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 겨울 축제에 가다 (2)
겨울 축제의 마지막까지 즐기고 우리는 파시테 궁으로 돌아왔다.
아무한테도 걸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할 때쯤, 파시테 궁 정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지아와 메이븐의 모습이 보였다.
“아…”
“아.”
그들은 내가 입고 있던 짙은 쪽빛의 드레스를 보고 말을 잇지 못했다.
검은 망사가 달린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있긴 하지만, 내 얼굴을 잘 알고 있고, 익숙한 사람들은 단번에 나를 알아볼 수 있을 거다.
게다가 이곳은 4황자의 궁인걸.
나는 현기증이 날 것 같아 관자놀이를 붙잡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그들을 향해 말했다.
“이상한 오해는 하지 말아 주세요. 몰래 나가기 위해 이런 차림을 한 것뿐입니다….”
“그래. 알겠다.”
“해도 지고 날이 추우니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요. 저는 옷을 갈아입은 뒤 바로 가겠습니다.”
나는 그들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파시테 궁 안으로 들어갔다. 마린은 축제에 열과 성을 다해 피곤한지 곤히 잠든 노반을 데려다 주었다. 덕분에 젠과 나는 단둘이 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원래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침대로 직행이었을 텐데,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 때문에 글렀다.
하다못해 응접실 안에서 기다리고 있었으면 이 꼴은 안 보여 줬을 텐데, 괜히 이상한 오해를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쟤네들은 따듯하게 안에서 기다리면 되지, 왜 이 추운 날에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둘이 연애해? 막 설레서 추운 것도 모르겠나?
그리고 지금 시간이 몇 신데 왜 남의 궁에 오는 거야? 보니까 딱히 급한 일도 없는 것 같은데, 이곳보다 백배는 좋은 메이븐의 궁에서 놀지.
나는 입을 삐쭉 내밀며 옷을 갈아입으려 했지만, 등 뒤에 달린 리본이 풀리지 않아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아무리 해도 풀리지 않아 어깨에 담이 올 것 같았다.
“으으…”
힘으로 찢고 싶어도, 내 옷이 아니라서 그럴 수 없었다. 혼자 낑낑대며 고통스러워할 때, 어느새 옷을 다 갈아입은 젠이 내게 다가왔다.
“제가 해 드릴게요.”
그는 내 등 뒤에 서서 빠르게 리본을 풀은 다음, 조심스러운 손길로 드레스를 벗겨 내렸다.
두꺼운 드레스가 벗겨지자 차가운 공기가 맨살에 닿았고, 벗겨진 드레스는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는 드레스를 주우러 몸을 숙이려 했지만 젠이 내 어깨를 팔로 두르는 바람에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되었다.
“젠…?”
“….”
젠은 침묵을 지키다가, 드러난 내 어깨 위에 짧게 입을 맞춰 줬다.
뭐가 마음에 안 들었나?
평소 같으면 어깨에서 끝나지 않고 쭉 내려갔을 텐데, 어깨에만 머물러 있는 젠의 입술에 그의 기분이 신경 쓰였다.
나는 걱정되는 마음에 바로 몸을 돌려 젠을 바라봤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젠의 얼굴에는 조금 어두운 기색이 서려 있었다.
“왜 그래? 뭔가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어?”
나는 손을 들어 젠의 뺨을 부드럽게 잡으며 물었고, 젠은 내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냥 제 마음이 이렇게 좁았나 싶어서요.”
“응?”
젠은 자신의 뺨에 닿아 있는 내 손 위에 자신의 손을 올리곤, 고개를 기대었다.
낮게 가라앉은 그의 황홀한 금빛 눈동자, 우아하게 날이 서 있는 콧날, 단정한 입매와 부드러운 입술. 모든 것이 완벽한 그의 얼굴이 눈에 박히듯 들어왔다.
아, 갑자기 심장이 아프다.
만약 내가 지금 죽는다면, 너무 잘생긴 애인의 얼굴을 보고 심장에 무리가 온 게 사인일 거다. 세상에서 가장 어이없지만 행복하게 죽은 사람이네.
“마음이 좁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전부터 느꼈지만, 당신과 관련된 일이라면 한없이 욕심쟁이가 되는 것 같아요.”
