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자님 먹고 싶어요-178화 (178/227)

178 페모스토프 공작가를 향해 (10)

나는 내게 가까이 다가온 젠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젠은 그런 나를 보며 맥빠지는 표정을 지은 채 말했다.

“나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기어코 나오셨네요.”

“걱정이 돼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래도 상황이 진정되고 나왔어.”

“다친 곳은 없으세요?”

마차 안에서 손만 빨고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다는 내 말에, 젠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음 지은 채 다정하게 물어봤다.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내 옆에 서 있는 철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응, 멀쩡해. 철수랑도 같이 왔거든.”

“…보이진 않지만 느껴지네요.”

아, 그랬지.

철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상태가 아니었기에 그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을 거다.

보리언이 날 이상하게 바라봤을지도 모르겠네….

“아무튼 별 탈 없이 잘 왔어. 오면서 마주친 좀비들은 철수가 전부 불태웠고.”

“네, 다치신 곳이 없어서 다행이에요.”

젠은 내게 가까이 다가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다행이라고 말했다. 나는 조금 지쳐 보이는 것 같은 젠의 손을 잡으며 걱정했다.

“너는? 너는 다친 곳 없는 거야? 외관은 멀쩡해 보이기는 하는데….”

나는 젠의 몸을 위아래로 훑고, 다친 곳이 없나 구석구석 살폈다. 그런 나를 바라보는 젠은 내 뺨을 잡은 손에 힘을 줘, 다시 자신과 시선을 맞추게 한 뒤 고개를 끄덕이며 속삭였다.

“다친 곳은 없지만, 오러를 너무 써서 힘들어요.”

젠은 그리 말하며 평소에는 잘 보여 주지 않던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힘들었어…? 앉을 곳이….”

침울한 젠의 표정에 나는 깜짝 놀랐고, 어디 앉아 쉴 곳이 없나 주변을 살폈다.

젠은 그런 나를 보며 예쁘다는 듯, 마주 잡은 손을 꽉 잡고 입꼬리를 끌어 올려 야살스럽게 웃었다.

“장난이에요. 전혀 힘들지 않았어요.”

나는 그저 작은 장난이었다고 말하는 젠을 바라보며 뾰로통한 표정을 지었고, 젠은 그저 미소를 지었다.

젠이 힘들다고 하니, 마물 토벌에 다녀온 뒤로 그가 계속 잠을 잤던 때가 생각났다.

물론 지금은 그때만큼 힘을 쓰지 않았겠지만, 노반도 자고 있는 마당에 젠까지 자 버린다고 생각하니 순간 식겁했다.

만일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내 멘탈은 잘 튀겨진 튀김처럼 바삭바삭해질 거다.

“진짜 힘든 거면 말해야 한다? 나도 너만큼은 아니지만, 충분히 힘이 될 수 있는 사람이야! 철수도 내 옆에 있고….”

“이 몸은 다시 한나한테 돌아…, 알았어.”

눈치 없는 철수는 이 일만 끝나면 다시 한나에게 돌아갈 거라 말하려 했지만, 내 살벌한 눈빛을 마주한 뒤 꼬리를 내렸다.

생각할수록 서운했다. 내가 먼저 한나에게 가 있으라 한 건 맞지만, 철수의 계약자는 분명 나다.

철수를 한나에게 보낸 이유는, 불의 정령과 본질적으로 사이가 좋지 않은 노반이 불편해할 것 같기도 했고, 마찬가지로 철수도 불편해할 것 같아서였다.

그리고 내가 젠을 데려가 버려서 한나의 안전이 조금 위험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보낸 이유도 아주 조금 있다.

결과적으로 내 평안함과 한나를 위해서 철수를 보낸 게 맞지만… 내 속이 좁은 건지 뭔지 계속 한나에게 가려는 철수가 서운하다.

“별게 다 서운하다.”

내 생각을 읽은 철수가 비아냥거리며 말하자, 나는 철수를 바라보며 입술을 쭉 내밀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서운한 걸 어떡해.”

철수는 그런 나를 빤히 바라보다 시원한 웃음을 짓고는 진지하게 말했다.

“이 몸은 네가 부르면 언제든지 소환에 응할 거야. 그건 계약과 관계없는 이 몸의 의지고.”

“….”

