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다시 프레오나로 (9)
아주 오랜만에 돌아온 북쪽 저택은 아주 정겨웠다.
달이 뜬 깜깜한 밤에 도착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작은 랜턴에 불을 붙여 주변을 밝혔다.
“오… 생각했던 것보다 깨끗한데?”
쑥대밭이 되어 있을 거라 생각했던 저택의 마당은 생각보다 깔끔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마당에는 낙엽이나 산에서 굴러온 것들로 지저분할 줄 알았지만 마치 어제 치운 듯 깔끔했다. 노반이 관리하던 밭은 겨울 작물을 전부 수확했는지 뿌리까지 말끔하게 뽑혀 있었다.
들뜬 마음으로 저택으로 들어가기 직전이었다.
현관문 앞에 놓인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이건 뭐지…?”
혹시라도 폭발물이나 이상한 게 들어 있는 게 아닌가 해서, 아주 조심히 열어본 상자 안에는 추운 지방인 프레오나에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약초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 뭐야, 이게?”
“그때 그 여자가 보낸 거 아닐까요?”
저택 주변을 살핀 뒤, 어느새 내 옆으로 다가온 젠이 말했다.
“릴리아?”
내 물음에 젠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생각나는 사람도 없으니, 젠의 말대로 릴리아가 보낸 것 같다.
한 달에 한 번이었나, 분기에 한 번이었나. 어쨌든 약초를 보내라는 협박을 하긴 했지만, 진짜 보낼 줄은 몰랐다.
이제 만날 일 없다고 개무시할 줄 알았는데.
“보내 주다니 고맙긴 하네…. 앞으로도 보내 주려나 모르겠다.”
나는 쌓여 있는 상자들 중 가장 위에 있는 상자를 들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찬기가 쌩쌩 맴도는 저택 내부는 사람이 찾지 않은 티가 났다. 주변에 먼지가 풀풀 날렸다.
휘날리는 먼지에 다들 기침과 재채기를 할 때, 마린이 불을 켜 저택을 밝혔다.
눈앞의 저택은 떠나기 전과 같아서, 진짜 ‘집’에 온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정겹고 포근했다.
“집이다!”
밭을 확인하고 뒤늦게 들어온 노반은, 소파로 달려들었다. 덕분에 소파 위에 쌓인 먼지가 노반에게 달라붙은 건 물론 공기 중으로 넓게 퍼졌다.
덕분에 잦아들었던 기침이 다시 시작됐다.
“노반, 얼른 씻자.”
나는 손을 흔들어 먼지를 분산시켰고, 젠은 소파 위에 유유히 누워 있는 노반을 떼어 내 욕실로 걸어갔다.
“마린, 지아한테 방 안내 좀 해 줘.”
나는 마린에게 지아가 지낼 곳을 마련해 달라 말했다. 그러고는 마법을 이용해 저택 전체를 청소했다.
청소 마법 정도야 마나가 많이 소모되는 마법이 아니라 아무 걱정 없이 할 수 있었다.
내가 마법을 쓰지 않았다면, 청소는 일단 자고 내일 아침에 해도 된다고 미뤘겠지. 물론 그 꼴을 못 보는 마린은 꾸역꾸역 치웠겠지만.
나는 지아가 제 짐을 풀고 있을 때, 오래전에 빚어 놓은 메주가 있는 곳을 점검했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마법을 사용하긴 했지만, 너무 많이 발효되면 처리가 어려워질 것 같아 잔뜩 긴장했다. 그렇게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가자, 딱 맞게 발효된 메주가 보였다.
“대박!”
“앗, 깜짝이야!”
나는 갑자기 나타난 지아 때문에 깜짝 놀라 심장을 부여잡았다. 그에 지아는 놀라게 해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은 채 내게 말했다.
“저거 메주예요? 대박! 교과서에서나 봤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에요.”
“응, 혼자 만들어 보는 건 처음이라 걱정이었는데 잘된 거 같아.”
“진짜 대단하네요. 예전에도 만들어 보신 거예요?”
“내가 만든 건 아니고, 할머니가 만들었던 걸 기억만 하는 거야. 가끔 TV에서도 만드는 방법 나오잖아.”
나는 완벽하게 만들어진 메주를 뿌듯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에 지아는 코를 킁킁거리며 메주의 냄새를 맡으며 이야기했다.
