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다시 프레오나로 (7)
해가 저물고 어둠이 내려앉은 지금, 크로스반 영주성까지 얼마 남지 않았고, 어떻게 알았는지 영주의 기사들이 먼저 나와 우리를 안내했다.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 변함없는 영주성 외관에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무언가가 달라진 게 없나 둘러보며 영주성의 안으로 들어갔다.
“황자님!”
“황자 전하!”
영주성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두 인영이 내게 달려오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했다.
멀리서도 확 튀는 쌍둥이 남매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반겼다.
“오랜만이야. 로이, 클로에. 그동안 잘 지냈어?”
역시 아이들은 빨리 자라는 것 같다. 잠시 못 본 사이에 키도 더 큰 것 같고, 이목구비도 뚜렷해졌다.
확실히 노반의 인간 모습이랑은 차이가 있다. 우리 노반은 처음 봤을 때 달라진 게 크게 없지만, 진짜 인간인 아이들은 쑥쑥 큰다.
“많이 컸네. 특히 로이가….”
내가 보통 성인 남성보다는 키가 작긴 하지만, 로이의 또래 아이들보다는 클 텐데, 로이의 시선과 내 시선은 거의 같은 선상이었다.
얘 왜 이렇게 컸어…?
“그렇죠? 전하의 호의 덕분에 오라버니의 몸이 좋아진 이후로 훈련을 시작했더니 금방 크더라구요!”
클로에는 자기가 컸다는 듯, 로이의 성장을 이야기하며 뿌듯해했다.
그럴 만도 한 게,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침대 밖으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시름시름 앓아 죽어 가던 오라버니가, 이제는 걷고, 먹고, 뛰고, 훈련도 하고 쑥쑥 자라고 있는데 어느 혈육이 기뻐하지 않을까.
“나도 로이, 네가 건강하니 좋네. 앞으로도 쑥쑥 자라.”
더욱 건강하게 자라라는 내 말에, 로이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영주는?”
“아버님은 잠시 일이 있어 밖으로 나갔습니다. 곧 돌아오실 겁니다.”
“그래…? 그럼 여기 있는 두 사람을 안내해 줄 수 있을까?”
나는 키오와 메샤를 가리키며 말했고, 클로에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과 가까이에 있던 시종에게 안내해 달라 말했다.
“황자님은 저택으로 돌아가실 예정이신가요?”
“응, 나는 집으로 가야지.”
“그렇군요…. 혹시 지금 바로 가시는 게 아니라면, 저희와 저녁이라도 함께 드시면 안 될까요?”
클로에는 그렇게 말하며 마치 고양이 같은 간절한 눈빛을 보냈고, 클로에의 옆에 서 있던 로이도 한마음 한뜻으로 내게 저녁 식사를 함께하자고 말했다.
“그래, 저녁이야 어렵지 않지.”
어차피 이곳에서 할 일도 있었으니 잘됐다.
“여기는 기억하지? 마린이랑 노반, 그리고 이쪽은 로지아 카트린 영애.”
나는 아이들에게 마린과 노반을 인사시켜 준 뒤, 지아도 함께 소개해 줬다.
그리고 아이들이 자아와 인사를 나눌 때, 잠시 다녀올 때가 있다고 하며 젠과 함께 자리를 벗어났다.
기억을 더듬어 미네르바와 세르비스가 있을 주방을 찾았다.
그곳에는 익숙한 얼굴의 요리사들이 많았는데, 그중에서도 은은하게 빛을 내고 있는 긴 머리카락과 홍안을 가진 세르비스가 눈에 띄었다.
“셀비스!”
“…도비?”
아, 저렇게 부르지 말라니까 그러네.
세르비스는 나를 발견한 뒤, 칼질을 멈추고 내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에 내 옆에 서 있던 젠이 세르비스가 내게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못하게 몸을 틀어 그를 막았다.
“진짜 도비였군요.”
젠의 방어에도 굴하지 않고 셀비스는 내게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모자라 꼭 껴안으며 오랜만이라고 반가워했다.
나는 그런 셀비스의 등을 퍽퍽 두드리며 오랜만이라고 답했고, 젠은 셀비스를 내게서 떼어 놓으며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피력했다.
