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아스본 사절단 환영 연회에 참석하다 (6)
“폐하께서 4황자 전하를 초대했습니다. 이것과 함께요.”
미끼를 물었다. 그것도 아주 대놓고.
라이언 황제는 시종을 보내 자신을 만나러 오라는 말을 전했다. 게다가 유리 상자 안에 전시해 놓은 자수정도 함께 가져오라며 정말 ‘대놓고’ 미끼를 물었다.
아니, 이 정도면 낚싯대를 부러트릴 만큼 강하게 당긴 거지.
“알겠네. 준비하고 갈 테니 밖에서 기다려 줄 수 있겠나?”
“그럼 이것은 제가 들고 가겠습니다.”
시종은 내 허락도 없이 자수정이 담긴 유리 상자를 들고 갔다.
아예 막 나가기로 결정했나 보다.
나는 라이언 황제의 시종을 향해 어이없다는 표정을 하며 말했다.
“그건 내 어머니의 유품이나 마찬가지이니 돌려주면 좋겠어.”
“전 폐하의 명령을 따르고 있는 것뿐입니다. 혹, 이것이 황자 전하의 마음에 들지 않으시다면, 명을 내려 주신 폐하께 말씀을 드리십시오.”
허어… 저 싸가지를 보소.
나는 미간을 구긴 채 입술을 꽉 깨물어 크게 화가 나 있다는 것을 피력했다. 하지만 4황자는 4황자일 뿐, 황제의 명령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결국 시종은 자수정이 들어 있는 유리 상자를 들고 고개를 숙여 인사한 뒤 밖으로 나갔다.
“이렇게 나올 줄은 예상 못 했는데.”
나는 내 옆을 지키고 있던 젠을 향해 말했다. 그에 젠은 내게 고개를 끄덕여 주며 말했다.
“덫인 줄 알고 일부러 찾아왔을 가능성도 있어요. 혹시 모르니 조심하세요.”
“응, 알았어.”
어차피 라이언 황제가 가져간 것은 가짜 자수정이니, 내 계획에 절반은 성공했지만… 나를 불렀다는 것 자체가 내 정신 건강을 망가트리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가져갈 거면 그냥 가져가지, 왜 나를 부르고 지랄이야.
한동안 잊고 지냈던, 오스먼드보다 라이언 황제가 더 싫다. 오스먼드는 함께 있으면 육체가 괴롭고, 라이언은 정신이 괴롭다.
라이언의 싹수없는 말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야 하는데, 표정도 재수가 없어서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 없다.
만약 이곳이 황제가 다스리는 곳이 아닌, 법이 다스리는 곳이라면, 나는 황제 얼굴을 세게 몇 대 때리고 합의금 물어주고 싶을 정도로 화가 난다.
“가기 싫은데….”
“밀어 버릴까요?”
젠은 라이언의 황궁이 있는 곳을 보며 말했다. 진지한 표정으로 보아, 황궁을 밀어 버린다는 말은 진심인 것 같다.
아무리 젠이 강하다고 해도 그건 조금 어렵… 아니야, 사실 라이언 모가지만 싹둑 자르면 되는 거 아니야? 뒷일은 황후와 로이븐에게 맡기면 되는 거잖아.
어떤 게임이든 왕의 목만 따면 끝나는데, 우리는 라이언의 목만 따면 되잖아…?
어쩌면 생각보다 간단하게 상황을 끝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세상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젠, 마음은 고맙지만… 황제가 무슨 수를 뒀는지도 모르고, 그 전쟁 병기인가, 뭔가도 찾아야 하니 일단은 탐색을 해야 할 거 같아.”
나는 황제가 어떤 힘을 가지고 있는지 모른다.
뒷배경 빵빵한 황후도 황제를 어찌하지 못했는데, 젠만 믿고 라이언을 치기에는 조금 불안하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내 말에 젠은 입을 다물고 무언가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는 침대 밑에 숨겨놓고 까먹고 있던 노반을 꺼냈다.
아…! 상황이 하도 어이없어서 나도 까먹고 있었네.
“컁.”
침대 밑에서 나온 잔뜩 삐진 노반이 젠의 품에 안겨 ’컁’ 하고 우리를 나무랐다.
그 울음소리 안에는 ‘왜 자신을 침대 밑에 숨겼냐’, ‘볼일 끝났으면 빨리 꺼내 주지’, ‘침대 아래에 있는 먼지 내가 다 마셨다’ 등등 이런 못마땅함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미안해, 노반. 곧 꺼내 주려고 했어.”