“근데 생각보다 냄새가 안 나네요? 거의 안 나는 거 같아요. 엄청 구린 냄새가 날 줄 알았는데….”
“마법이 왜 있겠어.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지.”
나는 지아를 향해 얕게 웃어 보이고는, 내일 일어나서 갖가지 장을 담가야 한다는 말로 겁을 주고 내보냈다.
“푹 자고 내일 아침에 보자. 뭐 먹고 싶은 건 있어?”
“김치!”
“아, 맞다. 김치 확인하는 걸 까먹었네.”
나는 지아의 말을 듣고 필릭스가 만들어 준 장독대를 살피러 밖으로 나갔다.
지아는 랜턴 하나를 들고 나를 따라 밖으로 나왔다. 나는 지아가 비추는 랜턴 빛에 의지하며 가장 큰 장독대를 열었다.
장독에서 흘러나오는 시원한 김치 냄새에 침이 고였다. 그리고….
“와!”
장독대의 안을 보고 신이 난 지아의 목소리가 마당을 울렸다. 솔직히 나도 조금 신이 난 것 같다.
완벽한 김장 김치였다.
“이걸로 내일 김치찜 해 먹자. 돼지고기 듬뿍 넣어서.”
“헉! 완전 좋아요! 너무 좋아요!”
“아, 미치겠다, 진짜. 내일이 너무 기다려진다. 이 기분은 우리밖에 모를 거야.”
“너무 행복해요.”
지아는 장독대를 바라보며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곧이어 2층 발코니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깔끔하게 씻고 나온 젠이 우리를 보고 있었다.
나는 젠에게 손을 들어 줬고, 젠은 그런 나를 보며 작게 웃었다.
“이제 들어가자, 감기 걸리겠다.”
“네, 오빠. 저 내일 일찍 일어날게요. 요리할 때 불러 주세요.”
“퍽이나 일어나겠다.”
그간 여관에서 묵을 때도 그렇고 노숙할 때도 그렇고, 지아는 우리 중에 가장 늦게 일어났다.
나도 피곤해서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 데굴거린 적이 있지만, 지아는 차원이 다르게 잠을 오래 잔다.
일부러 깨우지 않으면, 어두울 때 자서 어두워질 때 일어날 정도로 오래 잔다.
나는 처음에 애가 아픈 건 아닐지 걱정했다.
“푹 자. 늦게 일어나도 괜찮아.”
“아니에요. 저도 이제 적당히 자아죠.”
헤헤. 머쓱하게 웃는 지아와 함께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머리가 젖어 있는 노반이 우리를 반겨 줬다.
“미르! 나 오늘 미르랑 같이 자도 돼? 젠이 미르한테 물어보래.”
노반은 똘똘한 눈으로 내게 물었고, 나는 뒤이어 내려오는 젠을 바라봤다.
젠은 작게 웃으며 나한테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노반과 젠을 번갈아 보며 우물쭈물했다.
노반과 함께 자면 오늘 밤은 아무 일 없이 넘어갈 거다. 그렇지만…, 그러기에는….
“노반, 노반 지금 몇 살이라 그랬죠?”
그때, 지아가 노반을 향해 단호하게 물었다.
“그건… 왜 묻는데?”
“성인식도 끝났다고 하지 않았나요?”
“….”
지아의 말에 노반은 잠시 눈치를 살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노반의 행동에 지아는 작게 한숨을 쉬고 말했다.
“노반, 다 컸으면 혼자 자야 하는 거예요.”
“그치만….”
“‘그치만’은 없어요. 다 크면 혼자 자야 하는 거예요.”
지아는 노반을 향해 단호하게 말했고, 노반은 그런 지아의 말에 쩔쩔매며 내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나도 해 줄 이야기가 없어 노반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줄 수밖에 없었다.
잔뜩 뾰로통해진 노반이 가만히 있는 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그, 그럼 젠은? 젠은 나보다 더 컸는데 왜 미르랑 자?”
노반의 날카로운 질문에 지아는 잠시 말문이 막혀 나와 젠을 번갈아 봤다.
나는 계속 젠을 걸고넘어지는 노반에게 이걸 어떻게 설명을 해 줘야 하나 고민했다.