“한나와 관계없이, 너한테 이 몸이 필요하다면 바로 너한테 가겠다는 이야기야.”

내가 바보도 아니고, 친절하게 설명해 주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아들었다. 그치만 나보다 한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 보이는 게 조금 더 서운한 거다.

물론 내가 한나보다 생각하는 것도 더럽고, 잔인하고, 정령들이 막 좋아하는 그런 타입은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서운하다.

부모님을 뺏긴 장자의 설움이 이런 것인가….

이런 감정을 느끼는 나도 내가 싫다. 가 버리라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같이 안 있어 주니 서운하다고 하는 게 어린애 같고 굉장히 창피하다.

철수는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큰 소리로 하하하 웃고는 말했다.

“지금은 한나가 알려 주는 것들이 흥미로운 것뿐이지, 이 몸은 계약자인 너와 함께 있을 때가 가장 편해.”

그러니 안심하라는 철수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서운했던 마음이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근데 진짜 이상하네. 나는 젠을 제외하고서는 다른 이들에게 집착이나 관계에 대한 서운한 감정을 느끼는 사람이 아닌데?

“그건 네가 이 몸의 계약자라 그래. 계약자가 이 몸과 오래 떨어져 있으면 자연스럽게 그리움이 쌓일 수밖에 없어. 이 몸은 너보단 덜하지만.”

철수는 자신이 정령왕이라 그런 건 크게 개의치 않는다며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그런 철수를 바라보며 싸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내가 이런 쓸데없이 서운했던 게 전부 철수 너랑 계약해서라는 뜻이잖아.

“그렇지.”

갑자기 굉장한 손해를 입은 것 같이 느껴졌다.

철수랑 계약을 하고 난 뒤 얻은 것도 많았지만, 성가신 일도 많이 일어나는 것 같다.

“아무튼… 철수 덕분에 안전하게 왔어. 아, 우리 이거 이야기하던 중 맞나…? 아, 아니었지. 철수도 있으니 젠은 힘들면 걱정 말고 쉬어도 돼.”

나는 철수의 시선을 피하며 젠과 대화를 나누려 했지만, 정신이 조금 혼미해졌는지 말도 헛 튀어나왔다.

아, 철수 보낼까.

“아, 맞다. 그리고 이거.”

나는 허리춤에 두른 혁대 안에 끼워 뒀던 것을 꺼냈고, 두 동강 난 검집은 다시 주인에게 돌아갔다.

“덕분에 찾으러 가지 않아도 되겠군요. 고마워요.”

젠은 내게서 검집을 받아들며 작게 웃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사실 감사 인사를 받을 일은 아니다. 두 동강 난 검집은 검집의 역할을 하지 못했으니, 사실상 쓰레기나 다름없었다.

“검집 깨져서 어떡해? 검을 그냥 들고 다니기에는 조금 위험하잖아.”

“일단 대충 맞는 걸 찾아서 써야 할 것 같아요.”

“그래도 괜찮아? 특수 제작한 것처럼 보이는데….”

젠의 검집은 아주 튼튼해 보이는 광석을 사용한 것처럼 칠흑의 색으로, 두 동강이 나기 전까지만 해도 보통 검집과는 전혀 다른 아우라를 풍기고 있었다.

“드워프가 만든 것이었어요. 이 검도 함께요.”

“드워프?”

“네, 평범한 검에 제 오러가 닿으면 금방 녹아 버려 오래 쓸 수가 없더라구요.”

젠의 오러는 칼날을 녹인단다. 그래서 옛날에는 보통 검으로 자신의 오러를 다룰 수 없었고, 반강제적으로 오러를 사용하지 못한 채 떠났던 토벌에서 운 좋게 드워프를 만나 도와준 보답으로 검을 선물 받았다고 한다.

드워프의 영혼의 색은 붉은빛이 섞인 듯한 갈색으로, 외관도 그렇고 평범한 인간이 아닌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고 한다.

나는 젠과 드워프의 신기한 인연에 놀랐다. 그런데 내 옆에 있던 철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젠에게 물었다.

“드워프가 인간한테 검을 선물해 줬다고…? 아무리 선물이라 해도 말이 안 되는데? 그 드워프의 이름 기억해?”

인간의 모습이 아닌 철수의 물음이 젠에게 닿을 리가 만무했고, 나는 젠에게 철수의 질문을 전했다.