“컁.”
“정말이야. 내가 노반을 잊겠어? 저 사람들 갈 때까지 좀 기다리려고 한 거야.”
“…컁.”
살살 달래는 내 말에 귀를 쫑긋 세운 노반은 순간 넘어오는가 했더니, 어림없다는 듯 바로 고개를 휙 돌렸다.
라이언 황제의 시종이 파시테 궁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내 방으로 올라와 방문을 두드렸기 때문에, 나는 본능적으로 노반을 보이지 않는 곳으로 숨겼다. 그곳이 침대 아래였다는 게 문제지만….
하지만, 혹시라도 황제의 시종이 드로이프에 대해 알고 있다면, 노반을 보고 흥미를 가질 수도 있으니 조심하고 싶었다.
언젠가는 노반에게 라이언 황제와 드로이프의 관한 이야기를 말해 줘야 하지만, 가능하면 확실해진 다음 이야기하고 싶었다.
그나저나 이걸 어쩌지… 노반은 단단히 삐졌는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잘 뒹굴고 있는 애를 아무 말도 없이 침대 밑으로 쑤셔 넣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노반, 미르 님은 지금 나가야 해요. 미소로 배웅해 줘야죠.”
젠은 토라진 아기를 달래듯, 노반의 몸을 톡톡 부드럽게 두드리며 말했다.
그에 고개를 돌리고 있던 노반이 슬쩍 나를 향해 시선을 던져 주며 ‘컁…’ 하고 울었다.
“노반, 얼른 다녀와서 놀아 줄게. 저번에 재밌어하던 보드 게임하고 놀자! 알았지?”
“컁!”
돌아와서 같이 놀아준다는 내 말에, 그제야 기분이 풀린 노반이 당차게 ‘컁!’ 하고 외쳤다.
우리가 프레오나의 북쪽 저택에 있었더라면, 밭일을 하든, 약초를 다듬든, 요리를 하든, 뭐라도 했을 게 있지만, 이곳은 밭도 없고, 약초는 전부 다듬어져 있고, 요리는 주방장이 따로 있기에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나마 할 만한 일은 책 읽기나 카드 게임, 체스 그리고 산책 정도가 전부인데, 책도 하루 종일 보기에는 질리고, 카드 게임과 체스는 이제 신물이 난다. 산책은 날이 추워져서 오래 걷지 못한다.
이곳에서는 할 게 너무 없었다.
그래서 보드게임을 만들었다. 보드게임은 병원에 있었을 때 질리도록 했으니, 그걸 기억해 따라 만드는 건 일도 아니었다. 다행히 젠, 마린, 노반도 좋아했고, 가끔 찾아오는 지아와도 함께 재미있게 놀았다.
나중에는 지아가 밤새도록 하려고 하기에, 앞으로는 낮에만 하자고 달래고 약속해야 했다.
“그럼 다녀올게. 노반은 어디 나가지 말고, 젠이 옆에 딱 붙어서 지켜봐 줘. 부탁할게.”
이유도 말해 주지 않고, 여기서 꼼짝 말고 나가지 말라고 하면 누구나 나가고 싶어 할 거다.
그러니 노반에게 젠의 곁에서 젠을 지켜보라는 역할을 하나 주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나는 조심히 다녀오라고 배웅해 주는 젠과 그에게 안겨 있는 노반에게 인사한 뒤, 옷을 두껍게 껴입은 채 밖으로 나왔다.
파시테 궁 앞에 준비되어 있는 마차 안으로 들어가자, 전과는 다르게 느긋한 속도로 달려 황제가 있는 궁에 도착했다.
내가 마차 밖으로 나오자,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시종이 내게 자수정이 담긴 유리 상자를 건넸다.
빼앗아 갈 때는 언제고 왜 이제 와서 주는 거야?
나는 차게 식은 얼굴로 시종을 향해 말했다.
“무슨 뜻인지 물어도 되겠나.”
“전하께서 직접 폐하께 드리시라는 뜻에서 돌려드렸습니다.”
“내 궁에서는 그대가 강제로 가져갔지 않았나? 이렇게 돌려줄 거면 그럴 필요가 없었을 텐데.”
시종이 왜 가져갔는지는 알고 있다.
