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 페모스토프 공작가를 향해 (8)
이른 새벽, 쪽잠을 자고 일어난 뒤, 페모스토프 공작이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한 작전을 세웠다.
참여 인원은 나와 젠, 마린 그리고 보리언이다.
나와 젠은 여정을 위한 간단한 짐을 싸고 있었고, 이 여정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지 않은 마린을 위해 보리언이 우리가 가야 하는 곳에 대한 정보를 알려 줬다.
“페모스토프 공작은 알란드에 있습니다.”
“알란드요?”
“로웨나 왕국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항구가 있는 곳입니다.”
보리언이 말해 주는 계획을 들은 마린은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황자님, 바로 출발해도 괜찮을까요…?”
마린은 우리의 계획을 듣고 내 걱정을 했다.
황성을 지키지 않고 떠나는 4황자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이라든가, 라이언 황제의 눈에 띄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괜찮아. 우리가 떠나는 건 로이븐한테만 말할 예정이야. 정확히는 편지지만… 그리고 황제한테는 이미 눈에 띈 것 같아.”
그러니 눈치 보지 않아도 돼.
노반에게 수면 향을 맡게 한 범인은 황제임이 틀림없다. 처음 느낌으로는 퍼디스가 아닐까 의심했지만, 황제가 퍼디스한테 자신의 계획을 말하진 않았을 것 같다.
페모스토프가 황후의 쪽인 것도 그렇고, 지아가 읽었던 일기장에서의 퍼디스는 라이언 황제와 큰 접점이 없다고 했으니, 이번 사건의 주동자가 퍼디스일 확률은 낮다.
궁금한 건 라이언 황제는 왜 노반에게 수면 향을 맡게 했냐는 거다.
노반을 데려가기 위해서일 가능성이 크지만… 아마 내게 경고를 하는 걸지도 모른다.
레이트라의 일을 더 파지 말라는 경고.
“그래서 이번 여정이 위험할지도 몰라. 어찌 됐건 황제는 내가 떠난 것을 알게 될 테고, 나를 제거하러 사람을 보낼 수도 있으니까.”
“그럼 떠난다는 걸 여기저기 알리는 게 더 안전하지 않을까요?”
조심스러운 마린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럼 보는 눈이 많잖아. 너의 안전은 황실의 안위가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사람을 엄청 몰아붙일 거야. 그럼 움직이기 더 힘들어질 거고.”
“아….”
황제에게 말하고 간다면 내게 사람을 덕지덕지 붙여 내 계획을 방해할 게 분명하고, 말하지 않고 간다면 프레오나의 볼모든 뭐든 ‘4황자는 혼자 나대다가 죽었다.’라고 하며 처리할 생각일 거다.
양쪽 다 뭐 같은 결과라면, 차라리 자객들이 내 목숨을 노리러 오는 후자가 더 낫다.
습격해 오는 적은 처리를 하면 끝이니까.
젠이 있는데 우리가 질 것 같지도 않고.
“마음 단단히 먹어. 힘들지도 몰라.”
나는 마린과 보리언을 바라보며 이야기했고, 그들은 고개를 끄덕여 내 말에 답을 해 줬다.
* * *
황궁을 몰래 나오기 위해, 필릭스의 도움을 받았다.
나는 필릭스에게 너네 가문으로 돌아가라 했지만, 필릭스는 돌아가지 못하고, 황제의 명령으로 마탑의 불을 끄는 일을 해야 했다. 아무리 노력해도 마탑의 불은 꺼지지 않을 것이란 걸 알고 있는 필릭스는, 그저 마탑의 앞에 서서 불을 끄는 시늉만 했다고 했다.
마법사도 사람이기에 하루 종일 마법을 쓸 수는 없으니, 나는 필릭스가 쉬고 있는 시간에 그를 몰래 불러냈다.
황궁을 나가기 위해 최면을 걸거나 폭력을 쓰는 등의 성가신 짓은 하지 않았다. 필릭스가 성문을 지키고 있는 기사들의 시선을 돌린 틈을 타 밖으로 빠져나왔다.
필릭스는 나와 다르게 사람을 잘 대해서 큰 위기 없이 나올 수 있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간단하게 상황이 해결됐으면 좋겠는데… 가능할지 모르겠다.
