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다시 프레오나로 (8)
굴욕적이다 못해 슬픈 패배를 겪은 로이는 식사 시간에도 멍하니 숟가락질을 할 뿐이었다.
잠시 밖을 구경하고 온 지아와 마린에게는 내가 아까의 일을 설명해 줬고, 지아는 클로에를 바라보며 보통 아이가 아니라며 놀라 했다.
쟤가 어렸을 때부터 좀 영민하긴 했어.
근데 영주는 곧 온다면서 몇 시간이 지나도 안 오는 거야?
“영주는 올 기색이 보이질 않네.”
나는 내 앞에 놓인 크림 수프를 떠먹으며 작게 말했고, 그에 클로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버지는 새로운 연애를 하시는 것 같아요.”
또…?
나는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클로에를 바라봤고, 클로에는 부끄럽다는 얼굴로 내 시선을 피했다.
이번에는 또 어떤 사람을 데려와서 애들 교육에 악영향을 끼칠지 걱정이 됐다. 정확히는 걱정보다 그냥 조금 답답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당하고도 또 다른 사람을 만날 생각을 하는 영주가 참 답답했다.
영주가 무슨 꼴을 겪을지는 내 알 바 아니라지만, 클로에와 로이는 내가 아끼는 아이들인데, 참….
“어떤 사람인지는 알고 있어?”
“아니요. 저도 전해 들은 거라 잘 몰라요. 그래도 선하신 분이라고 하더라구요.”
클로에는 영주의 옆에 붙어서 잡무를 처리하는 시종에게 들었다며, 상대가 누구인지는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고 했다.
나는 로이를 바라보며, 클로에의 직감을 잘 믿어 주라고 말했다.
세상 착하게 구는 릴리아의 실체를 알아차린 것도 클로에였고, 가장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던 내게 도움을 청한 것도 클로에였다.
클로에는 될 사람이라니까?
“네, 이제는 전처럼 당하고만 있지 않을 겁니다.”
나는 로이의 포부에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고, 메인 요리로 나온 닭을 우아하게 잘라 입 안으로 넣었다.
평범한 줄 알았던 치킨 스테이크는 셀비스가 했는지 보통의 치킨 스테이크와는 달랐다.
겉은 노릇하게 구워져 껍질이 바삭하게 씹혔고, 그 바삭함을 지나 속까지 들어가면, 치킨의 육즙이 터져 나오면서 진하고 담백한 풍미가 느껴졌다.
왜 소스를 따로 주지 않았는지 알 것 같다. 소금과 후추로만 간을 하는 게 이 치킨 스테이크의 육즙을 적당히 무겁고 담백하게 살리는 것 같았다.
“와… 이거 무슨…!”
지아도 이곳에서 먹어 본 음식 중 가장 자신의 입맛에 딱 맞다며 신기해했고, 나도 오랜만에 먹는 맛있는 음식에 신이 났다.
치킨 스테이크와 함께 나온 채소 절임은 예쁜 색이 입혀져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채소 절임 하나를 집어 입 안으로 넣었다. 아삭 하고 씹히는 맛과 함께 적당히 새콤한 맛이 담백한 치킨 스테이크를 완벽히 보완해 줬다.
만족스러운 식사가 끝이 났다. 피곤한지 잠에 들려 하는 노반을 잠시 마린과 지아에게 맡긴 뒤, 젠과 함께 단둘이 셀비스를 만나러 갔다.
셀비스가 사용하는 방이 위층에 있다는 건 알았지만, 정확한 위치는 모르기에 복도에서 셀비스의 이름을 부르며 크게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내 옆에 있던 젠이 그럴 필요 없다며 오른쪽 복도에서 세 번째 방의 문을 벌컥 열었다.
그 방 안에는 옷을 갈아입으려던 셀비스가 놀란 눈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놀랍군요. 제가 여기 있는지는 어떻게 안 겁니까?”
셀비스는 옷을 벗으려던 손을 다시 내려놓은 뒤, 젠을 향해 신기한 듯 질문했다.
