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 겨울 축제에 가다 (4)
지아가 뛰쳐나간 뒤, 나는 소파에 기대어 앉아 후일을 생각했다.
로웨나 왕국이라…. 갈 수는 있지만 막상 가려고 마음먹으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젠이 가고 싶어 했던 곳이니, 여유가 된다면 한번 가 보려고 했다. 그래서 관련된 서적 몇 권을 찾아보며 따로 조사했는데, 알아보면 알아볼수록 한숨만 나오는 곳이었다.
로웨나 왕국에 가기 위해서는, 해류의 순환이 불안정하고, 날씨가 시도 때도 없이 바뀌어서 파도가 거센 바다를 건너야 한다. 덕분에 방향을 잡기 어려운 큰 배를 운행하지 않아 작은 배를 타고 변덕스러운 바닷길을 지나야 한다.
바다를 건너고 나서도 끝이 아니다. 드래곤이 지키는 자연의 요새답게 육지에 닿자마자 울창한 숲이 나오는데, 관련 서적에 의하면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찾는 것처럼 끊임없이 걸어야 한다더라.
마차? 그런 거 없다. 로웨나 대륙에 발을 들이자마자 인가가 아닌 나무가 빽빽한 숲이 나오기 때문에 말을 몰 수 있는 상황이 안 될뿐더러 우리가 타고 갈 그 작은 배에는 말을 태울 수 없다.
게다가 숲에 들어간다고 해도, 드래곤의 가호를 받지 못한다면 깊숙한 곳으로는 발도 들일 수 없다고 할 정도로 철통 보안이다.
“제일 문제는….”
라이언 황제의 본거지가 어디에 있을지 모른다는 거지.
로웨나 왕국은, 땅덩어리만 보자면 제국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넓다. 아예 대륙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수준이다.
그런데 내가 무슨 수로 그 넓은 곳에서 황제의 본거지를 찾냐고….
“컁!”
지아가 돌아간 걸 확인한 노반이 해맑게 소리치며 응접실로 들어왔다.
마음 같아서는 노반을 지아에게 소개해 주고 싶지만, 라이언 황제의 관심을 받고 있는 지아가 황제와 대화하다가 무심코 노반의 이야기를 하지 않을까 걱정됐다.
굳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면, 노반은 드로이프가 아닌, 보통의 여우다. 하지만 황제가 관심을 가지고 노반을 유심히 바라보면 일반 여우와 다르다는 걸 알아차릴 것이다.
노반을 위험에 빠트릴 생각은 추호도 없다.
“노반 왔어?”
“컁!”
노반은 방금까지 쿠키를 먹은 건지 입술 주변에 쿠키 부스러기를 잔뜩 묻혀 왔다.
나는 가까이 다가온 노반을 안아 들어 입가에 있는 부스러기를 털어 주며 말했다.
“쿠키 먹었어?”
“컁.”
“누가 준 거야? 마린?”
“컁!”
마린이 준거냐는 내 질문에 노반은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반이 그렇다면 그런 거지만… 마린이 줬다기에는 뒷정리가 깔끔하지 않았다.
마린이라면 입 주변을 털어 줬겠지.
노반 눈동자도 조금 떨리는 것 같고…. 이걸 잡아, 말아?
아이가 거짓말을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역시 잘못을 뉘우치게 하는 게 정석이려나.
“노반, 마린이 준 거 아니지?”
“….”
노반은 침묵을 지키며 몸을 슬쩍 뒤로 뺐다. 하지만 나와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않는 걸 보면 피하려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런 노반의 태도에 어깨에 들어간 힘을 뺀 뒤 다정하게 말했다.
“쿠키는 먹어도 돼. 노반이 경계하고 잘 생각한 뒤에 먹은 거였을 테니까. 하지만 거짓말은 나빠. 알았지?”
“컁!”
“그래, 알고 있으면 됐어.”
나는 노반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강압적이지 않고, 무해한 말투로 노반을 향해 말했다.
“그래서, 쿠키는 누가 줬어?”
“컁!”
노반은 ‘컁!’ 하고 울며 내 무릎에 내려와 밖으로 나갔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노반을 따라 나갔고, 노반은 파시테 궁 뒷문을 향해 엉덩이를 씰룩거리며 걸어갔다.