“함부로 손대지 마시라고 이야기했을 텐데요.”
“이건 그냥 친근함의 표시일 뿐이니 너무 열 내지 않는 게…, 알겠습니다. 손 안 대면 될 거 아닙니까.”
젠의 무시무시한 눈빛에 셀비스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나 방어 태세를 취했다. 그러곤 나를 바라보며 점잖은 말투로 물었다.
“저택을 오래 비워 두셨던데, 어디 여행이라도 다녀오셨습니까?”
“저택에 갔었어?”
셀비스가 저택에 갈 일이라곤 딱 하나다.
나는 불안한 마음에 셀비스를 바라보며 물었고, 셀비스는 그런 내 마음을 눈치챘는지 부드럽게 웃으며 답했다.
“네, 갔었습니다. 도비가 보고 싶어지지 뭡니까.”
“장난치지 말고. 미네르바는? 미네르바는 어디 있어?”
내 물음에 셀비스는 잔잔하게 웃기만 할 뿐, 답을 내놓지 않았다.
이런….
나는 창백해진 얼굴로 셀비스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 정말 미안. 내가 여기에 있었어야 했는데….”
“도비가 미안해할 일이 아닙니다. 저야 무리 없이 잘 지냈고, 그저 소식만 전하려고 갔었던 것이니까요.”
나는 담담해 보이는 셀비스의 표정에 마음이 아팠다.
짧은 시간을 함께 보냈었던 것뿐이지만, 미네르바와 셀비스에게는 정이 많이 들었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원하는 게 있으면 아주 작은 것이라도 뜯어내려던 미네르바가 생각났다. 내게서 뜯어낸 것이 미네르바가 생각했던 가치에 맞지 않았어도 결국에는 츤데레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줬었는데.
그런 미네르바의 끝을 함께 보내 주지 못해 미안하고 죄스러운 마음뿐이었다.
“…이제 나랑 같이 가자.”
나는 셀비스를 바라보며 나와 함께 가자고 이야기했고, 셀비스는 그런 내 얼굴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도비, 분명 제가 도비와 함께하는 날이 기대된다고 했지만, 그건 정말 장난이었습니다.”
“….”
“저는 도비와 함께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오히려 제가 곁에 있는 게 도비한테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건 아닐 거다.
나는 셀비스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아닐 거야. 여기저기의 눈엣가시인 황자보다 위험하진 않겠지.”
“도비는 제가 무슨 상황에 처해 있는지 모를 겁니다.”
셀비스는 입꼬리를 살짝 올려 미소를 지으며, 나와 남은 생을 같이 할 일은 없을 거라며 거절했다.
셀비스와 얼른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싶었지만, 셀비스를 부르는 다른 요리사들로 인해 이야기는 끝마치지 못했다.
“…저녁이 이후에 네 방으로 갈게. 할 이야기가 있어.”
“네, 도비. 기쁜 마음으로 기다리겠습니다.”
셀비스는 나와 젠을 향해 짧게 고개를 숙이곤 주방으로 돌아갔다. 나는 젠을 바라보며 안쓰러운 표정을 지었다.
“마음이 너무 안 좋아. 조금 더 일찍 올걸.”
젠은 아무 말 하지 않고 내 손을 잡아 주며 영주성의 중앙으로 나갔다.
중앙에는 젠에게 배운 체스를 뽐내는 노반과 그런 노반의 상대가 되어주는 로이, 그리고 그걸 답답하게 보고 있는 클로에가 보였다.
역시 작고 귀여운 걸 보면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다.
나는 울적한 마음을 떨쳐내고 아이들에게 다가가 말했다.
“누가 이기고 있는지 볼까?”
체스판 위의 상황은 노반이 두 번만 더 움직이면 완벽하게 체크메이트를 할 수 있는, 압도적으로 이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평소 젠에게 지기만 해서 이를 갈면서 했던 훈련이 효과를 발휘하는 것 같았다.
“미르! 이거 봐, 내가 이겼어!”
“아직이야!”
노반은 내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눈치채고는, 신이 나서 자랑을 했다. 그리고 노반의 상대가 되어 줬던 로이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머리를 감싸고 체스판을 보고 있었다.