젠은 셀비스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고 다시 내 옆으로 다가와 내 곁을 지켰다.
“셀비스, 얘기 좀 하자.”
나는 셀비스를 진지한 얼굴로 바라보며 이야기했고, 셀비스는 그런 나를 잠시 바라보다 얕게 웃으며 자신의 방 안으로 들어오라 손짓했다.
그리고 방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탁자의 의자를 끌어 주며 내게 앉으라 했다.
“의자가 두 개밖에 없어서, 경은 서 있어야겠습니다.”
셀비스는 얄미운 표정을 지으며 젠에게 말했고, 젠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셀비스가 앉으려던 의자를 뺏어 앉았다.
나는 내 옆으로 의자를 끌고 온 젠을 바라보며 웃었고, 셀비스는 그런 젠을 어이없게 바라보며 침대 발치에 놓인 작은 스톨 의자를 끌고 와서 앉았다.
나는 셀비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셀비스는 내가 이야기를 꺼내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을 하실지는 예상이 갑니다. 하지만 저는 도비의 말을 들어줄 수 없어요.”
“….”
“저와 함께 있으면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나는 씁쓸한 셀비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미네르바가 나한테 맡긴 거 아니야.”
“할머니께서는 그리 말씀하셨지만, 저는 도비에게 갈 생각이 없습니다.”
셀비스는 나와 함께 살지는 못할 거라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런 셀비스의 반응에 내 추론이 점점 들어맞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 것 같아.”
“아니요, 도비는 모릅니다.”
“아니야, 알고 있어. 나도 너랑 비슷하지만 다른 상황이거든.”
의미심장한 내 말에, 셀비스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무슨 말이냐 물었다.
“네가 어디서 왔는지 알 것 같아. 로웨나 왕국이지?”
“그걸….”
“도망쳐 나왔다며. 지금 시대에 도망쳐 나올 곳은 하나밖에 없지. 로웨나 왕국.”
내 말을 들은 셀비스는 잠시 놀란 표정을 짓다가 이윽고 차분하게 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나랑 같이 로웨나 왕국으로 가자. 해야 할 일이 있어.”
로웨나 왕국에 함께 가 달라는 내 말에, 셀비스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너와 미네르바가 왜 로웨나 왕국에서 도망쳤는지 알 것 같아. 로웨나 왕국은 끔찍한 짓을 저질렀으니까 그걸 피해서 도망쳐 온 거잖아.”
나는 셀비스에게 우리가 겪었던 일을 차근차근 알려 줬다.
세네카 왕국의 황제가 로웨나 왕국과 손을 잡았다는 것, 그들이 드로이프를 수면 향으로 잠재워 끔찍한 짓을 저질렀던 것, 그리고 그들이 만들어 낸 것들로 인간들을 망가트렸던 것까지.
셀비스는 어떤 것들은 알고 있었지만, 또 어떤 것들은 몰랐는지,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그런 셀비스에게 말했다.
“나는 로웨나 왕국 안으로 들어가야 해. 그래야 드로이프를 구할 수 있어.”
“안 될 겁니다. 도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도비가 아무리 강하다 한들 그들을 이길 수는 없을 테니까요.”
셀비스는 로웨나 왕국 사람들이 어떻게 변하지 봤었다며, 그들을 막을 수는 없을 거라 했다.
나는 그런 셀비스에게 고개를 저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이길 수 있어.”
“….”
“한 번 이겨 봤으니까 가능해.”
내겐 철수가 있으니 로웨나 왕국에서 만들어 낸 전쟁 병기 같은 건 통하지 않는다. 모조리 불태우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정령의 불로 태우면 시체조차 남지 않고 사라진다는 것이다.
애초에 그들이, 다시 멀쩡한 인간으로 돌아갈 수 있는 해결책이 있다면 좋을 텐데….
“아무튼, 나는 로웨나 왕국으로 가야 해. 셀비스, 너도 언제까지고 숨어지낼 수는 없잖아.”
나는 셀비스를 향해 단호하게 말했고, 셀비스는 나와 젠을 번갈아 보며 거절의 뜻으로 고개를 저었다.