노반과 함께 도착한 곳은 성 뒤편에 있는 작은 정원이었다. 사실상 관리가 되지 않아 잡초만 무성해서, 정원이라고 하기에도 부족한 곳이다.
그곳에는 이 추운 날, 맨손으로 잡초를 뽑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노반은 여자를 향해 고갯짓하며 저 여자가 쿠키를 준 것이라고 일렀다.
전에 노반이 받아먹었던 쿠키도 저 여자가 준 건가?
나는 여자에게 가까이 다가가 최대한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뭘 하고 있는지 물어도 될까?”
“아, 잡초가 많이 나 있… 헉! 황자님!”
여자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내 물음에 잡초를 뽑고 있었다고 말하려 했지만, 고개를 돌려 나를 확인한 뒤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 내가 놀라게 했나 보네…. 편히 있어도 괜찮아.”
“화, 황자님을 뵙습니다. 제, 제 이름은 솔피입니다. 황자님께서 세네카로 오시기 며칠 전에, 저도 이곳에서 일하게 됐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솔피라고 소개하는 여자는 나를 보며 과장된 반응을 보였다.
나는 조금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고, 솔피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곤란한 표정을 짓고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이 아이한테 쿠키를 줬니?”
“예…?”
솔피는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르며 노반을 바라봤다. 그에 나는 노반을 안아 올려 노반을 바라보고 있는 솔피의 시선을 돌렸다.
나는 진득하게 솔피를 바라보며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고, 곧이어 솔피는 못 이기는 척 고개를 끄덕이곤 침묵을 지켰다.
나는 그런 솔피에게 들릴 듯 말 듯 작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솔피, 네 마음은 고맙지만, 앞으로는 그러지 않았으면 해. 이 아이는 내 앞에서 먹지 않거나, 내가 준 게 아니라면 토하는 버릇이 있거든….”
나는 그녀를 향해 거짓말을 했다.
그럴 것 같진 않지만 혹시라도, 이 여자가 라이언 황제든 퍼디스든 누구에게든 이상한 명령을 받고 노반에게 해를 끼치려 한다면?
해를 끼치는 목적이 아니더라도, 노반을 시험해 보는 걸 수도 있다. 수면 풀을 먹여 어디론가 데려가려는 걸 수도 있고, 이런저런 못된 짓을 벌이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여자의 친절을 단순한 친절로 받아들이기에는 이곳은 너무나 삭막한 곳이다.
“그런…! 죄송합니다. 제가 괜한 짓을…!”
솔피는 내 말에 깜짝 놀라며 노반을 바라봤다.
그녀의 시선을 받은 노반은 센스 있게 ‘켁켁’ 소리를 내며 내 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나는 그런 노반의 등을 톡톡 두드리며 솔피를 향해 말했다.
“약을 먹였으니 지금은 괜찮아. 걱정할 거 없어.”
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을 하고 있는 솔피를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는 신경 써 줬으면 좋겠어. 전에도 누가 간식을 줬는지 하루 종일 토했거든…. 부탁할게.”
솔피는 단호한 내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죄송하다고 말했다.
나는 노반을 바닥에 내려놓고, 고개를 숙여 미안해하는 솔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맨손으로 잡초를 뽑느라 차가워진 그녀의 손을 잡으며 내 손의 온기로 데워 줬다.
“겨울이라 손도 시릴 텐데, 잡초는 뽑지 않아도 돼. 혹시 누가 시킨 거라면 내가 하지 말라고 했다 하고.”
솔피는 내가 잡은 자신의 손을 빤히 바라보며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 따듯해진 그녀의 손을 놓고, 다시 노반을 안아 올린 채 미소를 지었다.
“그럼 난 먼저 들어갈게. 솔피, 너도 추운데 밖에 오래 나와 있지 말고. 감기 걸릴라.”
나는 그녀에게서 등을 돌린 채 다시 성 안으로 들어갔다.
점점 방에 가까워질수록 유하게 풀려 있던 표정이 굳어졌다.
“어떤 새끼가….”
솔피의 손에는 굳은살이 박여 있었다. 노동으로 생긴 굳은살이 아닌, 검을 쓰는 사람에게만 박여 있는 굳은살이었다.