아이를 가지려고 열심히 노력 중이라고 할 수도 없고….
“노반과 저는 달라요.”
그때,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젠이 가까이 다가와 노반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내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뭐가 달라!”
“저는 미르 님과 이런 사이고, 노반은 이런 사이죠.”
젠은 나와는 이런 사이라며 내 뺨에 작은 입맞춤을 해 주었고, 노반과는 이런 사이라며 아이 같은 노반의 머리를 헝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지아는 티가 나지 않게 살며시 뒷걸음질 치며 뒤로 물러섰고, 자신의 방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던 마린의 손에 이끌려 방문 뒤로 숨었다.
구경만 하지 말고 나와서 도와주지….
“그게 뭐!”
노반은 젠의 손을 쳐내며, 나와 함께 자지 못해서 억울하다고 피력했다.
나는 젠과 노반의 눈치를 슬슬 보며 빠져나오려 했지만, 젠의 손과 깍지를 끼고, 노반도 내 손목을 잡는 바람에 도망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미르! 말해! 누구랑 잘 거야!”
“미르 님은 저랑 같이 잘 거예요. 노반은 착한 어른이니 이쯤에서 빠지세요.”
“항상 너랑 잤잖아! 나도 미르랑 잘 거라고!”
“항상은 아니죠. 노반이 들어와서 저희 사이를 방해한 적이 많았잖아요.”
노반은 젠을 바라보며 볼을 부풀렸고, 젠은 눈도 깜박하지 않고 노반을 바라봤다.
나는 노반이 화가 나서 울거나 혹은 가출하기 전에 상황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 그럼 이렇게 하자!”
나는 젠과 잡고 있는 깍지를 풀었고, 노반이 잡고 있는 내 손목을 비틀어 자유를 얻었다.
“어떻게?”
“….”
노반은 순수하게 어떻게 할 거냐고 질문하며 나를 바라봤고, 젠은 내가 할 대답이 예상되는 건지 잠시 표정을 굳혔다가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럼 각자 자자! 나는 나대로, 젠은 젠대로, 노반은 노반대로! 각자 방에서!”
내 말을 들은 젠은 자신이 예상했던 대답이 맞았는지 한숨을 푸욱 쉬었고, 노반은 짜증 나지만 젠도 나와 함께 자지 못한다는 사실에 만족한 듯 어깨에 들어간 힘을 풀었다.
“…그럼 내일은 나랑 잘 거야.”
“내일은 저랑 잘 거예요.”
“내일은 나랑 잘거야!”
이제는 내일 일을 끌고 와 싸우려는 젠과 노반에게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내일도 각자 잘 거야.”
그 말에 노반은 입을 크게 벌리며 실망한 티를 냈고, 젠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잠깐…, 너 그렇게 쉽게 포기하는 남자였어? 어?
나는 조금 서운한 기분을 느끼며, 우리를 지켜보던 마린과 지아에게 굿나잇 인사를 해 줬다. 그러고는 제 방까지 같이 가 달라는 노반과 함께 위로 올라갔다.
젠은 노반과 내게 인사해 주며 제 방으로 들어갔고, 나는 그런 젠의 뒷모습을 쓸쓸하게 바라보며 노반의 방으로 들어갔다.
푹신한 침대 위로 노반을 눕히고, 이불을 덮어 줬다.
“노반, 좋은 꿈 꿔.”
“미르도!”
나는 눈을 꼭 감은 노반의 배를 잠시 토닥거려 주며, 잘 자고 아침에 보자고 인사했다.
그러고는 노반의 방 밖으로 나와 내 방으로 들어갔다.
미리 덥혀 놓은 따듯한 공기가 좋긴 했지만, 뭔가가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이 저택에서 가장 넓은 방인데, 역시 혼자 자기엔 조금 쓸쓸한 것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젠이랑 노반이랑 셋이서 잘 걸 그랬다.
나는 서둘러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한 뒤, 아쉬움을 느끼며 침대 쏙으로 들어갔다.
그때, 누군가가 발코니 안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놀란 마음에 누웠던 몸을 일으켜 발코니에 다가갔다. 경계하며 발코니를 가리고 있던 암막 커튼을 걷었고….
“열어 주시겠어요?”
창문 앞에 서 있는 젠의 모습에 나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