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겨울 축제에 가다 (5)
보리언이 전해 준 두루마리에는 내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 쓰여 있었다.
“이게….”
나는 내가 보고 있는 이것이 진짜인지 아닌지 보리언을 향해 물었고, 보리언은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드로이프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강한 생명력을 가진 고대 생물이다.
그런 드로이프의 강인한 생명력을 마법으로 짜내고, 그것을 응축시킨 정수를 인간에게 먹인다.
그 정수가 인간의 몸에 자리를 잡으면 보통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인간 병기가 만들어진다.>
이 두루마리에 쓰여 있는 내용으로 그동안 의문투성이였던 것들이 퍼즐 조각처럼 맞춰졌다.
라이언 황제에게 노예들은 그저 실험체였을 것이다. 그런 라이언의 음모를 알아차린 레이트라는 실험체인 노예들을 구제하며 빼돌렸을 테고, 라이언은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레이트라의 가문을 멸문시켰을 것이다.
드로이프의 마을을 그 지경으로 만든 것도 라이언 황제일 거다. 어떻게 인간이 드로이프를 이겼는지는 모르겠지만 범인은 라이언 황제가 확실하다.
이건 전부 황제의 짓이다.
“황자님.”
보리언이 나를 불렀다.
덕분에 혐오스러웠던 기분에서 벗어나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그러나 입 안에서 비릿한 피 맛이 느껴졌다.
무의식적으로 입술을 강하게 깨물어 피가 났나 보다.
보리언은 자신의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내게 건넸고, 나는 괜찮다고 고개를 저으며 입술에 맺힌 피를 손등으로 쓸었다.
그에 보리언은 내게 건넸던 손수건을 다시 품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건 어디서 가져온 거야?”
내 질문에 보리언은 잠시 침묵을 했다.
이 두루마리의 출처를 내가 알게 되면, 자신이 세네카에 온 뒤로 오스먼드의 명령을 수행하며 어떤 일을 하고 다녔는지를 말하게 되는 꼴이고, 그 일을 알리는 걸 염려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대충 예상은 간다. 귀족들과 연결점을 찾아서 내통하려 한다거나, 아니면 이미 연결된 귀족들을 만나러 다닌 거겠지.
“괜찮아. 네 일에 관심 가지지 않을게. 난 이 새끼만 조질 거니까.”
나는 손에 든 두루마리를 흔들며 말했다.
그에 내 눈을 빤히 바라본 보리언이 입을 열었다.
“그건 두루마리를 보여 드린 순간부터 각오하고 있던 일입니다.”
보리언은 그렇게 말하며 손수건을 집어넣었던 품속에서 또 다른 은패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낯설지만 어딘가 익숙한 문양이 찍혀 있었다.
“페모스토프 공작의 집에서 발견했습니다.”
페모스토프…?
“하….!”
페모스토프 공작이라면 황후의 가문이다.
나는 어이없고 허탈한 기분에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은패는 한 가문을 상징하는 중요한 증표이다. 비유하자면 암행어사 마패 같은 것으로, 자신의 신분을 상징하기에 가문의 주인이 갖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그걸 보리언이 가지고 있다는 것은, 주인이 직접 넘겨줬다거나 집 안으로 들어가서 강탈했다는 거다.
보리언이 어떻게 이 은패를 손에 넣었는지는 관심 없다. 이 은패가 나온 곳에서 이 두루마리가 나왔다는 게 중요한 거다.
황후는 모든 것을 알고 나를 떠본 것인가. 그게 아니라면 페모스토프 공작이 황후마저 속인 것인가.
아무튼 페모스토프와 관련되었다는 걸 알았으니 그 누구도 믿어서는 안 된다.
로이븐과 메이븐조차도 믿을 수 없다.
“수도에 있는 페모스토프 저택은 아닐 테고, 어디?”
“알란드입니다.”
알란드라면 항구와 가까운 곳이라 이동이 수월한 곳이다.
그곳에서 로웨나 왕국으로 빠지는 건가….
한시라도 빨리 로웨나 왕국으로 가야 한다.
그 전에 이 새끼부터 조지고 가야지.
“얘는 뭐 하는 놈인지 알아? 내가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서 황후의 가문이라는 것 빼고는 잘 몰라.”
나는 보리언을 향해 페모스토프 공작이 뭐 하는 사람이냐 물었고, 그에 보리언은 잠시 미간을 찌푸리며 생각을 정리하다 입을 열었다.