젠의 말에 나는 멍하니 그의 눈을 바라봤고, 젠은 그런 나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축제에서 당신을 바라보던 사람들 전부 마음에 들지 않았어요. 그냥 바라보는 것뿐인데도 싫었어요.”
“….”
“앞으로 당신과 지낼 시간이 많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당신과 있을 시간을 조금이라도 방해받은 것 같아 저들이 곱게 보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젠은 지금 질투를 하고 있는 거다. 살다 살다 젠한테 질투를 받는 날이 다 오네!
젠의 이야기를 듣자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이제 내 마음 좀 알겠어?”
“네, 되게 답답하군요.”
“맞아. 얼굴을 가린다고 해결되는 일이 아니야. 너처럼 멋진 사람은 멀리서 봐도 멋지다니까.”
나는 부스스 웃으며 젠을 바라봤다. 그리고 발꿈치를 들어 그의 입술에 도장을 찍으며 말했다.
“내가 같은 걸로 짜증 나 했을 때 네가 말했잖아. 너는 내 거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나도 똑같아. 나도 네 거라 다른 사람한테 갈 일 없어.”
질투에는 약이 없다. 그저 ‘아, 내 애인이 이렇게 잘났어요. 저 부럽죠?’ 같은 마인드를 가져야 한다.
나도 이 경지에 오르기까지 힘겨웠었지. 솔직히 지금도 젠한테 가는 시선을 전부 끊어 버리고 싶지만, 현자의 마음을 가진 것처럼 ‘괜찮다, 어차피 내 남자다.’라고 되뇌었다.
내 말에 젠은 고개를 끄덕였고, 나는 그를 바라보며 밝게 웃어 준 다음, 침대 위에 놓인 짙은 녹색의 튜닉 셔츠를 들고 입었다.
“빨리 다녀와서 놀자. 갔다 오면 젠이 원하는 만큼 놀아줄게.”
내 말을 들은 젠은 그제야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제가 원하는 만큼 놀면 내일 못 일어나실 텐데, 괜찮으신가요?”
아, 이 빌어먹을 체력.
“내일… 딱히 할 일 없어.”
내 대답에 젠은 야살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오늘 밤에는 죽어 나겠구만.
* * *
그날 저녁, 나를 찾아왔던 메이븐과 지아는 눈치껏 자리를 떠났다.
지들 연애하러 떠난 건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밤새 젠과 함께 죽어날 때까지 운동했다. 젠에게는 미안하지만, 사실 지아와 메이븐이 중간에 다시 돌아와 줬으면 했었다.
“운동을 해서 체력이 늘면 열심히 운동을 할 텐데, 이 저주받은 몸뚱어리는 소용없겠지…?”
“오빠 저 아직 미성년자예요.”
“그냥 운동 이야기한 거야.”
“목에 있는 울긋불긋한 거나 가리고 이야기하세요.
아, 맞다.
나는 옷깃을 최대한 올린 채, 엉큼한 표정을 짓고 있는 지아를 바라봤다.
“그런 거 아니야.”
“어휴, 보기만 해도 사납네요. 그분 되게 얌전해 보였는데 그건 또 아닌가 봐요?”
지아는 자신의 앞에 놓인 딸기 에이드를 마시며 말했다. 나는 지아의 시선을 피했다.
“어제 집에 가길 잘한 것 같네요. 메이븐이 기다려도 된다고 그랬는데, 제가 그냥 돌아가자 그랬어요. 잘했죠?”
“그래…, 앞으로는 편지 보내고 와.”
내가 없을지도 모르고, 어제 축제에 갔을 때처럼 파시테 궁에 있는 척을 하고 나갔을지도 모르니까.
어제는 시종들이 모르게 몰래 나가려고 했는데, 메이븐과 지아가 오는 바람에 들키고 말았다.
어차피 돌아오는 시간이라 들켜도 상관없었지만, 그래도 그냥 범죄랑 완전 범죄가 다르듯, 들켰다는 게 조금 아쉬웠다.
“제가 가는 김에 편지도 전해 드리는 거죠.”
“…그래, 네 마음대로 해. 왔는데 나 없어도 실망하지 말고.”
“그럼요. 어차피 첫째랑 둘째 만나는 김에 오빠도 보러 오는 거예요.”
지아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고, 나는 그런 지아를 바라보며 마주 웃었다.
“그래서, 어제는 무슨 일로 온 거야?”
