자수정을 받고 나서부터 미르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쁜 표정은 아니었는데 생각이 깊어진 것 같았다’, ‘너도 알지 않느냐? 미르가 그런 표정을 할 때면 꼭 기분 나쁜 일이 벌어진다’ 등등 내 걱정을 하면서 내가 딴짓하지 않게 잘 감시하라는 명령을 남겼다고 한다.
“노반이 나에 대해 잘 알고 있네.”
“아무래도 드로이프가 종족 특성상 예민하기도 하고, 그동안 미르 님께 많이 당하기도 했으니까요.”
나는 젠의 시선을 피하면서 입술을 안으로 말아 작게 깨물었다.
그런 나를 바라본 젠은 내게 가까이 다가와 턱 아래를 부드럽게 잡아 들곤 말아 올린 입술 주변을 살며시 문질러 빼냈다.
“깨물지 마세요.”
상처 나겠어요.
그의 다정한 손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젠의 눈을 다시금 바라봤다. 진한 시선을 교환한 뒤, 젠은 허리를 살며시 숙여 내 이마 위로 가벼운 입맞춤을 남겼다.
기분이 좋아져서 몸이 살짝 들렸지만, 젠은 그런 내 반응에도 가까이 다가왔던 몸을 내빼곤 내게 건네받은 자수정을 살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이게 끝이야…? 이다음엔 입술에 해 주는 거 아니었어?”
“입술이 더 좋은가요?”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난 그런 분위기인 줄 알았는데. 밤도 깊었고, 둘 다 씻었고, 분위기도 좋았고.
나는 젠을 멍하니 바라보았고, 젠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듯 손에 들린 자수정을 살피며 말했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자수정이네요.”
이전에도 이런 일이 꽤 있었다.
젠은 그 그윽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제 손으로 내 뺨을 조심스럽게 감싸거나, 부드럽게 입을 맞춰 주었다. 이렇게 스킨십을 꽤 많이 해 주지만, 진도가 나갈 분위기가 되면 뒤로 내뺀다.
잔뜩 기대했다가, 남겨진 나만 뻘쭘해지는 상황이 꽤 많이 있었다.
그때마다 내가 얼마나 실망했었는데!
“미르 님?”
내가 대답하지 않자, 이상하게 생각한 젠이 물었다.
나는 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단숨에 젠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의 어깨 위에 손을 올린 뒤, 한 뼘 차이도 나지 않을 정도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댔다.
젠은 갑작스러운 내 반응에 놀랐는지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나는 젠에게 무게를 실어 그의 등이 침대를 향하게 했고, 젠은 순순히 내 움직임에 따라 줬다.
“일부러 그러는 거야?”
조금 뾰로통한 표정으로 젠에게 묻자, 그는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일부러라뇨?”
“왜 계속 간만 보는 거냐구.”
저번부터 왜 계속 찔끔찔끔 스킨십만 하고 끝까지는 안 가냐고.
뾰로통했던 표정은 어느새 시무룩한 표정이 되었다.
곧이어 내가 하자고 하는 말을 알아차린 젠은 의문이 해소됐다는 듯 ‘아…’ 하고 깨달음의 소리를 냈다. 그러곤 그런 고민을 하는 내가 웃겼던 건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웃었다.
“왜 웃어! 나는 진지한데….”
젠이 남색가라는 건 젠이 인정한 사실이 아닌, 그냥 소문이었다. 물론 지금은 나를 사랑하고 있으니 불확실한 소문은 아니게 됐지만, 서로가 서로의 처음이고, 같은 성별과 함께한다는 것도 처음이니….
혹시나 젠이 날 완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아주 조금, 개미 발톱만큼 있었다.
진짜 별것도 아닌 걸로 고민하는 거라면서 넘기려다가도, 어디 말하기도 부끄럽고, 내가 왜 이런 걸 신경 쓰고 있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설마 하는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오르기도 했다.
처음 사귈 때는 전보다 연(緣)이 더 깊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는데, 사람의 욕심을 끝이 없다고, 이제는 더 많은 걸 바라게 된다.
“걱정하시는 게 뭔지 알 것 같네요.”
젠은 내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으며, 진정하라는 듯 차분하게 말했다.
“제가 당신을 안지 못할까 봐, 그래서 불안하신 건가요?”
내 머리로 생각할 때까지는 괜찮았는데, 젠의 입으로 들으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나는 젠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조금 붉어진 내 얼굴을 바라본 젠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내 반응을 살피려고 다물었던 입을 뗐다.
“저희는 서로 다른 고민을 하고 있었나 보네요.”
“다른 고민?”
“저는 당신이 천천히 하고 싶어 하는 줄 알았어요.”
이게 무슨 소리야? 난 언제나 빠르게 정상을 노리고 싶어 한다고.
그런 적 없다는 뜻으로 영문 모를 표정을 짓자, 젠은 부드럽게 웃으며 내 귓불과 귓등을 만지며 말했다.
“제가 미르 님께 닿으면 항상 이쪽이 붉어지셨어요. 지금처럼요. 그래서 부끄러워하시는 줄 알았어요.”
“이건… 좋아서 붉어진 거 아닐까…?”
당연한 걸 묻고 있다는 내 말에 젠은 푸흐흐 웃으며 ‘그건 그렇네요.’라며 쓸데없는 오해를 했다고 말했다.
“저는 제가 너무 서두르는 것 같아 걱정이 됐어요. 제 행동이 미르 님께 부담을 주는 게 아닌가 하고요.”
