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 페모스토프 공작가를 향해 (4)
나는 아이를 향해 물었다. 너는 누구의 명을 받고 있냐고.
그에 아이는 내 시선을 마주하며 당당하게 말했다.
“저는 황태자 전하의 명을 따르고 있습니다. 제 모든 것을 걸고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아이는 그리 말하곤 고개를 숙였다. 나이에 맞는 얇은 목소리가 조금 떨렸지만, 그 안에는 로이븐을 향한 굳센 의지가 느껴졌다.
하지만 빛 좋은 개살구라고, 말로는 다 그렇다 하지. 뭔들 못 하겠어?
“내가 그걸 어떻게 믿지?”
나는 덜 재수 없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떠보거나 약올리는 표정이 아닌, 정말 어떻게 믿어야 할지 모르는 듯한 아주 순수한 표정으로 말이다.
아이는 내 말에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진지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했다.
“황태자 전하께서 절 거둬 주신 이후부터 제 목숨은 황태자 전하께 있습니다. 목숨을 끊으라는 것만 아니라면, 그 어떤 시험이든 진지하게 임하겠습니다.”
나는 아이의 말을 듣고 가만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렇게까지 강경하게 말하는데 뭐라 하기도 그렇고, 어차피 확인할 방법도 없다.
나는 나와 눈을 마주치고 있는 아이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다짜고짜 오해하듯 말해서 미안해. 확실하게 확인하고 싶어서 그랬어.”
“이해하고 있습니다.”
아이는 내 무례한 행동을 괜찮다고 해 줬다.
나는 그 아이에게 작은 미소를 지어 주며 말했다.
“나는 네가 내 형님께 어디까지 말했는지가 궁금해.”
네가 보고 들은 것을 로이븐에게 어디까지 전했니?
내 물음에 아이는 잠시 당황하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저는 황태자 전하께서 물어보신 대로, 황자님이 안전하게 잘 계시는지 정도만 전달했습니다.”
아이가 한 말은 아까 전 로이븐이 했던 말과 똑같았다.
호위인 척 감시하라고 보냈는데 오직 내 생사만 궁금해했다고? 진짜인가?
“날 지켜봤다면 다양한 걸 봐 왔을 텐데, 그것밖에 전하지 않았다는거야…? 어째서?”
그럴 리가 없을 거라는 내 말에, 아이는 볼을 붉히며 말했다.
“…부끄러운 말씀이지만, 저는 황자님께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그게 무슨…. 아.”
젠 때문인가.
“예, 맞습니다. 황자님께 가까이 가려 하면 이프리트 경께서 막아서는 바람에, 일정 거리 이상 가까워 지지 못했습니다.”
“그랬구나….”
“저는 그저 보이지 않는 것을 쫒아다니는 것에 불과했습니다.”
나는 머쓱한 얼굴로 아이를 바라봤다.
처음부터 걱정할 것도 없었구나.
“그렇다 해도 고마워. 만일 위험한 상황이 생겼다면 네가 도와줬을 테니까. 알고 있었다면 더 든든했겠다.”
“이프리트 경이 버티고 있는 이상 제가 나설 일은 없었을 겁니다.”
아이는 감사 인사를 받기에는 자신이 부족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리 말하는 아이의 표정은 마치 무력한 자신을 통감한 것처럼 울적해 보였다.
나는 그런 아이를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사람 일은 모르는 거지. 너는 큰 도움이 됐을 거야.”
내 말을 들은 아이는 내게 감사하다는 말을 하려 했지만, 채 말을 잇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혔다.
울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아이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아이의 눈물에 허둥대며 품을 뒤졌지만, 가지고 있는 거라곤 내 피가 묻어 있는 보리언의 손수건밖에 없었다.
이걸 눈물 닦으라고 줄 수도 없고….
“죄, 죄송합니다. 황자님.”
아이는 당황하는 나를 보며 자신의 소매로 눈물을 닦았다. 나는 그것에 더욱 미안한 마음이 들어 응접실 주변을 살피며 무언가 닦을 게 없나 살폈다.
아, 맞다. 나한텐 이게 있었지.
나는 라이언 황제에게 자수정을 뺏긴 뒤로부터, 항상 들고 다니는 아공간 주머니를 꺼냈다. 누가 보고 있을 때는 잘 사용하지 않는 편이라 아예 까먹고 있었다.