“철수가 그 드워프 이름을 기억하고 있냐고 물어봤어.”

“이름까진 기억이 나지 않아요. 너무 어렸을 때의 일이라서요.”

젠은 고개를 저으며 모른다고 했고, 철수는 흥미가 돋았는지 눈을 반짝였다.

“이건 전례가 없는 신기한 일이야.”

“그 정도야…?”

“당연하지! 드워프에게 검은 하나의 삶이야. 하나뿐인 삶을 바쳐, 완벽한 검을 만들기까지 녹이고 만들고를 반복하거든.”

“근데?”

“그런데 타인에게 검을 줬다는 건, 자신의 검을 완성했다는 거고, 그건 장로 드워프라는 뜻인데, 드워프들은 자신의 검을 아주아주 비싸게 팔아. 그리고 인간은 쳐다도 보지 않지.”

철수의 말은, 드워프 같은 자긍심이 높은 존재가, 한낮 인간이라 여겨지는 젠에게 자신의 검을 준 게 의문이라는 거다.

드워프가 인간을 싫어하는 게 아니라, 인간들이 자신들의 검의 위력을 최대한으로 끌어낼 수 없다고 생각해 검을 주지 않는단다.

게다가 돈을 받은 것도 아닌 ‘선물’로 건네준 것이니, 드워프의 면을 생각해서라도, 자신이 제작한 검들 중 제일 자신 있어 하는 검을 줬을 텐데, 그걸 인간인 젠이 받았다는 게 엄청난 거라고 말했다.

철수는 젠이 어떻게 드워프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지 엄청 궁금해했고, 내게 얼른 물어봐 달라는 소리를 마음속으로 전했다.

“철수는 이걸 어떻게 받게 됐는지가 궁금하다고는 하는데… 말하고 싶지 않으면 안 해도 돼.”

나는 혹시라도 꺼려 하는 주제일 수도 있어 말하지 않아도 된다 했지만, 젠은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별거 아니었어요. 어쩌다 오크 무리를 마주쳤는데, 드워프가 잡혀 있기에 풀어 준 것뿐이에요.”

젠의 말을 들은 철수는 ‘운도 좋네’라며 감탄을 했다. 그러곤 잠시 부러진 검집을 바라보다가 희한하다는 듯이 물었다.

“검집이 부러진 게 의문이래. 검만큼은 아니겠지만, 검집도 꽤 공을 들여서 만든다는데?”

질문할 게 이렇게 많으면 그냥 인간으로 형상화를 하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철수를 바라보며 부엉이 짓은 그만하겠다 말했지만, 철수는 신경도 쓰지 않는지 젠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래, 정령은 호기심의 생물이지.

“그동안 검 대신 검집을 많이 사용해서 그런가 봐요.”

젠은 검을 써야 할 때 검집으로 많이 싸웠다며, 검집을 험하게 사용했기에 이제 슬슬 망가질 때가 됐다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프레오나 황궁으로 가는 도중 내가 타고 있는 마차를 멈출 때도 검집을 사용했었고, 나를 모욕했던 랄프를 팰 때도 검집을 사용했었다. 그때 금이 갔었지.

그리고 토벌에 갔을 때도 그 상태였을 테니 평범한 검집이랑 비교해서도 젠의 검집은 꽤 오래 버틴 거다.

“그 드워프 찾아 줄까?”

“찾을 수 있어?”

“장로 드워프는 빨리 찾을 수 있어.”

철수는 원한다면 찾아 준다며 젠에게 물어봐 달라 했다.

그냥 형상화하라니까 그러네.

나는 한숨을 쉬며 철수의 말을 젠에게 전했다.

“철수가 그 드워프 찾아 준다는데, 어떻게 생각해?”

“아마 로웨나 왕국에 있을 거예요.”

젠은 그 드워프의 목적지가 로웨나 왕국이었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 드워프의 이름이라든가 생김새 같은 건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때 젠의 목적지와 같아서 그건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그럼 만날 수도 있겠다. 우리도 그쪽으로 가긴 해야 하니까 말이야.”

내 말에 젠은 고개를 끄덕였고, 돌연 잡고 있던 검집을 뒤로 던졌다.

퍽― 하는 소리 뒤로, 누군가의 ‘악!’ 하는 비명이 들렸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