내가 황제의 알현을 준비하는 틈에 자수정을 바꿔치기할까 봐 방지 차원에서 가져간 거겠지.
이유를 알고 있지만 한번 밟아서 족적을 남겨 줘야, 나중에 쉽게 기어오르지 못한다.
“제 행동이 무례하다는 건 알고 있으나, 혹시 모를 상황을 방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전하의 너그러운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시종은 그리 말하며 고개를 숙였다.
원래 4황자는 사과하는 사람에게 뭐라 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제는 ‘그’ 4황자가 아니잖아?
그리고 가족 건드리면 순한 개도 짖는다.
어머니의 마지막 유품을 건드려 놓고 쉽게 넘어갈 순 없지.
“그 혹시 모를 상황이란 게, 내가 이 자수정을 빼돌린다는 뜻인가?”
나는 야차와도 같은 표정을 하며 시종을 바라봤다.
그에 시종은 잘 나불대던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여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나는 이런 식으로 대화를 단절시키려는 시종에게 더 큰 소리를 쳤다.
“뭐라 말이라도 해 보게! 그대는 내가, 내 어머니의 유일한 유품으로 그런 저급한 짓을 할 거라고 생각했는가!”
“….”
“아무리 그대가 폐하를 섬기고 있다지만, 폐하의 피를 이은 나를 이리 대할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예, 황자 전하. 제가 경솔했습니다. 이렇게 사죄드립니다.”
시종은 허리를 숙여 내게 사과를 했고, 나는 화가 난 표정을 풀지 않고 시종에게 말했다.
“비록 나는 곧 고국을 떠나야 하는 볼모이지만, 볼모 이전의 내 신분을 망각하지 말게.”
“제 무례한 행동에 진심으로 사죄드립니다.”
진심은 무슨.
시종의 태도는 잘못한 사람이라기에는 너무 평온하고 잔잔해 보였다.
보통 사람이라면 목소리를 바들바들 떨거나 허리와 고개를 바짝 숙여 사과하겠지만, 시종은 그저 형식상으로 사과하는 듯 말에 진심이 담기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했으면 됐지. 앞으로 마냥 막무가내로 굴지는 않을 거다.
“이번에는 폐하를 생각해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에도 이리 행동한다면 신분을 떠나 내 핏줄을 무시하는 걸로 생각해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단호하게 말한 뒤,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인 시종에게 라이언 황제에게 안내하라 일렀다.
알현실로 안내할 줄 알았던 시종은 놀랍게도 알현실을 지나 어느 방 앞으로 안내했다.
곧이어 시종은 내가 도착했다는 걸 황제에게 알렸고, 문이 열렸다.
나는 느릿한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갔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부르셨다 들었습니다.”
“그래, 네게 해 줄 이야기도 있어서 불렀다.”
나는 고개를 들라는 황제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황제는 어두운색의 옷을 입은 채 상석에 놓인 큰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는 그런 황제에게 안부 인사도 없이 바로 용건을 물었다.
“하시려는 이야기가 무엇입니까.”
“앉거라,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으니.”
사양이다. 길게 듣고 싶지 않다.
원하는 게 이 자수정이면 평소 하던 대로 그냥 가져갈 것이지. 지가 언제부터 자식들을 생각했다고, 자수정을 가져가야 하는 이유를 구구절절 말해 주려나 보다.
그래도 황제가 하라 하면 해야 하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았다.
황제는 차분한 눈으로 내가 잡고 있는 자수정을 바라봤다.
할 말 있어서 앉으라 했으면 말이나 할 것이지, 그는 가만히 앉아서 나를 바라만 봤다.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폐하의 시종이 말하길, 제게 이것을 가져오라고 하셨더군요. 맞습니까?”
“그래. 가져오라 그랬다.”
황제는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자수정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얼른 본론을 꺼내고 싶은 마음에 말을 돌리지 않고 바로 물었다.
“그 이유를 묻고 싶습니다. 어째서 이것을 가져오라고 하셨는지요.”
내 질문에 황제는 자수정을 향했던 시선을 돌려 내 얼굴을 바라봤다.
나는 엉망으로 구겨질 것 같은 표정을 애써 관리하며 황제의 말을 기다렸다.
곧이어 황제는 작게 숨을 내뱉으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건 레이트라가 남긴 물건이니, 네가 아닌 내가 가져야 할 물건이다.”
이건 또 뭔 개소리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