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173화 (173/227)

173 페모스토프 공작가를 향해 (5)

‘당신은 오늘부터 죽은 사람’이라는 섬뜩한 내 말에 케이시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알고 있던 그 선한 아이는 어디 갔는지… 안타깝구나.”

케이시의 말에 나는 아주 약간 양심이 찔렸다.

당신의 말대로 당신이 알고 있던 그 아이는 내가 아니지. 하지만.

당신도 그 아이가 알던 사람이 아니잖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으며 케이시를 가만히 바라봤다.

케이시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내 미소에 답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시든 꽃처럼 연약했던 옛날보단 지금 너의 모습이 레이트라의 아들답구나.”

“그 입으로 내 어머니의 이름을 담지 마.”

4황자의 기억을 돌아보면 4황자는 케이시의 신분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이 여자에겐 항상 존댓말을 쓰며 존중해 줬다. 제 어머니 레이트라의 스승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럴 생각이 없다.

저쪽에서 먼저 뒤통수를 쳤으니, 존중해 주는 것도 여기까지다.

“미리 말하지만 나는 길게 끌을 생각 없어. 한시가 바쁘니까 말이야.”

케이시는 생각보다 여유로운 얼굴로 내 행동을 관찰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케이시를 바라보며 굳어진 표정을 풀고 말했다.

“내가 세네카를 떠나기 전까지 말해 준다면 당신은 곱게 나갈 수 있는 거고, 말하지 않고 버티면….”

“버티면?”

“죽음에서 살아 돌아온 악마가 되는 거지.”

나는 나와 계약했던 악마를 생각하며 장난스레 말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모르겠다. 아마 잘 지내고 있겠지. 또 어디서 순진한 인간 하나 꼬셔서 영혼 빼먹고 있으려나.

그런 시답잖은 딴생각을 하던 와중, 내 말이 웃겼는지 작게 비웃으며 케이시가 말했다.

“악마라니, 요즘 누가 그런 걸 믿겠니.”

“사람은 생각보다 단순해. 믿을 수밖에 없는 그림을 보여 주면 믿게 되는 거야. 뭣하면 시험해 보든가. 난 그것도 괜찮은데.”

“너… 정말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구나. 내가 알던 순한 아이의 모습은 사라졌어.”

케이시는 씁쓸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떨궜다.

나는 그런 케이시를 아무 말 없이 가만히 바라봤다. 마탑 연구에 대해서 말을 돌리려는 건지, 아니면 진짜 자신이 알던 그 아이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씁쓸해서 그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방금까지 혼이 나가 있던 필릭스가 끼어들었다.

“다르지 않습니다. 미르의 한쪽 면만 봐 왔던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미르는 어릴 때부터 마음 한구석에 이런 음습한 성격을 품고 있었습니다.”

쟤가 지금 내 편을 들어 주고 있는 건가? 아니, 저걸 내 편이라고 할 수는 있는 건가?

나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대놓고 나를 까고 있는 필릭스를 바라봤고, 필릭스는 내 기색 따윈 안중에도 없는 건지, 내가 눈치를 줘도 굴하지 않고 케이시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제가 약속 시간보다 늦으면 말로는 괜찮다고는 하지만 하루 종일 눈빛에 살기를 품었습니다. 그리고 항상 제시간에 도착했던 편지는 평소보다 늦게 왔었죠.”

“그랬….”

“그리고 눈이 오는 날에 눈싸움하러 나갔더니, 눈덩이 안에 돌멩이를 넣어서 던졌었습니다. 말로는 실수라고는 했지만 절대 실수가 아니었습니다. 무릎까지 쌓인 눈밭에서 돌멩이를 찾는 건 아주 어려울 테니까요.”

“그렇….”

“그리고 또 하루는 자신이 차를 내오겠다며 주방으로 들어가더군요. 그리고 인원은 두 명인데 차를 열 잔을 타오더랍니다. 그중 한 잔을 고르라기에 아, 다른 시종들 차도 타 온 건가? 역시 마음이 깊구나 싶어서 아무 의심 없이 한 잔 골라 마셨는데 혀가 아릴 정도로 짠맛이 나더군요. 말로는 설탕과 착각을 했다고 하지만, 본인은 아무렇지 않게 달달한 차를 마시면서 말하는데 그걸 누가 믿겠습니까? 그리고 또….”

