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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자님 먹고 싶어요-180화 (180/227)

180 페모스토프 공작가를 향해 (12)

나와 젠은 밧줄로 묶은 페모스토프 공작을 바닥에 질질 끌며, 좀비들의 시체가 쌓여 있는 숲에서 마차가 있는 곳까지 느긋하게 걸어갔다.

“안 무거워? 도와줄까?”

“괜찮아요. 그렇게 안 무거워요.”

젠은 공작을 묶었던 밧줄 끝에 두 동강 난 검집을 연결해 손잡이 용도로 만들었다.

“그렇게 해도 돼?”

“이미 망가졌으니까 괜찮아요. 전에도 이렇게 쓴 적도 많고. 이걸로 오우거 다섯 마리도 끌 수 있었어요.”

젠은 떼로 몰려다니지 않는 오우거가 다섯 마리씩이나 모여서 어디론가 향하는 것을 보았고, 민가를 약탈하려고 하기에 귀찮았지만 그 오우거를 토벌했다고 한다.

그 오우거들에게 꾸준히 약탈을 당했던 민가는 오우거들의 시체도 보기 싫어했고, 젠은 어쩔 수 없이 오우거를 끌고 다른 마을로 가야 했단다.

그리고 그때도 이 검집을 사용해 오우거를 끌었다고 한다.

젠의 검집은 정말 부러질 만하다. 젠은 검집을 험하게 쓰는 편이다.

검집이 제아무리 튼튼하다 한들 젠과 함께하고, 젠의 힘을 버티려면 드래곤의 이빨이라든가, 하다못해 가죽 정도는 돼야 할 거다.

“로웨나 왕국으로 가면 그 드워프를 찾아 보자. 철수가 도와준다 했으니 빨리 찾을 수 있을 거야.”

“…생각보다 어려울지도 몰라요. 은근 어벙한 드워프라 또 곤경에 처해 있을지도 모르거든요.”

“어벙해?”

“네, 제가 그 드워프를 처음 만났을 때도… 조금 그런 상황이었어요.”

보통 드워프는 무리를 지어 움직이거나 자신의 구역에서 나가지 않는데, 그 드워프는 혼자서 계속 어디를 싸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 오크에게 잡혔고.

이것만 들어도 그 드워프가 평범한 드워프는 아닐 거 같았다.

만나고 싶지는 않은데… 그래도 한 번은 만나야겠지. 젠의 검을 검집도 없이 생으로 내놓고 다닐 수는 없으니까.

검집을 잃은 젠의 검은 아공간 주머니 처박혀 있던, 붕대로 쓰는 헝겊으로 돌돌 둘렀다.

검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붕대를 감을 때마다 쓱쓱 잘리기에, 잘리지 않을 때까지 돌돌돌 말아 두께가 거의 성인 남성의 주먹만 했다.

사실 붕대를 열 번째 말 때부터 그냥 말지 않고 다녀도 될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 오기가 생겨서 끝까지 다 말았다.

“…알란드로 들어가면 임시로 쓸만한 검집을 구해 보자. 이건 안 되겠다.”

“이것도 멋져요. 오러를 쓰면 다 타 버릴 것 같지만….”

분명 영화나 다른 곳에서는 헝겊으로도 잘 감고 다니던데.

역시 영화는 영화인 건가.

나와 젠은 느긋하게 대화하면서 마차를 향해 걸었고, 공작의 뒤통수는 땅에 질질 끌려 엉망이 되어 갔다. 나중엔 머리카락이 빠져서 땜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공작한테 조금 미안해지려는 순간, 귀에 익은 여우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컁!”

환청인가?

“컁컁!”

환청이 아니다.

“노반!”

나는 노반의 이름을 부르며, 소리가 나는 쪽으로 빠르게 뛰었다.

나무 뿌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간신히 중심을 잡고 다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뛰었다.

“노반!”

“컁!”

내 눈 바로 앞에 얼음처럼 투명한 색으로 예쁘게 빛나는 푸른색의 아기 여우가 보였다.

아기 여우는 빠르게 달려와 내 품에 안겼다.

“컁컁! 컁!”