“아, 맞다. 완전 까먹고 있었네. 이게 너무 맛있어서.”
지아는 손에 든 딸기 에이드를 보며 머쓱해했다.
프레오나에서 만들었던 딸기 청을 아공간 주머니에서 꺼냈다. 이왕 지아도 온 김에 식상한 홍차 같은 거 말고, 탄산수를 구해다가 에이드를 만들어 줬더니 생각대로 좋아했다.
하긴, 황궁에서는 전부 찻잎으로 우린 차나 생과일주스 같은 것밖에 미실 수 없으니, 과일 청으로 만든 에이드는 지아에게도 신선했을 거다.
“딸기청 더 남아 있어. 갈 때 가져가.”
“정말요? 고마워요!”
집으로 돌아가는 딸 챙겨 주는 부모님의 마음이 이런 건가 보다.
“오빠는 손재주도 좋네요. 막 요리 같은 거 많이 하셨나 봐요.”
“요리를 자주 하진 않았어. 그냥 티비만 자주 본 거야. 잡지 책이나.”
병원에 있으면 할 게 없다.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한다. 간간이 쉬어 줄 때는 로비로 나가 티비를 보는데 하필 그 시간대가 요리 방송이 나온다. 그리고 구비된 잡지도 패션이나 요리 잡지가 대부분이라 요리 레시피 같은 이론은 빠삭했다.
내 말을 들은 지아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레시피만 보고 요리를 할 수 있어요…? 그래도 몇 번 해 봐야 감이 잡히지 않아요?”
“방법을 알고 있는데 다 할 수 있지 않아? 넌 못해?”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나를 보며 지아는 재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저거 내가 오스먼드한테 자주 짓는 표정인데.
“아, 미안. 많이 재수 없었어?”
“아니에요. 쪼금 재수 없었어요. 진짜 쪼금.”
지아는 딸기 에이드를 마시며 말했다. 엄청 재수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 딸기 청을 못 받을까 봐 조금 자제하는 것 같다.
솔직하게 말해도 안 뺏어 가는데.
“김치도 담갔어. 지금쯤이면 엄청 맛있어졌을 텐데, 가지고 올 걸 그랬나?”
“김치요?!”
아, 깜짝이야.
지아는 화들짝 놀라며 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놀래라….”
“오빠 김치도 담그셨어요? 제가 아는 그 김치요?”
“응, 배추김치. 깍두기도 담갔어. 처음 해 본 거라 맛있을지는 모르겠는데, 아마 맛있을 거야.”
엄청 좋은 배추를 썼고, 김치 속도 맛있었으니 맛있겠지, 뭐.
그러고 보니 메주도 있네, 돌아가면 메주를 보관한 방에 걸었던 시간이 천천히 흐르게 해주는 마법을 풀고 간장, 고추장, 된장을 만들어야 한다.
돌아가면 바쁘겠네.
나는 북쪽 저택으로 돌아갔을 때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며, 멍한 표정을 짓는 지아를 바라봤다.
아, 먹고 싶다는 뜻인가 보다.
“줄까?”
“네! 제발요! 무릎도 꿇을 수 있어요!”
지아는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김치만 먹을 수 있다면 무릎이라도 꿇는다고 했다.
나는 그런 지아를 보며 작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내가 네 무릎 꿇는 걸 봐서 뭐 해. 네가 달라고 하면 그냥 줄 수 있지.”
내 대답을 들은 지아는 천사라도 봤다는 듯 눈을 빛내며 고맙다고 연속으로 말했다.
그리고 나는 지아를 바라보며 장난스레 말했다.
“고마우면 황제에 대한 것 좀 기억해 줘. 떠나기 전에 큰 거 한방은 먹여 주고 가고 싶어서.”
“아, 계속 말할 기회를 놓치네요.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것 때문에 온 거예요.”
지아는 내게 기울였던 자세를 바로잡고 천천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로웨나 왕국이라고 알고 계세요?”
당연히 알고 있다.
로웨나 왕국은 드래곤을 만나고 싶었던 젠이 가고 싶어 했던 곳이니까.
“응, 알고 있어. 거기는 왜?”
“라이언 황제가 계획하고 있는 전쟁 무기의 본거지가 그곳이에요. 자연의 요새인 로웨나 왕국이요.”
이런 걸 운명이라 하는 걸까? 가게 될 곳은 어찌 됐든 가게 되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