필릭스는 이때다 싶어 그동안 겁쟁이 4황자에게 느꼈던 억울한 마음을 표출했다.

나는 필릭스가 했던 말을 곱씹으며 4황자의 기억을 살폈고, 몇몇 이야기는 기억이 흐릿했지만, 눈덩이 이야기는 놀랍게도 실제로 있던 일이었다.

필릭스가 오해하고 있는 게 있다면, 그건 고의가 아니라 정말 겁쟁이 4황자의 실수였다. 눈덩이를 크게 만들고 싶어 눈 속 깊숙이 손을 넣어 눈을 모았는데, 어쩌다가 거기에 짱돌 하나가 박혀 있던 것뿐이다.

차 복불복은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아마 4황자는 심심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필릭스는 밤을 새워서라도 그동안 묵혔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다.

케이시도 나와 같은 마음인 것 같았다. 하지만 필릭스는 필사적으로 케이시를 바라보며 이야기했고, 케이시는 그저 눈을 깜빡거리며 필릭스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에반스터 경, 이제 그만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

보다 못한 젠이 정중하게 필릭스를 말렸다. 덕분에 정신을 차린 필릭스는 내 눈치를 한번 본 뒤, 그나마 흥미롭게 듣고 있던 철수의 뒤에 숨었다.

철수는 평소 인간들이 어떻게 노는지 알 수 있는 기회라, 필릭스의 과거 이야기를 단순히 재밌게 들었던 것 같다.

나는 조용해진 필릭스를 향해 작은 미소를 지어 준 뒤, 벗어난 케이시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마탑에서 뭘 연구하고 있었는지, 말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돼. 당신이 먼저 말해 주면 나야 편해서 좋지만 없어도 크게 문제는 안 되니까.”

“그렇다면 나도 입을 다무는 게 편할 것 같은데.”

케이시는 말해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강경한 케이시의 태도에도 포기할 생각이 없으니, 짐짓 여유로운 체하며 아까처럼 회유하고 가볍게 협박도 했다. 하지만 모두 소용없다는 듯 케이시의 입은 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내가 협박치고 부드럽게 말해서 문제인가…? 아니, 그건 아닐 거다.

4황자가 기억하는 케이시의 성격상, 누군가가 힘으로 찍어누른다고 굴복할 사람이 아니니까.

그래서 더 배신감이 드는 거다.

케이시는 레이트라의 스승이자, 마탑의 주인이 되는 자리를 스스로 포기한 사람이다. 마법에 대해 자긍심도 강하고, 강직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황제의 밑에서 끔찍한 연구를 돕고 있다니.

협박을 받아 강제로 하는 게 아닌 이상은 말이 안 되는 일이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황제랑 계약 같은 걸 했나…? 하지만 당신 실력이라면 그 정도는 빗겨 나갈 수 있잖아.”

내 물음에 케이시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모호한 답을 했다.

결말이 나오지 않는 대화가 길어지자, 슬슬 짜증이 났다.

이럴 시간에 페모스토프에 쳐들어가 그 공작 놈을 협박하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르겠네.

“왜 하필 당신인지….”

나는 한숨을 크게 내쉬며 케이시를 바라보았다.

케이시는 4황자의 기억에서 너무 좋은 사람으로 기억되고 있다. 어머니의 스승이자, 멀리 있지만 의지가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알게 모르게 이 사람한테 약해지는 건지도 모른다.

애초에 이 사람의 고집이 워낙 세기도 하고. 강제로 알아내기에는 무리가 있다.

케이시는 나를 마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나는 그 미소에 어깨에 들어갔던 힘이 빠졌다.

“내가 접근을 잘못한 것 같네. 방식을 바꿔야겠어. 방금까지 내가 했던 말 다 취소할게.”

“폭력을 쓰려는 거니? 그런 게 통하지 않을 거라는 건 너도 알고 있잖니.”

“내가 그런 걸 할 리가 없잖아. 배신감은 들지만 당신한테는 손 안 대. 그냥 내 이야기 들어줘. 다 듣고 나면 보내 줄게.”

“뭐?”