우리는 세네카의 상가로 가서 값이 꽤 나가는 튼튼한 마차와 그 마차를 이끌 말 몇 필을 구매했다.
정비를 맞춘 뒤, 쫓아오는 사람이 있나 확인했다. 그리고 마차는 알란드를 향해 달렸다.
알란드는 항구 도시이기 때문에 세네카 제국의 중심에서 바다가 있는 위쪽으로 쭉 달려야 한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짧으면 며칠, 길면 일주일이 넘게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다.
“노반은 아직 안 일어났지?”
“네, 아직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요.”
푹신한 쿠션 위로, 아직 잠에 빠져 있는 노반이 쌕쌕대며 숨을 쉬고 있었다.
어제보다 편하게 자는 것 같아 마음이 편해지긴 했지만, 혹시라도 못 깨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다.
“조금 기다리면 일어날 거예요.”
“그렇겠지….”
나는 조금 초조한 마음을 가지며 머리를 뒤로 기댔다.
마차는 쉬지 않고 목적지를 향해 달렸고, 페모스토프를 어떻게 구워삶을지 고민해 봤다.
사람들은 ‘나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가 무너질 때, 견디질 못한다. 그리고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를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더욱 쉽게 무너지고, 무너질 때 더더욱 절망하기 마련이다.
우정, 사랑, 가족, 그리고 명예.
그놈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뭘까.
“명예겠지? 황제 옆에서 그런 끔찍한 일을 하는 것만 봐도 답이 나오잖아. 엄청난 욕심쟁이기도 하고.”
“네…? 네, 그렇죠.”
마린은 걱정스러운 눈으로 노반을 바라보다, 혼잣말을 하는 나를 보고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욕심쟁이한테는 뭘 빼앗아야 할까.”
“목숨 아닐까요?”
마린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목숨’을 빼앗으라고 말했다.
그래, 이게 마린이지.
나는 오랜만에 진짜 마린을 만난 듯한 느낌이 들어 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세네카’라는 어색한 곳에 갇혀 마린과 대화를 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나 나름대로 해야 할 일과 4황자로서의 업무가 많이 있었고, 마린은 오랜만에 돌아온 세네카인 만큼 사람을 만난다거나 주변을 돌아보는 것에 바빴다.
지금 이곳이 아무 근심 걱정 없는 북쪽 저택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란 생각이 들었다.
내 옆에 앉아 가만히 미소를 짓고 있는 젠과, 자신이 곱게 가꿔 온 밭 위에서 반짝이고 있는 노반과 함께 있던 그곳이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대한 빨리 해결하고 프레오나로 돌아가자.”
나는 마린을 바라보며 여상하게 웃었고, 마린도 그런 나를 보며 밝은 미소를 지어 줬다.
* * *
예상과는 달리 알란드에 도착하기 전날까지도 습격은 없었다. 그동안 깨어날 거라고 생각했던 노반도 깨어나지 못했고, 나는 내내 불안했다.
지금쯤이면 습격을 해 올 법한데, 파동 하나 없는 잔잔한 호수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상하네….”
내 말에, 내 옆을 지키고 있던 젠이 무엇이 이상하냐 물었다.
“너무 고요해. 지금쯤이면 올 때가 되지 않았나?”
“습격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라이언 황제가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어.”
내 질문에 젠은 잠시 내 눈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사실 그간 꾸준히 왔었어요. 잡은 즉시 숨을 끊는 바람에 보낸 상대가 황제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요.”
“왔었어?”
“네, 늦은 밤마다 찾아오더라구요.”
나는 그동안 왜 내게 말하지 않았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묻지 않아도 답을 알 것 같았다.
습격은 아침이 아닌, 밤에 오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잠을 자지 않고 그들을 기다렸을 테고, 젠은 내가 몸을 망가트리면서까지 그들을 기다리는 게 싫었던 걸 테다.
그리고 오늘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날이니 사실을 말해 줘도 괜찮다고 생각했나 보다.
“규모는 어느 정도였어?”
“처음은 한두 명이었고, 어제는 여섯 명 정도였던 것 같아요.”
“…그럼 오늘 대량으로 올 거야. 확실해.”