손바닥만 한 아공간 주머니에 손을 쑤욱 넣어서 노반이 좋아하는 보들보들한 감촉의 수건을 꺼냈다.
“소매로 닦으면 눈이 쓰릴 거야. 이걸 써, 마땅히 닦을 게 없어서 미안하네….”
내게서 수건을 받아 든 아이는 찔끔찔끔 흘리던 눈물을 못 참겠다는 듯 봇물이 터지듯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내 말에 어디가 감동적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이 상태에서 누군가가 들어온다면 내가 아이를 울렸다고 생각할 거다.
“미르야, 도중에 미안하지만 지금 마탑이…!”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아이가 울고 있을 때 로이븐이 딱 들어왔다.
이쯤 되면 마탑이 난리가 났을 테니, 마탑으로 가 보겠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바로 마탑으로 향할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달리 로이븐은 울고 있는 아이에게 가까이 다가가 아이가 왜 울고 있는지를 먼저 살폈다.
참 좋은 인성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마탑이 깡그리 불태워지고 있는 한시가 급한 상황일 텐데 자기 사람부터 챙기고 있으니 말이야.
“키오, 왜 울고 있는 것이냐.”
“아, 아닙니다. 황자님이 상냥하셔서, 크흡…. 레이트라 님도 이런 상냥한 분이셨을까 하는 생각에 눈물이 나왔습니다….”
레이트라?
그 이름이 왜 여기서 나와?
“그래, 그랬구나. 그 분도 굉장히 따듯한 분이셨어.”
로이븐은 쓸쓸한 표정을 지으며 울음을 쏟는 아이, 키오를 달랬다.
나는 왜 레이트라의 이름이 나왔는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로이븐을 바라봤고, 로이븐은 나중에 자세히 이야기해 주겠다면서 눈물이 마르질 않는 키오를 달랬다.
그리고 점차 키오의 울음이 멈춰 갈 때쯤 로이븐은 시간을 확인하곤 서둘러 마탑으로 가야 한다며 걸음을 옮겼다.
“그럼 상황이 정리되는 대로 찾아갈 테니 기다리고 있거라.”
로이븐은 오늘의 이야기는 마탑의 일을 해결한 다음에 이야기하자고 말했다.
안타깝지만 오늘 안에 정리 못할걸? 한 일주일은 활활 타오를 거다. 그 불은 물의 정령왕이 오는 게 아니고서야 절대 못 끌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나는 로이븐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고, 키오와 조금 더 대화를 나누다가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에 로이븐은 고개를 끄덕이며 밖으로 나갔고, 나가기 전에 젠을 노려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로이븐의 강력한 시선을 받은 젠은 로이븐이 자리를 떠난 뒤, 응접실 안으로 들어와 내 뒤에 섰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젠과 시선을 맞추며 작은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형님이 많이 괴롭혔어?”
“조금… 아니, 많이요.”
젠은 조금 풀이 죽은 얼굴로 내게 로이븐의 만행을 일러바쳤다.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눈치를 주고, 자신의 아우를 줄 수 없다며 으름장을 단단히 놓았다고 한다.
나는 로이븐스러운 행동과 답지않은 젠의 반응에 웃음이 튀어나오려 했지만, 그전에 자신의 주군을 욕되게 하고 싶지 않은지, 아직 울음이 가시지 않은 키오가 입을 열었다.
“말씀 중에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황태자 전하께는 그저 작은 심술로 그러시는 것뿐입니다…!”
키오는 젠의 눈을 빤히 바라보면서도 쩔쩔매며 말했다.
나는 젠과 키오를 번갈아 가면서 보다가, 젠에게 쫄아 점점 기세가 옅어지는 키오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형님께서 진심이 아니라는 건 우리도 알고 있어. 형님은 황제 폐하와는 다르게 내 행복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해 주시니까.”
“맞습니다.”
“아… 근데 이번 거는 진심인 것 같기는 해.”
나는 젠을 바라보며 작게 읊조렸다.
키오가 젠에게 기가 죽는 것을 로이븐도 봤을 거다.
로이븐에게 젠은 자신의 부하가 무서워하는 사람이자, 자신의 귀여운 아우를 훔쳐간 못된 놈일 것이다.
그럼 젠이 싫을 수도 있지.
나는 어느새 울음을 그친 채 수건을 끌어안고 있는 키오를 바라봤다.
조금 진정되어 보이는 키오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있잖아, 내가 키우는 여우 알고 있어?”