내 말에, 철수의 뒤에 서 있던 필릭스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나는 그런 필릭스에게 괜찮을 거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여 줬고, 필릭스는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별말 하지 않고 넘어갔다.

케이시는 동전을 뒤집듯 바뀐 내 태도가 신기하면서도 경계가 되는지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려 의문을 표했다.

이해한다. 방금까지는 말하지 않으면 악마로 매도해 세상에서 매장시켜 버린다느니 뭐니 협박하던 애가, 이제는 다시 순한 모습으로 바뀌어서는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한다.

내가 생각해도 ‘이건 무슨 계획이지?’ 싶었을 거다.

나는 이곳에서 케이시를 붙잡고 있는 것보다는 페모스토프를 잡는 게 더 빠를 거라 판단한것뿐이다.

마탑에서 뭘 연구하든지, 드로이프의 생명을 갉아먹는 일은 이미 진행되고 있을 거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이 계획이 로웨나 왕국 어디에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한다.

“나는 황제가 뭘 하고 있는지 알고 있어.”

“그래?”

“고대 생물을 이용해 전쟁 병기를 만들고 있잖아.”

내 말을 들은 케이시는 눈을 크게 뜨며 놀라 했다.

그녀는 이 일이 새어 나갔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아님 내가 이런 걸 알고 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건지, 어찌 됐건 꽤나 충격을 받은 듯했다.

“당신은 그걸 도와주고 있는 중이고.”

“어떻게….”

“어떻게 알았는지는 말 못 해. 중요한 건 이게 아니야.”

나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 말한 뒤, 노반이 있을 마린의 방으로 갔다.

마린의 방문을 두드리고 내가 왔다고 말하자, 마린이 방문을 열었다.

문이 열린 뒤 보이는 마린은 조금 불안한듯 초조해보였다.

“마린?”

“화, 황자님… 확실하진 않지만 노반이 잠에서 깨지 않는 것 같습니다….”

마린은 목소리에 불안을 가득 담은 채 떨면서 말했고, 나는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눈을 감고 있는 노반을 확인했다.

마린의 말대로 노반은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 같으면 진작 잠에서 깨고도 남을 시간인데 아직도 잠에 빠져 있는 게 이상했다.

나는 좋지 않은 생각이 들어 황급히 마린에게 말했다.

“솔피라는 아름을 가진 시녀를 몰래 찾아봐.”

“몰래요?”

“응, 다급해 보이지 않게. 혹시 찾으면… 오늘 잘 들어갔냐고, 내가 걱정했다고 안부만 물어 주고. 없으면 내 방으로 바로 와 줘.”

마린은 혼란스러운 내 부탁에도 바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고, 나는 노반을 안아 든 채 내 방으로 돌아갔다.

품에 안아 든 노반은 평소와는 다르게 무거웠다. 이걸로 평범하게 잠에 빠져 든 것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졌다

노반의 의식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내가 안기 쉬운 가벼운 무게였을 테니까.

더욱 불안해진 마음에 눈앞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빠른 걸음으로 방으로 돌아갔고, 문을 열어 젠을 마주 본 순간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에 방 안에 있던 모든 이들이 깜짝 놀라 했고, 젠은 누구보다 빠르게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올려 눈물이 흐르는 내 눈가를 조심히 닦아 주며 내 상태를 살폈다.

“젠, 노반이… 노반이 안 일어나…!”

그제야 울고 있는 나를 살피던 젠이 노반을 바라봤고, 내게서 노반을 빼앗아 안아 들었다. 곧이어 노반을 빤히 바라본 젠이 말했다.

“괜찮아요. 조금 깊이 자고 있는 거예요.”

영혼에도 문제없어요. 평소처럼 빛을 발하고 있어요. 걱정할 거 없어요.

젠은 목숨에 문제가 생기면 영혼의 색이 흐려지지만, 노반의 색에는 특별한 변화가 없으니 아무 문제 없을 거라 말하며 놀란 나를 달랬다.

나는 젠의 말에 조금은 진정된 상태가 되었고, 불안으로 새하얘졌던 시야가 원상태로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깜짝 놀란 눈으로 나와 젠의 사이에 있는 노반을 바라보는 케이시가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