“이것저것 전부 손을 대고 있어서 뭐라고 딱 정의하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페모스토프 공작은 어업, 농업, 상업 등등 모든 방면에서 손을 뻗고 있는 대부호라고 설명했다.
페모스토프 공작은 가리엘 황후의 남동생인 카이브 페모스토프다.
그들의 아비인 전대 공작도 만만치 않게 욕심쟁이였지만, 그의 아들인 카이브는 상상을 넘는 욕심쟁이다.
“보리언, 미안하지만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제가 들어 드릴 수 있는 거라면 괜찮습니다.”
“오스먼드 폐하께 편지를 보내 줄 수 있을까? 내 이름으로 보내면 검열당할 것 같아서.”
믿을 사람이 없다. 게다가 제국의 4황자이자 적국의 볼모인 내가 프레오나 황제에게 편지를 보내는데 내용을 확인하지 않을 리가 없다.
나 대신 편치를 부쳐 달라는 뻘쭘한 부탁에 보리언은 고민도 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해 줬다.
“잠깐만, 얼른 쓸게.”
나는 책상으로 가 앞에 놓여 있는 책을 펼쳐 제일 앞장을 찢었다.
그리고 펜을 꺼내 글자를 휘갈겼다.
<폐하.
프레오나로 돌아갈 날을 조금 미뤄야겠습니다.
만약 돌아갈 수 있다면, 폐하께서 만족하실 선물을 준비해 갈 테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 제 숨이 이곳에서 끝난다고 해도 폐하께선 너무 슬퍼하지 말아 주십시오. 그저 혼자 좋은 날에 떠났다며 하늘을 향해 위로를 건네주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당신의 골칫덩이가.>
혹시 배달 과정에서 누가 볼지 몰라 뭉뚱그려 써 놨지만, 대충 물귀신 작전으로 안 데리고 갈 테니 걱정 말라는 뜻이었다. 제 목숨은 끔찍이 챙기는 오스먼드가 내 편지를 못 알아볼 리 없다.
나는 편지를 두 번 접어 보리언에 건넸다.
“부탁할게.”
“혹시 페모스토프 공작을 찾으러 가실 예정이십니까.”
내 편지를 받아 든 보리언이 조심히 물었다.
그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응. 내 아이 눈에서 피눈물 나게 하는 사람은 남는 구멍 없이 온몸에서 피가 나오게 할 거야.”
나는 주먹을 꽉 쥐고 입술을 다시 깨물었다.
겨우 멈췄던 입술의 피가 다시 흘렀고, 보리언은 다시 손수건을 내밀었다.
두 번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보리언의 손수건을 받아 들고 입술을 닦았다.
아무런 무늬가 없는 하얀 손수건에 붉은 꽃이 핀 것처럼 물이 들었다.
“미안, 피는 세척해도 잘 안 지워질 텐데. 중요한 게 아니라면 새 거로 줄게.”
“괜찮습니다.”
“아니야. 새 손수건 같은데 내가 미안해서 안 돼.”
나는 옷장으로 들어가 사용하지 않은 새 손수건을 찾아 봤다.
분명 포장되어 있는 게 여기 하나 있을 텐데.
“정말 괜찮습니다. 이것 말고도 많이 있습니다.”
“오, 손수건도 가지고 다니는 섬세한 성격이었구나.”
우리 젠도 가지고 다니는데.
젠은 꽃이 새겨진 손수건을 들고 다닌다. 전에는 몰랐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 보니 그 손수건의 꽃은 제노아스였다.
진짜 운명 같네.
보리언에게 줄 손수건을 찾으려 옷장을 살피던 중, 담담한 목소리로 보리언이 이야기했다.
“이건 폐하께서 황자님이 쓰게 될 일이 많을 거라며 가지고 다니라 하셨습니다.”
잠시 의문에 휩싸였다.
내게 손수건을 쓸 일이 많이 있을 거라고?
별 해괴한 말을 다 들어 본다.
손수건은 보통 음식을 흘렸을 때 닦아 내거나, 눈물을 닦는 용도 아니야?
나는 유년시절 때 식사 교육을 엄하게 받아서 그런지, 식사 예절을 신경 쓰는 게 습관이 되었다. 때문에 음식을 흘려 본 적이 없다. 그리고 오스먼드 앞에서 울어 본 적도 없는데, 저건 또 무슨 개소리야.
“…내가?”
확인차 다시 물어봤지만, 보리언은 고개를 끄덕일 뿐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손수건을 쓸 일이 있나?”
