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다시 프레오나로 (5)
“메샤는 첫사랑이 언제예요?”
“저는 열여섯 살 때였습니다. 처음 만난 후로 눈을 뗄 수가 없었었죠.”
“정말요? 막 이 남자가 내 남자다! 그런 게 느껴졌던 거예요?”
지아의 물음에 메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마린도 신이 나서 메샤에게 질문했다.
“어떤 모습에 반했던 거예요?”
“음… 잘 모르겠습니다. 그냥 눈이 계속 가더라구요.”
“헉! 잘생겼었나요?!”
“아뇨, 잘생긴 외모는 아니었어요. 그냥 어디에나 있을 법한 남자였는데… 저한텐 그 남자만 보였었어요.”
메샤는 자신의 첫사랑 이야기를 하며 부끄러워했고, 마린과 지아는 그런 메샤에게 호응하며 더 이야기 해 달라고 했다.
나는 가만히 낮잠을 자고 있는 노반을 끌어안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그 남자랑은 잘됐어요?”
“…아뇨, 저는 부모 없는 고아였고, 그 남자는 어려서부터 약혼자가 있는 사람이었어요.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죠.”
어느새 나는 메샤의 이야기를 들으며 몰입했고, 이루어지지 못한 절절한 사랑 이야기에 아쉬워했다.
“그랬구나….”
“로지아는요? 로지아는 첫사랑이 있나요?”
메샤의 이야기가 끝나고, 마린은 지아를 향해 첫사랑이 있냐고 물었다.
그에 지아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전 아주 어렸을 때였던 것 같아요.”
“그 아이가 화단에서 꽃을 꺾어서 주는데, 그게 너무 좋았었어요.”
“잘생겼나요?”
마린에게 중요한 건 얼굴인지, 메샤한테도 그렇고 지아한테도 상대의 얼굴이 잘생겼냐고 물었다.
그에 지아는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생겼었어요. 전 얼굴을 제일 중요하게 보거든요.”
지아에 말에 마린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자신도 그렇다며 공감을 했다.
다행이다. 우리 마린이 마커스를 만날 일은 없을 것 같아.
“마린은요? 마린은 첫사랑 있어요?”
“저는 좋아했던 사람도 없어요.”
“정말요…? 그게 가능한가요?”
메샤와 지아, 그리고 나도 놀라 마린을 바라봤다.
그에 마린은 조금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뭐든지 완벽하지만 저보다 딸리는 남자가 좋아요.”
“네…?”
메샤와 지아는 마린의 이야기가 잘 이해가 되지 않는지 잠시 멀뚱멀뚱 바라보다 되물었다.
그에 마린은 잠시 머릿속에 있는 생각을 정리하더니 입을 열었다.
“뭐랄까…, 저보다 잘난 사람은 싫어요. 재수가 없거든요. 그렇다고 못난 사람은 싫어요. 자랑도 못 하잖아요.”
“….”
“그런데 보통의 귀족 남성들은 저보다 잘나지도 않았는데 기고만장합니다. 그래서 재수가 없어요.”
마린은 그동안 만났던 남자들을 생각하는지 표정을 구겼다. 그러곤 한탄스럽다는 듯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리고… 이 사람 괜찮다― 싶으면 다 짝이 있더라구요.”
“아, 맞습니다.”
메샤는 마린의 말에 공감하며 쯧 하고 혀를 찼다.
나는 마린을 바라보며 물었다.
“마린의 마음에 들었던 사람이 있었어?”
“두 명 정도 있었어요. 열렬하게 사랑하진 않았지만, 이 사람이라면 괜찮겠다… 정도? 가벼운 관계였어요.”
마린은 ‘황자님은 잘 모르는 사람’이라며 가볍게 웃어넘겼다.
“그러는 황자님은요? 황자님은 이프리트 경 말고 다른 사람을 좋아해 보신 적 있으세요?”
나는 지아의 질문에 잠시 내 과거를 돌아봤다.
염병. 전부 아파하거나 공부했던 것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없었어. 내 전부를 걸고.”
내 말에 지아와 메샤, 그리고 마린이 시시하다며 고개를 돌렸다.
진짜라니까….
“그럼 황자님을 좋아했던 사람은요? 황자님은 미모가 너무 빛나서 많았을 것 같은데!”
나를 좋아했던 사람은 손에 꼽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병원에서도 고백을 꽤 많이 받았었지, 퇴원하고 나서도 고백을 많이 받았었고, 학교에서도 많이 받았었고.