노반은 내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마구 비볐고, 나는 노반을 강하게 끌어안으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노반! 잘 잤어? 너무너무 보고 싶었어.”

“컁!”

“꿈이 너무 재미있었나 보다, 그치?”

“컁컁! 컁!”

그동안 노반이 눈을 감고 있던 모습만 보다가, 맑게 뜬 눈을 보니 가슴에서 울컥하고 올라왔다.

우리 노반 일어났구나. 이상이 있던 게 아니었어.

나는 눈앞이 뿌예지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에 노반은 크게 놀라 내 품에서 떨어져선 젠을 향해 크게 짖었다.

“컁! 컁!”

“노반이 건강하게 일어나서 미르 님이 안도하셨나 봐요.”

젠은 컁컁 짖는 노반에게 가까이 다가가, 여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흐트려 주며 작게 미소를 지었다.

“컁!”

노반은 머리를 흔들어 젠의 손에서 벗어났다. 그러고는 조그만 발로 열심히 달려 내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노반 멀쩡히 일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걱정 많이 했었어.”

“낑….”

나는 침울해진 노반을 바라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앞으로 누가 과자나 맛있는 걸 준다 해도 순순히 받아먹으면 안 돼. 알았지? 너는 먹어도 상관없긴 하지만, 그것 때문에 경계심을 잃으면 큰일이니까. 항상 조심해야 해.”

노반이 침울한 건 침울한 거고,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철저하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

독초든 뭐든 걱정없이 먹어도 되는 드로이프니까 아무거나 먹어도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우리의 안일함이 이 사태를 만들어 냈다.

노반에게 수면 향을 맡게 했던 솔피를 잡았던 그날, 내가 조금 더 캐묻고 추궁했으면 노반이 더 빨리 깨어날 수도 있었을 거라며 후회했었다.

하지만 이젠 노반도 일어났고 내 근심 걱정은 사라졌다.

솔피를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내가 아주 진짜 끝장을 내 줄 거다. 황제의 명이었든 뭐든 그딴 건 관계없다. 황제에게는 황제의 잘못을 백 배로 물어줄 것이고, 솔피는 오십 배다.

“약속하면 컁!”

“컁!”

나는 노반의 발바닥 위로 손을 올렸고, 노반은 내 손 위로 발 도장을 꾸욱 남겼다.

이건 약속이다.

* * *

기절해 있는 공작을 대신해, 페모스토프 저택에 가 본 적이 있는 보리언의 안내에 따라, 알란드에 위치한 공작의 저택으로 들어왔다.

저택의 대문 앞을 사병들이 지키고 있긴 했지만, 그들은 곤죽이 되어 끌려오는 공작의 모습을 보기만 할 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공작이 무엇을 끌고 저택을 나갔는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자신들이 지켜야 하는 사람이 만신창이가 되어 끌려다니는데, 우리에게 공격하지 않을 리가 없다.

“충성심이 없는 걸까요?”

“공작이 그럴만한 그릇이 아닌 거지.”

나는 사병들을 지나치며 페모스토프의 저택을 구경했다. 별장으로 지어 놓은 저택 주제에 그동안 내가 보았던 그 어느 저택보다 사치스럽고 화려했다.

건물은 전체적으로 단단하고 윤기가 나는 대리석으로 이루어져 있었고, 세네카에서 아주 귀하게 여겨지는 보석이 곳곳을 장식하고 있었다. 그리고 저택의 사치스러움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당대 최고의 화가들의 작품이 빽빽하게 복도에 쫘르르 걸려 있었다.

몇 개 가져가야겠다.

우리는 공작이 사용하는 엄청 넓은 방으로 들어갔다.

역시 자기가 사용하는 방이라 그런지, 복도보다 더 화려함의 극치였다.

차라리 복도처럼 유명한 화가의 미술품이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자신의 방에는 지금보다 더 젊어 보이는 페모스토프의 거대한 초상화가 떡하니 한쪽 벽면에 그려져 있었다.

캔버스도 아니고 벽면이라니… 자기애가 굉장한 사람인가 보다.

우리는 쓰러져 있는 공작을 그의 침대 위에 올려놓고 묶어 놨다.

