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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63화 (163/227)

163 아스본 사절단 환영 연회에 참석하다 (7)

나는 당당하게 개소리를 지껄이는 황제를 바라보며 불타는 마음을 침착하게 다스렸다.

“이건 제 어머니의 물건입니다.”

나는 황제를 향해 나직하게 말했다.

그에 황제는 가소롭다는 얼굴로 내 말을 받아쳤다.

“레이트라는 네 어머니이기 전에, 내 아내이기도 하지.”

이건 또 무슨 쓰레기 같은 발언이지?

나는 어이가 없어 입이 떡 벌어지려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하지만 상대는 이 대륙에서 손꼽히는 쓰레기다. 표정 관리 잘하자. 상대는 쓰레기 황제다.

“…이건 제 어머니가 제게 남긴 것입니다.”

“레이트라는 죽었는데, 그걸 네게 남긴 건지 어떻게 알지?”

“이건 평화를 불러온다는 뜻으로 어머니가 옛적부터 지니고 다니셨던 자수정입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께 이 보석을 달라고 떼를 썼었고, 어머니께선 제가 성인이 되면 주신다고 하셨죠.”

그래서 레이트라가 따로 남긴 말이 없었어도, 내 것이나 다름없다고 황제에게 피력했다.

하지만 황제는 눈도 깜박하지 않은 채, 한쪽 입술을 올린 얄미운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황제인 내게 남긴 물건이 아니라면, 그건 시작부터 가져서는 안 되는 물건이지. 역적의 물건은 다 태우는 게 세네카의 법이니까.”

‘내가 가질 수 없다면 태워 버리겠다. 그러니 순순히 내놓거라.’라는 이야기였다.

나는 표정 관리를 하는 걸 관둔 채, 입술을 깨물며 미간을 찌푸렸다.

라이언 황제가 보고 있는 지금의 나는, 어머니의 유품인 자수정을 아버지 같지도 않은 황제에게 넘기거나, 그렇지 않으면 유품을 없애 버려야 한다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남지 않은 가여운 아이나 마찬가지다.

4황자 입장에선 차악이 뭘까. 레이트라의 유품을 황제에게 넘기는 걸까, 아님 그냥 없애야 할까.

그리고 내 입장에선 어떤 이득이 될까.

나는 상황을 조금 더 바꿔 보려고, 서운한 표정을 지은 채, 나태하게 앉아 있는 황제를 향해 말했다.

“제가 가지고 있어도 된다는 선택지는 없는 것입니까.”

유품을 처분하기도 싫고, 주기도 싫다는 내 말을 들은 황제는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는 내게 손을 뻗어 권태로운 태도로 자수정을 요구했다.

나는 심각한 고민을 하는 척 표정을 구기다가, 결국 못 이기는 척 손에 들린 자수정을 황제에게 건넸다.

4황자라면 어머니의 유품을 태우자는 소린 안 하겠지.

순하고 유약한 겁쟁이 4황자는 나와 다르게 ‘너 죽고 나 죽자’ 마인드보다는, ‘내가 못 가져도 유품은 지키자’라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을 거다.

4황자가 아닌 내 성격대로 말했더라면 나는 황제도 갖지 못하게 자수정을 아예 없애 버리자고 했을 거다.

나도 황제랑 다를 게 없다. 내가 갖지 못하면, 황제도 갖지 못했으면 좋겠다.

“나약하긴.”

내게서 자수정을 받은 황제는 나를 향해 ‘나약하다’라고 말하며 내게서 받은 자수정을 살폈다.

나는 그런 라이언 황제에게 ‘4황자를 이렇게 키운 건 너잖아’라고 쏘아 주고 싶었지만, 아무리 말해도 황제는 자신의 탓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참담한 심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고개를 떨궜고, 황제는 그런 나를 보며 담담히 말했다.

“올바른 선택을 한 너에게 내 마음을 넓게 쓰지.”

마음을 넓게 쓴다는 개소리를 지껄인 황제는 앉은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벽으로 갔다. 그리고 우측 벽 상단에 달린 4번째 촛대를 내렸다.

그러자 방 안이 우르르 소리가 나며 울렸고, 황제가 서 있던 우측 벽이 두 갈래로 갈라지며 숨겨져 있던 장소가 나타났다.