“로이, 이제 그만 인정해. 몇 판을 해도 이기는 건 나야!”
이게 첫 번째 판이 아니었는지, 노반은 이제 그만 단념하라며 로이를 약 올렸다.
그에 로이는 노반을 바라보며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고, 이윽고 체스판을 들어 뒤집어엎었다.
오…, 저거 우리 노반이 자주하던 건데.
“안 해!”
나는 로이의 모습에 웃음이 나올 뻔했다. 많이 자라기는 했지만, 아직 속은 아이긴 하구나.
나는 노반을 바라봤다.
항상 노반은 제가 판을 엎곤 했었다. 자신이 했던 짓을 되레 본인이 당하게 될 때는 어떤 반응을 할지, 또 어떻게 대처할지가 기대됐다.
나는 내 옆에 서 있는 젠에게 작게 속삭였다.
“노반이 어떻게 할 거 같아…?”
내 물음에 젠은 잠시 노반을 바라보다 내 귓가로 작게 속삭였다.
“울 거 같아요.”
나는 젠의 말에 노반의 눈을 바라봤다.
채스판은 뒤집혔고, 체스 말들은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들의 경기를 바라보고 있던 클로에는 꽤나 놀랐는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노반과 로이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고, 체스판을 엎은 로이는 아차 한 듯 노반의 눈치를 살폈다.
“….”
노반은 잠시 침묵을 지키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 것 같지만 최선을 다해 참는 느낌이었다.
나는 그런 노반을 진득하게 바라봤고, 노반은 잠시 숨을 고르다 로이를 향해 말했다.
“이러면 안 돼.”
“미, 미안해….”
“나는… 조금 억울한 것뿐이야. 하지만 이런 식으로 판을 엎는 건 너한테 좋지 않아.”
의외다.
젠과 나는 억울하고 분해서 울 줄 알았던 노반을 바라보며 신기해했다.
노반은 로이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을 해 주려는 것 같았지만, 로이를 바라보지 않았다.
그게 또 웃겼다. 로이의 얼굴을 보면 화가 나고 분할 것 같은지 쳐다보지 못하는 게 너무 귀여웠다.
“젠이 나한테 말해 줬어. 지면 깔끔하게 지는 게 덜 창피한 거라고. 이렇게 판을 엎으면 더 창피한 거라고.”
“응….”
“내가 내 실력을 알고 키울 생각을 해야지, 졌다고 엎으려고 하면 앞으로 엎을 일밖에 생기지 않을 거라고 했어.”
나는 노반의 말을 들으며 젠을 바라봤고, 젠은 노반을 바라보며 작게 웃었다.
은근 젠이 교육을 잘한다니까. 노반과 함께하는 시간이 상대적으로 많은 나보다 더 잘한다.
역시 나는 극성 부모고, 젠은 멀쩡하고 훌륭한 부모다.
“미안해….”
“오라버니, 사과는 제대로 해야죠. 무슨 짓을 했기에 미안한지,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건지까지 말하셔야죠!”
놀란 마음을 진정시킨 클로에는 로이를 다그치며 말했다. 그에 로이는 클로에의 말을 듣고 노반에게 다시 사과했다.
“재밌게 하던 게임을… 내가 질 것 같아서 엎은 거 미안해. 앞으로는 안 그럴게.”
“사과 받아 줄게.”
진정성이 가득 담긴 로이의 말에 노반은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들였다. 둘의 사이가 그렇게 다시 좋아지려 할 때쯤, 그들을 바라보고 있던 클로에가 나섰다.
“이렇게 끝나면 안 되죠.”
클로에는 엎어진 체스판과 체스 말들을 주워서는, 로이가 판을 엎기 바로 직전의 상황을 재연했다.
“자, 마지막까지 깔끔하게 지세요.”
클로에는 노반에게 로이를 끝장내라고 했고, 노반은 그런 클로에의 말에 나와 젠을 바라보며 혼란스러워했다.
클로에 진짜 잘 크겠다. 저걸 기억하는 것도 대단하고, 저렇게까지 사과를 시키는 걸 보면 범인은 아니다.
나중에 큰일을 할 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