“고백은 많이 받았었어. 아무래도 겉모습은 멀쩡했으니까.”
“그런데요…?”
“나랑 대화 몇 번 하다 보면 생각이 바뀌더라.”
나는 짧게 웃으며 지아에게 말했다.
마린은 알 만하다는 식으로 고개를 저었고, 그동안 나와 대화를 해 오며 내 성격을 대략 눈치채게 된 지아마저 알 만하다며 마린에게 동조했다.
“진, 진짜 신기하다니까요! 지금까지 이런 성격으로 3황자를 참아 오시다니…!”
지아는 널리 알려진 4황자와는 다른 내 성격에, 혹여나 메샤가 의심을 할까 싶어 떡밥을 많이 풀어 놨다.
‘황자님이 지금까지 많이 참으셨네―’ 라거나, ‘프레오나로 가시더니 성격이 시원시원해지셨네―’라든가. 갖가지의 말로 나를 방어해 주려 열심이었다.
“내가 퍼디스 때문에 착하게 살았지만, 나도 한 성깔 하는 사람이야.”
“맞아요. 저희 황자님도 화가 나면 베개를 찢고, 방을 엉망으로 만드셨었죠. 그러고 혼자 정리하시긴 했지만요.”
나는 지아의 말에 조미료를 더했고, 마린이 마무리를 했다.
“그러셨군요…. 황태자 전하께선 착하고 순한 아우라며 항상 칭찬만 하셨기에, 황자 전하의 이런 면모는 새롭습니다.”
메샤는 작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고, 나는 메샤를 향해 마주 웃어 줬다.
프레오나의 국경을 넘을 때, 경비를 서고 있던 기사가 그때 한 번 만났던 그 기사라 진이 쏙 빠지긴 했다만, 덕분에 지아가 성녀임을 들키지 않고 무리 없이 왔다.
우리는 보리언 덕분에 오스먼드가 쓰는 황제 전용 길을 타고 저택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보리언은 중간에 오스먼드를 보러 가야 한다며, 내가 새로 쓴 편지를 들고 수도로 빠졌고 남은 인원들은 예정대로 북쪽 저택을 향해 달려갔다.
“오늘은 여기에 자리 잡자. 노숙이긴 하지만…, 마을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어쩔 수 없을 것 같아.”
나와 마린 그리고 지아는 나뭇가지를 치우는 등 자리를 정돈했고, 젠과 키오, 메샤는 주변에 마물들을 신경 써야 하는지 수색을 하러 갔다.
“그러고 보니 노숙은 처음이네요!”
지아의 말대로, 지금까지는 운이 좋아 여관에서 자거나, 보리언이 아는 여느 귀족의 별장에서 잠을 잤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리언도 없고, 마을과 마을에 사이가 먼 바람에 노숙을 피하기는 그른 것 같다.
“미안. 거리가 이렇게 멀 줄은 몰랐어.”
“아니에요. 노숙은 처음이라 사실 조금 떨려요. 캠프파이어 하는 기분 같아요.”
캠프파이어 좋지. 아침에 일어나면 몸에 벌레가 기어다닐 것 같은 느낌도 들고, 얼른 씻고 싶고, 추워 뒤질 것 같은 것만 제외한다면 좋지.
나는 목구멍에서 떠도는 말들을 삼키며 지아를 향해 웃어 줬다.
“다행히도 젠이 있으니 모닥불을 피우고 잘 수 있을 거야. 캠프파이어 느낌 나겠다.”
젠이 없었다면, 마물의 습격을 피하기 위해 모닥불을 끄고 자야 했을 거다.
한두 마리 정도는 키오와 메샤, 그리고 나 혼자서도 처리를 할 수 있지만, 혹시라도 마물이 떼로 몰려온다면 젠의 도움 없이는 멀쩡히 나갈 수 없을 거다.
지아는 마린이 설명해 주는 것을 듣고 정말 대단한 사람이라며 신기해했다.
“이프리트 경은 진짜 주인공 같은 사람이네요! 잘생겼어, 집안도 빵빵한 귀족이고, 능력도 좋아, 무뚝뚝한데 내 남자한테는 다정해! 이거 완전 소설 주인공이잖아요!”
지아는 두 손을 모아 호들갑을 떨며 이야기했다.
나는 그런 지아를 바라보며 하하 웃었다.