그곳에는 내 머리가 띵해질 정도로 충격적인 것들이 있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황제에게 말했다.

“이게… 전부…”

“레이트라의 물건이다.”

황제의 말대로, 숨겨진 방 안에는 4황자가 기억하는 레이트라의 물건들로 꽉 차 있었다.

옷, 액세서리, 구두, 화장대, 거울, 옷장, 책장, 침대 등등 레이트라가 생전에 썼던 모든 물건이 전부 여기 있었고, 가구의 배치조차 레이트라의 방과 똑같았다.

이건 무슨 싸이코패스 같은 상황이지…?

“이게 왜… 여기…”

나는 말을 더듬으며 이게 무슨 상황이냐고 황제에게 물었고, 황제는 대답해 주기 귀찮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었으니까. 아니, 아직도 사랑하고 있지.”

그녀의 물건을 태우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야.

황제는 레이트라가 사형을 당한 다음 날, 그녀가 남긴 물건을 태웠다. 하지만 그 태운 물건이 사실은 레이트라의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그렇게 말하는 황제에게는 ‘내가 내 여자를 이리 사랑한다’와 같은 은근한 자랑스러움이 깔려 있는 듯했지만, 듣는 나로서는 소름이 돋을 수밖에 없었다.

쟤 지금 자기가 사지로 내몰아 죽인 사람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고, 그것도 모자라 그녀의 물건을 간직하고 있는 거잖아.

이거 완전 사이코패스 아니야?

나는 황제의 끔찍한 행태에 온몸에 소름이 돋아, 등줄기에서 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황제는 내가 건넨 자수정을 레이트라의 화장대 서랍 안에 넣어 놨다. 그리고 방을 한 바퀴 둘러본 다음 내렸던 촛대를 올려 숨겨진 방을 다시 닫았다.

“나는 아직도 레이트라가 내게 웃어 주는 꿈을 꾼다.”

그거 개꿈이에요. 레이트라가 너한테 웃어 줄 리가 없잖아요. 정신 차려요.

나는 잔뜩 비아냥거리며 현실을 깨닫게 해 주고 싶었지만, 저런 싸이코 같은 놈이랑은 말도 섞기 싫었다.

이곳에 더 있으면 정신 건강에 좋지 않을 것 같다.

“폐하, 제게 용건이 끝나셨다면 이만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생각을 하며 눈물을 짜 내려 했다. 하지만 너무 화가 나서 그런지 눈물은 나오지 않았고, 그냥 눈시울을 붉히는 게 최선이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황제를 바라봤고, 황제는 내 표정을 보며 ‘저놈 또 울려고 하네’ 같은 얼굴로 손을 들어 나가라고 손짓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나는 싸이코 황제를 뒤로한 채 그 섬뜩한 방에서 나왔다.

어쩐지 들어갈 때부터 스산하더라니, 그딴 소름 끼치는 짓을 해놓는 방이라서 본능적으로 촉이 왔었나보다.

세네카를 떠나기 전에 전부 태워 버려야지.

철수가 해 줘야 할 일이 드디어 생겼다.

* * *

“미르 님, 밤마실 가실래요?”

가볍게 저녁을 먹은 뒤, 노반과 함께 침대에 누워 뒹굴거리는 내게 말했다.

밤마실… 세네카에서 갈 곳이 있나?

“밤마실?”

“네, 오늘 세네카 광장에서 축제를 연다고 해서요.”

아, 그러고 보니 이맘때쯤에 축제가 열렸다.

날이 더 추워져 함박눈이 내리기 전에 세네카 사람들은 작은 축제를 연다.

눈이 산처럼 쌓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에 아딘께 기도를 올리고 신앙심을 어쩌고저쩌고… 대충 그런 취지에서 열리는 축제라고 알고 있다.

겁쟁이 4황자는 필릭스와 몰래 겨울 축제에 가려고 황궁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나가기도 전에 깐깐한 시종에게 걸리는 바람에 라이언 황제의 귀까지 들어가 한동안 외출 금지를 당했던 적이 있었다.