너네 폐하가 무언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나는 조금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보리언을 향해 물었고, 보리언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말했다.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앞에서는 자존심 때문에 꾹 참고 계시만 뒤에서는 눈물을 많이 흘리셨다고 들었습니다.”
그건 또 무슨 말도 안 되는 유언비어야?
내가 뒤에서 눈물을 흘리는 타입이라고? 웃기시네, 나는 울 일이 생기면 원인을 파악하고 분노를 쌓아 두는 사람이다.
만일 운다고 해도 젠이나 마린, 노반과 관련된 일이거나, 양파를 썰 때가 전부일 텐데, 나는 내 사람들 일로 오스먼드 앞에서 울어 본 적이 없고, 양파도 썰어 본 적은 더더욱 없다. 아마도.
“흐음…”
아, 설마…! 일하기 싫어서 눈 촉촉하게 만들었을 때 이야기인가?
오스먼드가 나를 불러서 일을 시킬 때마다 눈을 찹찹 때려서 붉게 만들거나, 일부러 하품을 해서 눈물을 고이게 한 적이 꽤 있었다.
설마 그것 때문에 보리언한테 손수건 가지고 다니라고 한 거야?
이건 뭐, 감동해야 하는 건가…
“그것 참… 감동이야. 폐하께선 섬세하시구나….”
그때 옷장 안에서 손수건이 들어 있는 작은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에는 로렐라이의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로렐라이의 손수건은 로렐라이의 의상 숍에서는 팔지 않고, 로렐라이가 직접 주는 것이다. 예전부터 쭉 받아 온 거라 더 깊숙이 찾아보면 산처럼 쌓여 있을 거다.
선물받은 걸 주기에는 조금 양심에 찔리지만… 뭐 어때.
“여기 있어. 이거 돈 주고도 못 사는 거야. 혹시라도 나중에 급전 필요하면 비싸게 주고 팔아.”
나는 미소를 지으며 보리언에게 말했다. 그에 보리언은 잠시 망설이다 내가 손을 내리지않자 고개를 끄덕이고 감사하다고 말하며 받았다.
노반은 어느새 침대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고, 나는 그런 노반을 바라보며 보리언에게 말했다.
“우리는 페모스토프 공작을 만난 다음 드로이프가 있는 곳으로 갈 거야. 보리언, 너는 어떡할래?”
보리언의 표면적인 임무는 내 곁을 지키는 거다. 그러니 보리언이 우리와 함께 가는 건 문제없다.
오스먼드 입장에서도 나를 지켜볼 누군가가 함께 있는 편이 마음이 놓일 거다.
하지만 보리언이 아직 할 일이 끝나지 않았다면, 우리와 함께 가는 건 어렵지 않을까.
솔직히 보리언이 같이 가 주는 게 더 편할 거다. 우리끼리 간다면, 마주치는 마물과의 싸움이라든가, 힘을 쓰는 일을 젠밖에 못하게 되지만, 보리언이 함께 간다면 손이 더 느는 셈이니 여러모로 좋을 것 같다.
같이 가는 김에 보리언이 밥 먹는지도 확인하고.
“함께 가겠습니다. 폐하께선 함께 돌아오라 하셨으니, 황자님이 가는 곳이 제가 가야 할 곳입니다.”
“그래, 네가 같이 가 주면 여정이 더 편하겠다. 밥은 안 굶기고 잘 줄게.”
내 말에 보리언은 잠시 침묵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 그리고 감사 인사가 늦었네. 정말 고마워, 네가 아니었음…”
이걸 알아 내는 데 꽤 힘이 들었겠지. 시간도 들었을 테고, 드로이프를 구해 내는 것도 더 늦어졌을 거다.
그것을 제외하고도 나는 보리언에게 크게 감동받았다. 오스먼드가 내린 명을 내게 알려주는 것에 마음이 찡하게 울렸다.
이건 뭐, 자기 주인한테 잠깐 등 돌리는 거나 다름없는 거 아니야?
오스먼드, 넌 나한테 졌어. 은혜 갚은 까치라더니. 이거 봐, 밥 잘 먹여 주니까 이렇게 은혜를 갚잖아.
“아닙니다. 저는 오스먼드 폐하의 뜻을 따르는 것뿐입니다.”
“….”
아. 생각해 보니 그러네.
인간 병기든 뭐든 이걸 막아야 프레오나가 안전해지는 거잖아.
프레오나에서 세네카로 건너오는 것 보다, 세네카 사람인 내가 해결하는 게 더 나을 테고.
뭐야, 프레오나로 돌아가면 수고비 받아야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