항상 검과 함께했던 젠의 손을 닳도록 만졌던 나니까 그 굳은살의 의미를 더 잘 알고 있다.
누가 보낸 거지? 라이언 황제? 퍼디스?
누가 보냈든 화가 난다. 솔피는 내가 세네카로 돌아오는 날에 맞춰 들어온 시녀라고 했다. 이건 다분히 계획적이었다는 소리다.
“노반, 앞으로 솔피한테 가까이 가지 마. 아니다. 가능하면 마린이나 나한테서 떨어지지 마. 알았지?”
“컁!”
솔피 같은 사람이 한 명만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는다.
이곳에 있는 모두가 누군가가 심어 놓은 사람일 가능성도 크다.
내가 세네카에서 너무 안식하고 있었네. 다시 긴장해야 될 것 같다.
나는 그동안 생각 없이 말을 하거나, 남들이 봤을 때 이상하게 생각할 만한 일을 했나 곰곰이 생각하며 방으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그때, 주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황자님.”
“아.”
나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그동안 완전히 잊고 있었던 보리언이었다.
맞다, 나 얘랑 같이 왔었지.
분명 파시테 궁에 방을 내줬음에도 보리언과는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다.
세네카에 왔을 때 너무 바쁜 나머지 같이 식사를 하는 것도 잊고 있었고, 그걸 넘어서 보리언이 이곳에 있다는 걸 아예 잊어버렸었다.
이거 은근 미안하네….
“아, 보리언. 오랜만이네,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냐는 내 물음에 보리언은 내게 인사를 한 뒤, 잠시 길게 이야기할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그에 고개를 끄덕이고, 그를 내 방으로 안내했다.
응접실에 가도 되지만 내려가기도 귀찮고, 보리언의 얼굴을 보고 나니, 그에게 부탁할 이야기도 생겼다.
“무슨 일이야? 그간 얼굴도 못 볼 정도로 바쁜 것 같던데.”
“말없이 사라져서 죄송합니다. 잠시 급하게 수도를 떠날 일이 생기는 바람에 언질도 드리지 못했습니다.”
“…괜찮아. 네가 알아서 잘했겠지. 밥은 잘 먹고 다녔어?”
이상하게 보리언만 보면 밥은 먹었냐고 묻고 싶다.
그는 마르고 허약한 나와는 다르게 건장하고 근육도 딴딴한 사람이지만, 자신의 의지로 밥을 먹고 있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본적이 없다. 그래서인지 그를 볼 때마다 항상 밥을 먹었는지가 궁금했다.
음식을 잘 먹지 않는 사람 중에서도 상위권을 차지하는 젠도 가끔은 토스트를 베어 먹는데, 보리언은 아예 먹질 않는다.
“에, 황자님. 잘 먹고 다녔습니다.”
보리언은 형식상 대답해주듯 대충 말했다.
마음 같아서는 뭘 먹고 다녔는지 꼬치꼬치 캐물었겠지만, 보리언한테 그런 오지랖을 부리기에는 우리의 관계가 조금 멀지 않나 싶다.
보리언은 오스먼드의 사람이니까.
“다행이네, 하고 싶다는 말은 뭐야?”
내 질문에 보리언은 잠시 노반을 빤히 바라보다가, 자신의 품속에서 낡은 두루마리를 꺼내서 내게 건넸다.
“이게 뭐야?”
“보셔야 할 것 같아 가져왔습니다.”
나는 보리언이 가져온 두루마리를 풀어 내용을 확인했고, ‘드로이프’라는 글자를 보자마자, 재빠른 손짓으로 두루마리를 접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는지 순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노반을 내 무릎 위에서 떼어 침대 위로 올려 주고, 나오지 못하게 이불을 돌돌 말아 덮어 줬다.
“노반 잠시만 여기서 따듯하게 있어.”
“낑?”
“잠깐만 보리언이랑 대화 좀 할게. 그 바다뱀 때문에 욕을 할 수도 있어서, 노반이 안 들었으면 좋겠어. 이해하지?”
“컁!”
나는 오스먼드의 핑계를 대며 노반을 떨어트려 놨다. 그리고 다시 보리언의 앞으로 돌아와 내팽개쳤던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 안에는 경악할 만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