황자가 축제에 가면 안 된다는 법은 없지만, 그때의 4황자는 아직 어린 나이였고, 보호자를 데려가지 않고 오직 나와 필릭스 단둘이 나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그때 그렇게 가고 싶어 했던 곳을 이제야 가는구나.

“좋아. 변장하고 갈래?”

“변장이요?”

“응, 누가 알아보면 성가실 거 같아서. 노반도 인간 모습으로 가는 게 더 재밌지 않을까?”

“컁!”

만에 하나 감시가 붙는다고 해도, 젠의 감각으로 충분히 알아차릴 수 있다.

그리고 세네카에 온 이후로 노반이 인간의 모습을 한 적이 손에 꼽았다.

같이 밖으로 나가서 산책도 하고 대화도 하고 그래야 하는데 종일 여우의 모습으로 ‘컁!’ 아니면 ‘컁컁!’만 하고 있으니 아마 답답함이 많이 쌓였을 거다.

“변장하시려구요?”

노반과 보드게임을 하던 마린이 다가왔다. 승패의 결과는 노반의 승으로, 이번에도 마린이 져 준 것 같다.

“응. 좀 덥수룩하게 가리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건 변장이라 할 수 없죠.”

마린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잠시만 기다리라는 말을 남긴 채 자신의 방으로 돌아갔다.

점점 불안해지는 마음에 얼른 나갈 준비를 하려고 옷장을 살폈지만, 빛의 속도로 돌아온 마린에게 꽉 잡혔다.

그리고 나는 짙은 쪽빛의 얌전한 드레스를 입고, 검은 망사 베일이 달린 챙모자를 눌러썼다.

“….”

“완벽해요! 그 누구도 황자님을 알아보지 못할 거예요.”

나는 거울에 비치는 내 모습에 입을 떡 벌렸다.

그래, 내가 이걸 까먹고 있었네.

프레오나 상점가에서 노반을 미행할 때 했었던 변장이랑은 차원이 다를 정도로 화려했다.

그때보다 머리카락도 길어져서 마린이 예쁘게 손질해 줬는데, 정말 영락없는 여인의 모습이 되었다.

하… 정말 너무 예뻐서 탈이다. 어쩜 여장까지 이렇게 잘 어울리니.

나는 내 모습을 바라보다, 마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정말 기뻐요. 사실, 어렸을 때 이렇게 꾸며 주고 싶은 여동생이 있었으면 했거든요.”

“마린이 기쁘면 나도 좋아.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나는 마린을 향해 방긋 웃어 주며 침대 위에서 방방 뛰는 노반을 안으려 했다.

그러자 마린이 후다닥 다가와 내가 안으려던 노반을 가로챘다.

“황자님 안 돼요!”

“응…?”

“벨벳 소재라 노반의 털이 잔뜩 붙을 거예요. 색도 어두운색이라 눈에 띄기 쉬울 거구요. 노반은 제가 안고 있을 테니 황자님은 나가기 전까지 주의해 주세요.”

나가기 전까지는 최대한 다른 이들의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야 한다는 마린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드레스 자락을 한 번 털고는 멀리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젠을 바라봤다.

그에 젠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내게 다가와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아가씨 오랜만에 뵙네요.”

“오랜만이네요, 이프리트 경.”

젠은 내 손을 잡고 손등에 짧게 입을 맞췄다.

우리의 모습을 보던 노반이 마린의 품에서 ‘캬악!’ 하며 질색하는 소리를 냈다.

아이고, 애 앞에서 뭐 하는 짓이래.

“옷 따듯하게 입고, 슬슬 나가자.”

인간으로 변할 노반이 두르게 될 두꺼운 털이 달린 망토를 아공간 주머니에 넣고 방을 나섰다.

다행히도 파시테 궁엔 시종이 많지 않았다. 젠이 이끄는 대로 빠져나가자 아무한테도 들키지 않았다.

파시테 궁에서 성문까지는 꽤 거리가 있어 마차를 탔고, 성문 밖으로 나갈 때는 마차에서 내려 파시테 궁의 시녀인 척하고 황궁을 나섰다.

마린의 보증 덕분에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를 감쪽같이 속여 넘기고 축제가 열리고 있는 광장으로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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