한 번에 오지 않고 띄엄띄엄 보내는 걸 보면, 황제는 내 숨을 서서히 조이는 중인 것 같다.
왜 한 번에 덮치지 않는지 모르겠다. 젠의 실력을 시험해 보고 싶었던 것일까…? 그건 아닐 거다. 멍청한 것도 아니고, 그럴 거면 몇 명은 뒤에서 눈치를 보다 달아났어야 하는 게 맞다.
혹시 날 죽일 생각이 없는 건가? 아님, 네가 움직여 봤자라고 생각해 그냥 겁만 주려는 건가?
아무리 고민해 봐도 황제가 무슨 생각을 모르겠다.
“미르 님.”
“….”
“미르 님.”
나는 깊은 생가에 빠져 젠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고, 젠은 꼬물거리고 있는 내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의 손길이 느껴지자, 나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젠을 바라봤다.
“아. 무슨 말 했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젠은 내가 또 허튼 생각을 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나는 그런 젠을 향해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꽉 잡았다.
“라이언 황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황제요?”
“내가 알란드를 향한다는 건 진작 눈치챘을 거야.”
알란드로 가는 길은 이곳 하나뿐이다. 그렇다면 알란드에 무엇이 있는지 대충 알았을 텐데, 이건 막는 것도 아니고 곱게 보내 주는 것도 아니고, 애꿎은 목숨만 버리고 뭐 하는 짓인지 모르겠다.
페모스토프 공작을 빼돌리는 것은 아닐 거다.
앞서 말했듯 알란드에 가는 곳은 이 길이 유일하다. 그 뜻은 돌아가는 길도 이곳 하나라는 거다.
공작이 우리를 피해 어딘가로 가려면 이곳을 지나야 하기에 어쩔 수 없이 우리를 만날 수밖에 없고, 남은 길인 로웨나 왕국으로 향한다면 항구에서 기다리거나 우리도 들어가면 그만이다.
황제에게는 아무 이득도 없고 손해만 있을 뿐인데 도대체 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내 머리로는 이해가 가질 않는다.
나는 젠에게 황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물었고, 젠은 잠시 고민을 하다 입을 열었다.
“즐기고 있는 거 아닐까요?”
“즐겨…?”
“황제는 체스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이 벌여 놓은 판을 멀리서 관전하는 것처럼요.”
젠의 말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항상 무료한 표정을 하고 있는 황제랑 딱이다.
“진짜 변태 같은 놈이… 으악!”
쿠웅- 소리가 나며 마차가 멈췄다.
미리 눈치챈 젠이 내 몸을 잡아 주지 않았다면, 꼴사납게 앞으로 떨어져 코를 박았을 거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젠은 아직 눈을 감고 있는 노반을 내게 안겨 줬다.
“…가능한 이곳에 계세요.”
젠은 고집 있는 내게 ‘나오지 말라’ 당부하는 건 통하지 않는다 생각했는지, 가능한 이곳에 있으라 돌려 말한 젠은 검을 챙겨 밖으로 나서려 했다.
“젠, 마린…!”
“네, 걱정 마세요.”
젠이 나가기 직전, 나는 그를 향해 마린을 부탁한다고 이야기했고, 젠은 걱정 말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젠이 마차를 떠나고 나서, 나는 노반을 꽉 끌어안으며 귀를 기울여 밖의 상황을 살폈다.
젠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차 안으로 마린이 들어왔고, 나는 마린을 향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물었다.
“무장한 기사들이 알란드로 들어가는 문턱을 막고 있습니다.”
“기사들이…?”
“네, 100명은 족히 넘는 것 같습니다.”
“100명?”
나는 놀란 나머지 아공간 주머니에서 케이시가 줬던 스크롤을 꺼내 밖으로 뛰어나가려 했고, 마린은 내 허리를 잡고 나가지 못하게 말렸다.
“무장한 기사 100명이라니…!”
“괜찮습니다! 젠 님과 보리언 경이 잘해 주고 계세요! 그리고 어째선지 뒤에서도 호위가 붙었는지 잘 풀리고 있었습니다.”
뒤에서…?
“지금 황자님이 나가신다면 더 혼란스러울 겁니다.”
나는 단호한 마린의 말에 입술을 꾹 깨물다가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자리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