그리고 공작과 이야기하는 도중에, 혹시라도 노반이 충격받을까 싶어 마린에게 부탁해 노반과 함께 저택을 구경해 달라고 했다.

“노반, 노반은 마린이랑 저택을 구경하고 제일 멋진 곳 하나 골라서 나한테 알려줘.”

“컁!”

아무래도 적진인데 마린과 노반 둘이 다니면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 생길까 해서 보리언도 함께 동행해 달라고 부탁했다.

보리언은 잠시 공작을 바라보다 알겠다고 하며 마린을 따라 나갔다.

나는 우리 마린이 ‘굳이’ 연애를 해야 한다면 마커스가 아니라 보리언 같은 사람을 만났으면 한다.

조금 무뚝뚝해도 자기 할 일 잘하고, 적당히 센스 있고, 적당히 다정하다.

나한테 하는 행동이 이 정도인데 사랑하는 사람한테는 오죽 잘할까.

그러니 만난다면 보리언 같은 사람을 만났으면 한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보리언이 나가고 남은 자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의문에 휩싸인 젠이 물었다.

그리고 나는 멍하니 생각하고 있던 말을 내뱉었다.

“만난다면 보리언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게 좋을 것 같아.”

사실 아무도 안 만나고 나와 함께 힐링 라이프를 즐기는 게 베스트긴 하지만 말이야.

생각해 보니 굳이도 아니다. 그냥 안 줄거다. 우리 멋쟁이 마린을 다른 놈팡이에게 주는 건 너무나도 아깝다.

“네…?”

내 말에 젠은 깜짝 놀라 반문했고, 곧이어 서늘한 기운이 퍼졌다. 그에 멍하니 있던 나는 곧바로 정신을 차렸고, 시선을 젠에게 돌려 황급히 말을 수정했다.

“나 말고 마린! 마커스를 만나는 것보다는 보리언 같은 사람을 만나는 게 낫다는 말이었어.”

“….”

“진짜야. 나는 네가 있는데 다른 사람 생각할 겨를이 어디 있어. ”

나는 젠에게 가까이 다가가 바람 같은 건 절대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나는 다른 사람이랑 이러쿵저러쿵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못 해! 너로 꽉 차 있는데 어떻게 해!

나는 혼신을 다해 ‘내게는 너밖에 없다.’라는 것을 젠에게 피력했고, 젠은 내 간절한 표정을 보며 미소 지었다.

“나중에 제 얼굴이 질린다고 버리시면 안 돼요.”

“질린다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절대 질릴 일 없어.”

나는 몇 번이나 그럴 일은 절대 없다고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눈에 들어오는 게 젠의 얼굴인데, 하루하루 볼 때마다 잘생겨진다. 늙어서도 잘생길 것 같은데 어떻게 질리겠어?

나는 항상 젠이 해 주는 것처럼, 젠의 뺨을 그러잡고 입을 맞췄다.

다른 게 있다면 젠은 고개를 숙이는 것이고, 나는 발을 들어야 한다는 거?

“근데 얘 언제 일어나…?”

나는 젠과 한바탕 애정의 표현을 나눈 뒤, 의자에 꼭꼭 묶여 있는 공작을 가리키며 물었다.

젠의 검집에 정통으로 머리를 맞고 기절한 지 몇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공작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공작에게 뇌진탕이 온 건 아닌가 걱정이 됐다.

공작이 뇌진탕에 걸리는 건 크게 상관없지만, 혹시라도 드로이프가 잡혀 있는 장소를 잊을까 봐 그게 걱정이 됐다.

젠은 왜 공작이 깨어나지 않느냐는 내 질문에 잠시 공작을 바라보다 이야기했다.

“이미 깬 것 같아요. 숨소리가 전보다 거칠어졌어요.”

젠의 말이 맞는지, 공작의 어깨가 흠칫하고 떨렸다.

하지만 공작은 계속 기절한 척을 하려는 건지, 잠시 놀랐을 뿐, 눈을 뜨지 않았다.

“언제부터?”

“이 저택에 들어오기 전부터요.”

아니, 그렇게나 오래 깨어 있었다고?

그럼 미리 눈 좀 뜨지. 시간 아깝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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