나는 입술의 끝을 말아, 조금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지었고, 셀비스는 그런 나를 바라보다 자신의 이야기 시작했다.
“제 할아버지는 로웨나의 국왕을 따르는 귀족 중에 하나였습니다.”
로웨나 왕국은 귀족이든 서민이든 관계없이 잡아들여 사람의 의식을 앗아 가는 끔찍한 짓을 했고, 그 사실을 알게 된 셀비스의 할아버지가 아내인 미네르바에게 알려 자신의 가문이라도 로웨나 왕국을 빠져나가게 했다.
셀비스는 가족들과 빠져나오는 도중, 가족들 몇몇은 도망치기 위한 미끼가 되거나, 군사들에게 잡혔다. 잡힌 가족들은 목이 잘려 왕국 앞에 전시가 되었고, 로웨나 왕국민들의 공포를 조성했다고 한다.
결국 많은 군사들과 시종인들과 함께 나가려 했지만, 끝에는 미네르바와 셀비스, 그리고 두세 명의 시종들만이 로웨나 왕국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고 했다.
“정말 지옥 같은 곳이었습니다. 전 그런 곳으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나는 셀비스의 말을 들으며 침묵했고, 내 옆에 앉아 있던 젠이 말했다.
“당신이 함께하기 싫다면, 함께 나온 사람들을 만나게 해 주세요.”
“안타깝게도 전부 목숨을 달리했습니다. 로웨나 왕국을 나온 후 시름시름 앓았었죠.”
“그럼 어쩔 수 없이 당신과 함께 가야겠군요.”
“저는 그 땅을 밟기조차 싫습니다.”
셀비스가 성이 난 표정으로 단호하게 말하자, 젠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말했다.
나는 셀비스를 데리고 가는 것을 포기한 듯한 젠을 바라봤다. 그에 젠은 내게 뭐라 말하려 했지만, 셀비스의 눈치를 보며 다시 입을 다물었다.
나는 그런 젠을 놔두고, 아직 화가 나 있는 셀비스에게 말했다.
“이해해, 가기 싫은 거. 나였어도 그랬을 거야. 몇 년을 피해 다녔으니 공포가 각인돼서 더 무섭겠지, 끔찍하겠지…”
“….”
“그치만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다고 생각해. 로웨나 왕국을 가장 빠르게 무너트리려면 지금밖에 없어. 나도, 젠도, 이 일에 목숨을 걸었어.”
나는 화가 난 표정을 지운 채 침묵하는 셀비스를 향해 말했다.
“네가 그것들에 의해 자유로워질 수 있는 순간이 지금 왔는데도, 여기 가만히 있겠다는 거야?”
“도비, 저는….”
“선택해. 여기서 평생 그놈들 피해서 살든지, 아님 우리와 같이 가서 그놈들 조지고 편하게 살 건지.”
내가 막무가내로 말하자, 셀비스는 잠시 입을 벌리며 놀랐다.
“약속할게. 그놈들을 꼭 조져 버릴 거야. 난 그럴 힘도 있어.”
솔직히 셀비스가 생각 없고 상황에 잘 휩쓸리는 사람이었다면, 꼭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분위기를 조성해 휘몰아치듯 설득하고 약속을 받아 내면 된다. 하지만 셀비스한테는 그런 악독한 방식을 사용하고 싶지 않다. 애초에 통하지도 않을 것 같고.
나는 미간이 찌푸려진 셀비스를 바라보며 작게 숨을 골랐고, 그의 입이 ‘싫’을 외치려 할 때 말했다.
“딱 일주일만 기다릴게.”
“그러지 마시….”
“아니야, 기다릴 거야. 천천히 잘 생각해 봐. 너한테 큰 거 안 바래. 네가 없으면 우린 로웨나 왕국에 들어가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크게 부담은 가지지 말고… 어떻게든 방법이 있을 거야.”
나는 작게 웃으며 젠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그리고 결정을 했다면 저택으로 찾아와 달라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