“…네, 알고 있습니다.”
“혹시 그 여우도 형님께 말할 생각이야?”
로이븐에게 말할 거냐는 조심스러운 내 물음에 나를 바라보고 있던 키오의 눈동자가 살짝 돌아가며 젠의 눈치를 살폈다.
아, 설마 이것도…?
“여, 옆에 계신 이프리트 경께서 아기 여우의 정체를 입 밖으로 꺼내면 모두가 위험해진다고 하시기에 말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황태자 전하께서 먼저 말을 꺼내신다면 저는 알려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젠의 눈치를 보면서도 할 말은 하는 키오를 보며 웃음이 나왔다. 뭔가 띨빵하면서 착한 아이구나 싶었다.
“그래, 형님께서 먼저 궁금해하신다면 이야기해도 좋아. 그리고 내 말도 함께 전해 줄 수 있을까?”
나는 잠시 입술을 꾹 다물고 생각을 정리하며 키오를 향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 아이는 내 가족이라 할 수 있는 소중한 아이니 그 아이가 위험해질 만한 상황은 없었으면 좋겠다고, 모쪼록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지 않게 부탁드린다고 전해 줘.”
간절함이 가득 담겨 있는 내 말에 키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 이야기는 전부 끝났기에 나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응접실에서 일어났다.
다시 한번 고마웠다고 키오에게 인사를 한 뒤, 냉정한 눈빛으로 키오를 바라보는 젠을 끌고 밖으로 나왔다.
궁 밖으로 나오니, 멀리서도 한눈에 보일 정도로 마탑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정령의 불이라 그런지 붉은 불꽃만 타오를 뿐, 희한하게 연기가 나지 않았다.
다행히 공기는 맑겠네.
나와 젠은 마탑에 신경 쓰지 않고, 로이븐이 가기 전에 준비했다는 마차 위로 올라탔다.
마차는 빠르게 파시테 궁을 향해 달렸다. 마탑이 불에 타고 있는 난데없는 일에 소란스워진 황실의 거리를 지나, 언제나처럼 조용한 파시테 궁에 도착했다.
도착하자마자 바로 방 안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것은, 혼이 나가 있는 듯한 필릭스와 그런 필릭스를 놀리는 철수, 그리고 그 사이에 고고하게 앉아 있는 나이가 든 중후한 여자였다.
여자는 4황자의 기억은 물론, 내 기억에도 남아 있는 여자였다.
“케이시 경….”
“오랜만이구나, 미르. 아니, 황자 전하라고 불러야 하나?”
여자는 내 부름에 얕게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이 앉아 있어 놀랐고 곧이어, 조그마한 분노로 인해 손이 떨렸다.
가문은 알려지지 않아 그저 ‘케이시’라고 불리는 여성은 내가 세네카를 떠날 때, 떠나는 내가 불쌍하다며 아공간 주머니를 준 사람이자, 4황자의 친모인 레이스라의 마법 스승이다.
이럴 수는 없다.
“당신이었던 겁니까?”
나는 배신감이 가득한 얼굴로 케이시를 바라봤다. 그에 케이시는 자애로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네가 무엇을 말하는 건지 나는 모르겠구나.”
케이시는 여유로운 태도로 나와 눈을 마주쳤다.
순순히 말해 줄 것 같지 않은 그녀의 태도에 나는 눈을 감고 목에 들어갔던 힘을 뺐다. 그리고 작은 한숨을 쉰 다음 감았던 눈을 뜨며 굳게 마음을 먹었다.
“마탑에서 무얼 하고 있었는지 말해 주셔야 할 겁니다.”
“네가 그걸 알아서 뭘 할 수가 있지? 애초에 내가 말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보내 드릴 생각도 없으니까요.”
강경한 내 말에 케이시는 눈썹을 들며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네가 나를 붙잡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라는 듯한 당당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런 케이시를 바라보며 냉소적인 미소를 지었다.
“이곳에서 절대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혹 빠져나간다 해도, 케이시 경이 돌아갈 자리 또한 없을 것이고요.”
“내 자리가 없을 거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작게 웃는 케이시에게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은 불길이 사그라들지 않는 마탑에서 빠져나오지 못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마법사니까요.”
“….”
“지옥에서 돌아온 악마 소리를 듣기 싫다면, 얼른 입을 여시는 게 좋을 겁니다.”
내 말에 케이시의 미소가 살짝 금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