젠은 나를 부드럽게 바라보며 자신이 걱정했던 것을 이야기했다. 자신이 먼저 손을 잡거나, 몸을 기대거나, 그리고 입을 맞춰 주는 것도 신경이 쓰였다고 했다.
“걱정하는 거치곤 뽀뽀는 항상 했잖아.”
“그건… 저도 자제하기가 힘들어서요.”
젠은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시선을 피했다.
나는 답지 않은 젠의 모습을 바라보며 하하 소리 내어 웃었고, 그런 나를 바라본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는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이젠 그럴 필요 없네요.”
* * *
마린의 휴가가 끝이 났다.
편하게 저녁 시간에 돌아와도 되는데, 부지런한 마린은 나와 젠이 아침 식사를 마치자마자 딱 맞춰 돌아왔다. 마린이 타고 온 마차에는 짐이 가득 차 있었다.
며칠 안 본 건데, 몇 년은 안 본 것 같이 너무 반가웠다.
평안한 표정으로 내게 인사하는 마린의 뒤에서, 신나게 놀다 온 노반이 말릴 틈도 없이 빠른 속도로 나를 향해 뛰어들어 안겼다.
묵직한 몸통 박치기를 당한 듯, 순간적으로 밀려오는 강한 충격에 허리가 찌릿하고 울렸다.
“헛…!”
“노반, 그렇게 강하게 달려들면 안 돼요.”
내 곁에 있던 젠이 내 품에 안겨 든 노반의 목덜미를 잡아 올려서 노반을 떼어 냈다. 덕분에 몸이 축 늘어져 허공에 떠 있는 노반이 내려달라고 발버둥을 쳤다.
평소라면 이 정도 몸통 박치기는 견딜 만했겠지만, 어제 저녁 소화도 시킬 겸 젠과 함께 성스러운 스포츠를 했더니 몸이 조금 뻐근했다.
연회장에서 나왔던 그날부터 오늘까지 거의 매일 하다시피 젠과 저녁을 보냈다. 이것도 일종의 운동인데 체력은 줄기만 하고 늘지를 않으니…. 저질 체력인 나도 문제지만, 젠도 젠이다. 내가 온몸으로 힘들다고 피력해도 여상히 웃어 줄 뿐 멈추질 않는다. 나도 좋아서 그만하라고는 못하지만, 뱁새가 황새 따라가다 다리가 찢길 지경이다.
“컁?”
내가 고개를 꺾으며 몸을 풀자, 아직 젠에게 잡혀 허공에 떠 있는 노반이 컁? 하고 의문을 표했다.
나는 뻐근한 허리를 좌우로 돌려 몸을 풀어준 뒤, 젠이 노반을 안아 들었다.
“어젯밤에 무리하는 바람에 몸이 조금 찌뿌둥해서 그래. 아픈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어젯밤 무리를 했다는 내 말에, 다른 시종들에게 짐 정리를 지시하던 마린이 흥미를 보였다.
나는 마린에게 작게 미소를 지었고, 내 미소를 본 마린의 입가엔 부드러운 호선이 그려졌다.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음흉함이 그득했다.
“잘 쉬다 왔어?”
“네, 신경 써 주신 덕분에 편히 쉬다 왔습니다.”
“에이, 내가 뭘 했다구. 아침은 먹었어?”
“컁!”
노반의 우렁찬 대답은 ‘아침 일찍 먹고 왔다.’라는 뜻이라고 마린이 해석해 줬다.
“그럼 이따가 점심 같이 먹으면 되겠다.”
오랜만에 광장으로 가서 이곳저곳 둘러볼 겸 외식도 할까 고민하면서 우리는 파시테 궁 안으로 들어갔다.
마린은 싸 들고 온 짐을 정리하러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젠에게 노반을 빼앗긴 채 방으로 돌아왔다.
나는 방으로 들어오자마자 책상에 앉아 자수정을 살폈고, 젠은 자신이 안고 들어온 노반을 침대 위로 던진 뒤, 내 옆으로 가까이 다가왔다.
“칼을 제가 쓸게요.”
“응, 이거 깔끔하게 깎아 줘.”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자수정과 보석을 다듬는 조각칼을 젠에게 건넸다.
젠은 조각칼을 들어 섬세하고 예리한 움직임으로 보석을 깎았다. 그냥 깔끔한 육각 기둥으로 보일 정도로만 깎으면 돼서 보석공을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노반이 내 무릎 위에 앉아 젠이 보석을 깎는 것을 바라봤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보다 더 깔끔하게 다듬어진 자수정을 받았다. 그리고 나는 그 보석에 광이 날 수 있게 메리테이라를 짓이기고 걸러낸 액체를 발랐다.
마지막으로 미리 준비했던 투명한 유리 보관함에 자수정을 넣었다.
“완벽해.”
“컁?”
이게 뭐냐고 묻는 듯한 노반의 목소리에 나는 친절하게 설명해 줬다.
저번에 받았던 레이트라의 자수정은 누군가가 가져갈 것 같아 모조품을 하나 더 만든 것이라고.
“우리는 이걸 훔쳐 갈 도둑을 기다리면 돼.”
미끼는 만들어졌으니, 물고기의 반응을 기다리는 거다. 과연 물고기가 이 미끼를 어떻게 먹을지 지켜보면 된다.
미끼만 몰래 빼먹고 달아날지, 미끼를 단숨에 먹어 신호를 알릴지.
나는 그저 물고기의 포획을 바라는 것이 아닌, 내가 만든 더러운 미끼를 먹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