확실히 우리 젠은 비정상적으로 완벽하긴 하지.
“진짜 놀랍다니까요? 이프리트 경 같은 외모나, 집안이면 이미 누가 확 잡아채 갔을 텐데 오빠를 만나다니….”
“….”
“아! 이건 오빠가 부족하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두 분 다 다른 제국의 높은 사람이고, 혼기가 찬 성인이신데 이렇게 만난 게 신기했던 것뿐이에요!”
지아는 그런 뜻이 아니었다며 오해하지 말라고, 허공으로 손을 휘저으며 부인했다.
나도 그런 뜻이 아닌 줄은 알고 있다.
솔직히 젠과의 첫 만남이 그래서 그렇지, 나도 어디서 빠지는 사람이 아니잖아?
“알고 있어. 나도 충분히 잘난 사람이잖아.”
내 말을 들은 지아는 잠시 멍하니 내 얼굴을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쵸…. 진짜 몇 천 년 만에 태어난 보물 같은 외모이기는 하세요.”
“알고 있어.”
나는 지아를 향해 샐쭉 웃었고, 지아도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난 내 이야기보다 네가 더 궁금해. 메이븐이 좋아, 로이븐이 좋아?”
나는 그동안 궁금했던 이야기를 물었다. 그에 지아는 고개를 돌려 주변에 누가 있는지 확인하며 눈치를 보았다.
“키오랑 메샤 찾는 거야?”
“네, 둘 다 착하긴 하지만 첫째의 사람이잖아요. 아무래도 이런 이야기는 위험하죠.”
“아마 멀리 갔을 거야. 마물 수색은 멀리까지 가서 해야 하거든.”
내 말에 지아는 안심한 뒤, 다시 한번 주변을 살피고는 몸을 숙여 천천히 말했다.
“사실 저는….”
“너는…?”
나와 마린은 지아의 이야기에 귀를 귀울였고, 지아의 입모양을 보며 ‘로’가 나올지 ‘메’가 나올지 기다렸다.
“사실….”
아, 감질나!
얼른 말해 달라고 조르려고 할 때, 전혀 상관없는 사람의 이름이 나왔다.
“보리언 경이 좋아요.”
“예…?”
“내가 지금 뭘 들은 거야.”
‘로’도 아니고 ‘메’도 아니었다.
“보리언…? 내가 아는 그 보리언?”
“네. 뭐랄까…, 사람이 안 질리는 것 같아요. 전 엄청나게 잘생긴 사람보다 보리언 경처럼 훈훈하게 잘생긴 사람이 더 눈에 가는 것 같아요.”
나는 마린을 바라보며 잠시 뜸을 들였다.
사실 마린과 나는 지아가 누구에게 마음이 가 있는지 내기를 했던 참이었다. 마린은 로이븐, 나는 메이븐을 선택했다.
파시테 궁 정원에서 지아와 메이븐 사이에 돌았던 긴장감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메이븐이 더 그럴듯한 선택지라고 믿었는데….
내기에 걸었던 물품은 딱히 없었지만, 생각했던 선택지가 아니라서 꽤 아쉽고 놀라웠다.
“나는 메이븐이라 생각했어.”
“저는 로이븐 황태자 전하요.”
내 말에 지아는 잠시 생각을 하는가 싶더니 손을 휘휘 저었다.
“로이븐은 너무… 꽁꽁 싸매져 있고, 메이븐은 일 중독으로 일밖에 몰라요.”
지아는 둘 다 연애하기 글렀다면서 자신이 겪었던 이야기를 몇 개 해 줬다.
“로이븐은 항상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면서 부담 없이 대해 주긴 하는데, 뭐랄까… 사람이 진실 되지가 않아요. 만들어 낸 매너 같달까? 요새는 좀 친해져서 그런지 사람답기는 하지만….”
지아는 로이븐에 대해 생각하며 말꼬리를 늘렸다.
말로는 사람 같지 않다, 진실 되지 않다 하면서 켕기는 무언가가 있는 듯 바로 메이븐으로 말을 돌렸다.
“메이븐은 말 그대로 일 중독이에요.”
“에이― 그럼 그때 파시테 궁 앞에서 흘렀던 묘한 기류는 뭐였어?”
나는 지아를 향해 그때의 그건 무엇이냐 물었고, 지아는 귀가 조금 빨개지며 말했다.
“그건… 그… 갑자기 키스를 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어서….”
나는 지아의 말에 잠시 머리가 하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